정말이라니까요, 행복이 저만치 오잖아요
잘할 거라고 자신했던 것 중에 하나는 '웃기'이다. 웃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웃기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재밌는 것을 볼 때는 물론이고 맛있는 것을 먹을 때, 대화할 때 나는 항상 웃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난 뒤에 내 얼굴이 얼마나 웃기를 하지 않는 얼굴인지 깨달았다.
체력이 좋지 않은 편이라 소모되는 에너지는 크고, 이와 반대로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많지 않다. 쉽게 지치고 푹 고꾸라지기 일쑤인데 성격은 이와 반대이다. 어떡하든 무엇이든 그 끝을 보고야 마는 성미이다. 한 번 시작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몸이 힘들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에 내가 설정한 한계값이 어디까지인지가 더 중요하다. 내 몸의 상태가 그 한계값을 뛰어넘더라도 끝까지 가보고야 만다. 그리고 난 뒤에 후회 없이 쓰러진다.
이렇게 생겨먹은 성격 탓에 학창 시절엔 공부하는 것에 도움이 되었다. 시험기간, 논문을 작성해야 할 때 밤을 새우고 하루에 고작 한두 시간을 자더라도 스스로 허락하는 시간까지 매달렸다. 성미가 이렇다 보니 팀 과제에서는 나의 할당량이 제일 많았다. 팀원이 기한 안에 뒤쳐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몸이 안 좋다거나 집에 일이 있다고 하면 나는 세부적인 질문 없이 남은 과제를 떠맡았다. 혹은 처음부터 팀원에게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이야기하고 나 혼자서 모든 과제를 처리한 적도 있었다. 나는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팀 과제의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생각했다. '이 과제는 왜 팀 과제인가'라는 질문은 해보지도 않았다. 그 이유가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결혼한 뒤에 나와 남편이 정반대의 성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결과 중심적인 사람이고, 남편은 과정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한 기한 안에 일이 끝나지 않아도, 남편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일의 과정 안에서 무엇을 배웠는지가 중요한 사람이었으니까. 때때로 이런 문제로 부딪히기도 했지만, 서로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율하면서 큰 탈 없이 생활할 수 있었다. 아이를 양육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아이를 낳고 본격적인 양육이 시작되니 나의 성향은 처참히 무너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작 네다섯 살의 아이가 나의 스케줄에 따라 움직일 리 만무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은 내가 생각한 인형이나 로봇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나날 나의 계획에 따라 움직여주길 얼마나 바라 왔던가. 그래서인지 내 마음은 갈수록 조급해져 갔고, 다급한 마음에 아이들을 재촉하기 일쑤였다. "어서 밥 먹어, 엄마 치울 거야.", "얼른 이리 와, 양치하고 옷 갈아입어야 해.", "그만 이야기하고 이리 와, 씻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아." 나는 아이들을 재촉하고 다그치면서 나의 계획안에 끼워 넣고 있었다.
아이들의 놀이는 그 끝이 없는 법이다. 놀이 안에 엄마가 들어오면 좋겠고, 그 안에서 함께 웃고 싶어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나의 성향은 아이들과 함께 널브러져서 방을 어지럽히고 되는대로 놀지 못했다. 블록 놀이를 시작하면 그전에 놀았던 인형을 정리해야 했다. 소꿉놀이 중에 갖가지 장난감을 꺼내와서 반찬이 되는 것이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점점 표정관리가 안되기 시작했고, 나의 구겨진 얼굴은 아이의 놀이를 중단시키기에 이르렀다. "엄마 재미없어?"
어느 날 어김없이 아이와 놀이를 하다가 핸드폰을 켰다. 핸드폰 안에 아이가 나를 찍은 사진이 여러 장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 이 날도 아이랑 놀았었지. 에휴, 매일 반복되는 이놈의 놀이는 대체 언제 끝이 날까.'라고 한숨 쉬는 사이, 아이가 찍은 내 사진이 모두 무표정이라는 걸 발견했다. 나는 단 한순간도 웃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나를 바라보고 함께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데 나는 끝이 나는 순간만 기다리고 있으니 제대로 된 놀이가 형성될 리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아이와 '놀아준다'라고 했더라도, 나는 단 한순간도 아이와 논 것이 아니었다.
첫째 아이는 말장난을 하고 함께 웃는 것을 좋아한다. 나와 남편, 남동생을 웃기는 것을 기뻐한다. 때때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거나, 이상한 표정으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리고 아이는 자신을 지켜보는 가족들이 자지러지게 웃는 순간을 고대한다. 그게 그 아이의 행복이 충족되는 순간이다. 아, 나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아이의 장난에 함께 웃는 것만으로도 녀석의 행복지수는 한껏 상승하는데도.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도 이 아이의 말, 표정, 움직임이 나를 움직인다. 무엇을 할 수 있어서, 그 결과를 잘 낼 수 있어서 힘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무얼 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이를 통해 배운다. 엉망진창이어도 그 순간 함께 웃을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것이 없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