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양보는 그만해!

나는 그냥 칭찬이 듣고 싶은 거야, 엄마

by 은소리

첫째와 둘째의 터울은 세 살이고, 정확히 만 31개월 정도의 차이가 난다. 첫째는 여자 아이이고 둘째는 남자아이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두 아이의 호감이 같은 곳을 향할 때가 있다. 첫째 아이는 '여자다운 것', '여성스러운 것'을 좋아하면서도, 자동차나 공룡 같은 남자아이들의 장난감에도 관심이 많다. 일곱 살 딸아이의 관심은 '열일곱 미미', '시크릿 쥬쥬'와 같은 공주스런 캐릭터일 때도 있지만, '미니 특공대', '카봇'과 같은 캐릭터일 때도 많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의 놀이는 언제나 자동차, 공룡, 미니 특공대, 블록 등이다.


관심사가 비슷하다는 것은 놀이의 진행을 매끄럽게 한다. 두 아이가 모두 좋아하는 것으로 놀 수 있어서 즐거움이 배가 될 때가 많다. 심지어 만화를 볼 때도 두 아이가 서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이 같아서 시청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다. '카'시리즈나 '미니 특공대', '공룡' 등을 좋아해서 두 아이는 시청한 뒤에 꼭 프로그램을 따라 역할 놀이를 한다. 각자 좋아하는 캐릭터를 맡아서 신나게 놀다 보면 결국 싸움이 시작된다. 동생이 하던 캐릭터를 내가 하고 싶고, 누나가 좋아하는 캐릭터가 갑자기 좋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장난감 소비는 늘 두 배이다. 첫째와 둘째의 싸움을 방지하기 위해 늘 두 개씩 준비해 놓는다.


똑같은 캐릭터가 두 개씩 있더라도, 싸움은 언제나 일어난다.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옛 어른의 이야기는 진리인가 보다. 정말 한 치의 다름이 없는 장난감인데도 왜 누나의 것이 더 좋아 보이는 걸까. 둘째는 늘 누나의 것에 탐을 낸다. 이것 또한 성향의 차이일까, 첫째는 자신의 것을 엄청 소중하게 다룬다. 지저분한 것이 묻는 것도 싫고, 남이 자신의 장난감을 잠시라도 들고 있는 걸 견디지 못한다. 닦고, 안고, 어르고, 달래며 가지고 논다. 그런데 둘째는 장난감을 자신의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 색연필에 색칠도 해보고, 다리를 부러뜨려 보고, 집에 있는 모든 밴드를 꺼내 미라처럼 만들어 놓는다. 분명 같은 것을 사주었는데도 둘째의 것은 멀쩡한 것이 없다. 두 다리가 없거나, 밴드를 다 붙여놔서 끈적거리거나, 어디에 놨는지 몰라서 더 이상 가지고 놀지 못하게 된다.


이러한 두 아이의 놀이는 비단 장난감뿐이 아니다. 색칠 놀이를 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똑같은 색연필을 사주었는데 둘째의 것은 멀쩡하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 문제는 둘째가 누나의 것에도 같은 행동을 하려 든다는 것이다. 첫째는 종종 둘째의 성화에 못 이겨 양보를 한다. 놀이를 할 때, 색칠을 할 때, TV를 볼 때에도 주로 양보를 담당하는 몫은 첫째가 짊어졌다. 둘째는 특유의 떼쓰기와 짜증내기, 울기로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이뤄낸다. 결국 즐거움을 쟁취하는 것은 둘째이고, 더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가는 것은 첫째이다.


나도 둘째로 태어나 첫째의 괴로움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방관할 때가 많았다. 첫째로서 가진 스트레스가 얼마나 클지 가늠할 수 없다는 게 나의 문제이다. 첫째가 내게 달려와 울며 소리 지를 때 알게 되었다. '아, 이 아이가 참아주고 있구나.'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두 아이가 놀 때면 나는 둘째를 자주 부르게 되었다. "너 자꾸 누나가 가진 거 뺏지 마!", "누나한테 그러면 혼난다!", "사이좋게 놀지 않으면 장난감을 다 갖다 버려버릴 거야!" 등 갖가지 협박을 한다. 이런 나의 협박이 먹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언제나 첫째이다. 나는 분명 둘째에게 이야기 한 건데 첫째가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본다. "엄마가 다 버릴 수도 있으니까 내가 양보할게, 너 해. 싸우지 말자."


첫째는 종종 '오늘도 내가 양보했다'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그런 첫째가 답답하기도 하고, 결국 스트레스를 받게 될 이후의 상황이 싫기도 해서 "그러지 마, 네가 싫을 때는 양보하지 않아도 돼."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이야기에 좋아할 줄만 알았던 아이는 "엄마, 내가 양보했다니까"라고 재차 이야기한다. 그럼 나의 반응도 도돌이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다, "엄마, 그냥 나는 칭찬이 듣고 싶은 거야!"라는 아이의 말에 도돌이표가 사라진다. 칭찬이 듣고 싶은 마음에 꺼낸 이야기에 나는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한다. 공감을 바라는 아내의 말에 정답만 이야기하는 남편처럼 말이다.


공감의 언어에서 정답이 끼어들면 관계의 간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커진다. 어차피 정답은 말하는 너도 대답하는 나도 알고 있다. 그걸 알기 위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데, 나는 대화의 핵심을 놓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어차피 양보하고 끝나버린 일이라면, "우와, 대단하다! 어떻게 양보했어? 싫었을 텐데."라는 이야기가 먼저였어야 했다. 그런 뒤에 정답을 말해도 되는 거였다. 나는 대화에서 얼마나 많은 순간 상대의 마음을 놓치고 있었던 걸까. 너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거리가 이렇게 멀어지지 않을 텐데, 너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너는 언제든 내게 이야기할 텐데. 아이의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나는 다시 관계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