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오감을 열고 지켜봐요, 나의 계절을.
옛날에 엄마 아빠의 연배가 되시는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무엇이든 때가 있는 법이다'라고. 그 말에는 학생 때에 공부를 하라는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었다. 공부할 때 공부하지 않으면 머리가 굳어버려서 훗날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진다고 말하셨던 것이다. 공부뿐만이 아니라 무엇이든 그때가 있다는 것을 살다 보니 깨닫게 되었다. 다만 적당한 때를 알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학생 때의 공부는 주어진 것이기에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네 다섯 살인 아이를 붙잡고 '어서 공부해'라고 말하는 어른들은 없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간혹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뛰어놀아야 할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지 않듯이, 공부에 전념해야 할 사람에게 놀이를 권유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자발적인 마음은 언제부터 일어나고, 스스로 그때를 알 수 있는 것일까? 부모는 언제부터 아이에게 각각의 시기를 알려주고 이끌어주어야 하는 것일까.
나의 언니는 이전 글에서도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지적으로 뛰어난 아이였던 모양이었다. 네다섯 살에 구구단을 외우고, 간판을 읽어내었다고 하니 말이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쓸 정도가 되었으니, 언니를 향한 부모님의 기대는 정말 컸다. 부모님은 언니가 자녀양육의 기준이었다. 나를 낳고 난 뒤에도 같은 방법으로 양육을 시도하려 하셨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생겨먹은 녀석인지, 언니처럼 고분고분 따라간 적이 없었다. 거품 물고 쓰러지기, 옷에 그림 그리기, 아빠 노트에 낙서하기, 학교 대문을 타고 놀다가 혹이 생겨서 병원에 간 것도 여러 번이었다. 나의 돌발적인 행동 덕분에 부모님은 나를 향한 기대를 '건강'으로 좁히셨다. 덕분에 나는 언니만큼 공부에 대한 잔소리를 들으며 자라지 않을 수 있었다. 뒤돌아보면 이는 나에게 큰 선물이 되었다.
초등학생 시절 내내 한 번도 책상에 앉아 공부한 적이 없었다. 틈만 나면 밖에 나가 뒷산에 올라가 상자를 깔고 썰매를 탔다. 집에 오면 방바닥에 드러누워 만화책이든 동화책을 보았다. 친구가 많지 않았지만 나는 어떻게든 놀이를 만들어 내어 놀았다. TV를 보거나 책을 보고, 심심해져서 동네를 산책하더라도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나를 부모님은 체념하신 듯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덕분에 학교 담을 넘는 방법을 깨우쳤고, 동네 책방에서 높은 포인트로 책을 공짜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90년대의 일이다. 2020년에 이런 말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되는 딸아이를 보고 있자니, 앞이 캄캄하다. 내가 커온 방식대로 아이가 날마다 잘 놀고, 잘 먹고, 잘 울고, 잘 싸우고, 잘 화해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문득문득 이대로 두어도 되는 것일까 싶은 것이다. 다른 또래 아이들은 입학을 대비해서 한글은 말할 것도 없고, 수학, 줄넘기, 피아노 혹은 바이올린, 멜로디언 등을 익히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아이는 오로지 내 딸뿐이다. 더욱이 필리핀에서 돌아와 몇 달이 되지 않았으니 어린이집, 유치원 등 다니는 기관이 하나도 없다. 며칠 전 동사무소에서 남편에게 전화가 와서 아이의 건강검진을 놓쳤다며 다니고 있는 기관이 아직도 없냐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직원의 말투를 눈치챈 남편이 먼저 '아동학대' 때문인지를 물었고, 상대방은 멋쩍게 웃으며 그러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아, 아동학대라니.
약 2년 전에 온 가족이 필리핀으로 이동을 했었다. 남편과 함께 영어공부도 하고 여러모로 좋은 시간을 보냈지만, 도착하자마자 첫째는 큰 스트레스를 경험했다. 도착하고 난 뒤에 말도 잘하고 똑똑했던 아이는 말을 더듬었다. 그 당시 아이의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첫 아이는 만 18개월에도 문장을 정확하게 말할 줄 아는 아이 었기에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첫째의 말 더듬는 습관은 약 한 두 달이 걸렸다. 그때 나는 덜컥 겁이 났고, 그제야 아이가 경험했을 스트레스를 가늠하게 되었다. 아이는 의사소통에 능했던 만큼 변화하는 환경에 민감한 아이였다. 자신이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의사소통이 되다가 한 순간에 바보가 된 것이다. 그 때문에 나는 다시 귀국한 뒤에도 첫째에게 유치원에 가자고 요구하지 않게 되었다. 낯선 환경에서 아이가 느껴야 할 스트레스를 되돌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말없이 온몸으로 시달려야 했고, 스스로 말을 더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모두 그 시간을 그저 걸어, 통과해야 했다. 그것이 그당시 우리의 최선이었다.
아이의 성향을 알고 있기에 자꾸 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내가 밀면 밀수록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정서적 불안을 나 또한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계속 이렇게 그냥 두기만 해도 되는 것일까. 나와는 너무 다른 시대에 살고 있는데 내가 자라온 환경이 좋다고 이를 고집해도 되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과거에 묶여서 아이의 고통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조급해진 마음을 다잡고 아이에게 한글 공부를 시켰더랬다. 귀국하기 몇 달 전부터 오전에 시간을 정해서 가르쳤었는데, 어느 날은 흡수가 잘 되고 다른 날은 엉망진창이었다. 나의 티칭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내가 너무 다그치기만 해서 아이가 주눅이 들어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혼내는 듯한 말투를 너무 어려워하는 아이에게 나는 너무 이성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와 공부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이를 위해 아빠와 공부를 하기도 하고, 카드나 게임으로 한글을 배우도록 하였다. 그렇게 다시 한 발씩 뒷걸음치며 아이의 학업에서 발을 빼내었다.
며칠 전 아이들과 함께 중고서점에 놀러 갔었다. 그곳에서 둘째 아이는 자동차, 공룡을 사달라고 한 곳에 박혀 떠날 줄을 몰랐다. "엄마, 제발 사주세요."를 되뇌며 사줄 때까지 망부석이 되었다. 그동안 첫째 아이는 스티커 책이 있는 곳에서 서성거렸다. 워낙 그림 그리기와 스티커를 좋아하는 아이이기에 그러려니 했는데, 아이가 한글 쓰기 책을 꺼내 드는 것이 아닌가. 놀라고 있는 나를 향해 아이는 책을 보여주며 "엄마, 이건 한글 쓰기야."라고 말하였다. 한글 쓰기 책 다음은 수학이었고, 그 다음은 알파벳이었다. 나는 이런 교육적인 책에 관심이 있을 거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닮아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이니, 그저 내버려두면 된다고 마음 한편에 자위하고 있었다. 내 생각은 정말 얼마나 내 멋대로인가.
아이의 마음이 열리고 있었다. 스스로 부모를 향해 편지를 쓰고 더듬더듬 시계를 읽더니, 아이 스스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진 모양이었다. 그 어떤 양질의 교육도 마음이 열리지 않은 아이를 향한다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내가 이미 톡톡히 경험한 일이었다. 또래에 비해 내 아이가 조금 늦더라도, 아이가 마음을 열어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시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결국 아이의 학업마저 내가 아이를 키우고 얻어내는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나를 가르치고 그때를 알려주고 있었다. '엄마, 나는 지금 준비되었어.' 더 이상 게으름 피우고 변명할 게 아니라, 아이와 함께 다시 걸어가면 될 일이다. 다만 잊지 않고 아이의 속도에 맞춰서 말이다.
나 스스로에게만 집중하지 않고, 주변을 돌아볼 때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듯이 아이의 자람도 그러하다. 내 안에 아이를 꽁꽁 가두고 있으면 자랄 수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이미 아이는 엄마품을 벗어난 지 오래되었는데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자라나는 아이를 받아들이고 아이의 변화에 옷을 갈아입고 신발을 갈아 신어야 한다. "엄마, 나는 이제 그거 재미없어."라고 말하는 아이에게 나는 얼마나 지독히도 따분한 엄마였던 걸까. 새로운 계절을 맞이 할 아이를 위해 예쁜 신발을 사주어야겠다. 새 신을 신고 계절을 만끽하며 뛰어다닐 수 있기를, 넘어지고 일어나는 것을 다시 반복하게 될 너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