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그러면 화낸다!
아이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했다. 몇몇 아이들은 "부담임 선생님!" 하며 큰소리로 나를 불렀다. 괜히 다가와서 안기는 아이들도 있었고, 내 손에 자신이 몰래 가지고 온 젤리나 마이쮸를 주기도 했다. 학교와 학교 안의 사람들이 익숙해져 가기 시작했다. 마주치는 선생님들과 아이들 간에 인사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부부간에도 서로 간의 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모든 관계에 적당한 거리는 필요한 것이었다.
한 아이는 독립심이 강했다. 도움이 필요한 상황에도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강한 아이였다. 이 아이는 등교하기 전부터 '돌봄 교실'에서 알고 지냈다. 그때부터 아이의 성향을 파악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하루는 모든 아이들이 줌 수업을 듣고 있는데, 유일하고도 당당하게 유튜브를 보는 것이 아닌가! 아이에게 다가가 몇 번이나 이야기를 했었다. "00야, 지금은 줌 수업을 들어야지." 나도 처음엔 부드러운 목소리도 좋게 전달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나는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다. '한 번 이야기하면 알아들어야지, 아니 대체 들은 척도 안 하고 뭐 하는 거야!"라는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의 태블릿을 만져서 유튜브를 껐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그 아이를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선생님! 00은 유튜브 봐요!", "야! 너는 왜 줌 안 들어와!" 등의 고성이 오갔기 때문이다. 아이의 태블릿을 터치하고 유튜브를 끄는 순간, 아이는 내 손을 쳤다. 내 평생에 이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버릇없는, 개념 없는...'등의 단어들이 솟구치면서 화가 났다. 아이의 무례함이 나의 분노를 싹 틔웠다. 나는 그 순간 고민이 많았다. 나의 성격대로 화를 낼까, 이 순간을 참고 나중에 이야기할까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결국 나는 그 순간에 화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수업을 다 마치고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이런 일이 지속될 때 아이를 훈계해도 될지 물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렇게 해도 될 텐데, 알고 있으면 좋겠다며 대화를 이어가셨다. 대화를 하다 보니, 내가 오기 전에 그 아이를 둘러싼 이야기가 너무 많았다.
한 아이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담임 선생님의 수업을 제외한 타 교과 수업은 집중이 전혀 안되었다. 체육 시간에는 모든 공간을 돌아다녔고, 영어 스피킹 시간에는 바닥에 드러눕기 일쑤였다. 아이의 행동과 말은 어디로 튈지 몰라서 항상 지켜봐야 했다. 아이는 복도에서도 그냥 걸어가는 법이 없었다. 하루는 등교하면서 교실 앞 복도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아무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반 친구들이 아무리 불러도 꿈쩍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이 와서 아이를 일으킬 때까지 아이는 모두가 지나다니 복도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 아이를 지켜봐야 하는 일이 내일의 우선이 되었다. 아이의 행동으로 인해 다른 아이가 다치지 않도록 방지해야 했다. 또 그 아이로 인해 수업 전체가 방해되지 않도록 해야 했다.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사람을 관찰하는 것은 생각보다 즐겁다. 사람은 한 가지 행동만 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랑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따분할 새가 없다.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세세하게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행동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떼지 못하는 마음은 사랑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눈가를 만지고 머리카락을 쓸어내는 손길도 기억하고 싶은 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런데 그 반대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얄미운 표정이 선하게 그려진다. 어디로 튈지 모를 행동에 지쳐서 그만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다. 미운 사람은 물만 마셔도 밉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이 없는 관심은 모두를 지치게 하고, 결국 그 관계에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 내 맘 같지 않은데, 하물며 아이일까 싶다. 자신을 제어하는 것조차 버거운 겨우 아홉 살 아이들에게 '상호관계'를 바라는 것은 애초에 욕심이었다. 아이들의 미운 행동을 마주할 때마다 '사람 대 사람의 관계'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아이들의 행동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고, 덜 여물었으며 그래서 서툴렀다. 서툰 아이의 반응에 모든 감정을 쏟아 태도가 될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서로의 에너지를 갉아먹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한 두 달이 지나면서 새로운 마음을 먹어야 했다. 두 아이를 양육하면서 한 번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것을 훈련받는 기분이 들었다.
훈계하되 화내지 말기, 감정을 담아 혼내지 않기, 단호하게 말하지만 소리 지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