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 사각 지대에 놓인 시골 마을 어머님들을 찾아뵙는 '마냥이쁜우리맘'
눈부시도록 맑은 하늘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지난 5월 무렵, 여느 때와 다름없이 진료를 마쳤다. 평소 같았다면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테지만, 그날은 달랐다. 미리 챙겨온 커다란 가방에 세면도구와 갈아입을 여벌의 옷을 챙겨 넣고 집이 아닌 경기도 여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팔순이 가까워 오는 연로하신 어머님이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서울에서 귀한 의사 아들이 온다며, 밤잠을 설치셨다는 어머님은 대문을 열고 인사를 건네며 들어온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그리곤 온전치 않은 다리로 있는 힘껏 주방까지 걸어가 시원한 물 한 잔을 내어주셨다. 수줍지만 반가움을 한껏 담아 어머님께서 건네주시던 어머님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물을 건네주실 때, 살짝 스친 어머니의 손은 몹시 거칠었다. 흘러간 모진 세월들이 어머님의 손에 고스란히 묻어있는 듯했다. 손등에는 깊게 주름이 패여버렸고, 아무리 씻어내도 빠지지 않을 것만 같은 흙이 어머님의 손끝을 차지하고 있었다. 도무지 희고 고왔던, 가녀렸던 지난날이 떠올려지지 않을 정도로 거칠어진 손을 보며 나는 지난날 홀로 했던 결심을 떠올렸다.
갖은 고생 끝에 의사가 된 후, 나는 스스로와 약속을 했었다. 내가 운영하고 있는 병원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의사로서의 역량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지에 도달했다는 판단이 드는 날이 오면 비용 걱정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고 병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는 어머님들을 돕겠노라고. 일평생을 자식들을 먹여 살리느라, 가난한 형편에 큰 병원 근처에는 가보지도 못한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어머님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겠노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동안 전국 각지는 물론, 몽골, 러시아,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관절 치료를 받기 위해 나를 찾아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느라 숨 돌림 틈 없이 바빴었다. 이를 핑계로 나는 스스로와 했던 약속을 그만 까맣게 잊고 말았다.
나와의 약속이 다시 떠오른 것은 올해 초순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여러 건의 수술을 끝내고, 완전히 지쳐버려 의자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어떤 백발의 어머님이 내 앞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꿈속에서조차 의사였던 나는 어머님께 어디가 아프시냐고 물었지만, 그분은 끝내 답을 하지 않으시고 나를 향해 가녀린 손을 내미셨다. 그분의 손을 잡으려는 찰나에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난 이후, 냉수 한 잔을 마시고 정신을 차렸다. 아직까지도 그 꿈이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어머님이 내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셨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꿈에서 만난 그 어머님 덕분에 오래 전 갓 의사가 되어 스스로와 했던 약속이 불현듯 떠올랐다. 경제적인 이유로 의료 사각지대에 놓인 고령의 어머님들을 돕겠다는 그 약속 말이다. 더 늦어지면 내가 의사 가운을 벗을 때까지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에 나는 그 길로 바로 수술실을 나서 '마냥이쁜우리맘' 프로젝트 기획에 착수했다.
마냥이쁜우리맘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전국 곳곳 시골 마을에 사시는 어머님들을 찾아뵙고, 의료적인 도움을 드리기로 했다. 그저 단순히 치료를 해드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들을 직접 찾아뵙고 생활 환경과 습관을 살피고 지금 나타나는 질환들이 어떤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것인지를 제대로 확인하고 싶었다. 또한 고령의 어머님들이 엄두도 낼 수 없는 집안일들, 이를테면 높은 천장의 낡은 전구 갈기, 천 평이 넘는 밭에 김매기 등의 일들을 의사이기 이전에 아들로서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렇게 경인 방송 OBS를 비롯하여 수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마냥이쁜우리맘 프로젝트의 포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찾아뵙게 된 분이 바로 내게 냉수 한 잔으로 환대를 해주셨던 옥선 어머님이었다. 어머님은 18살 수줍은 소녀 같았다. 처음 만나는 의사 아들에 대한 설렘으로 양볼이 붉어지기까지 하셨다. 그런 어머님의 손을 꽉 잡아드리며 반가움과 나의 진심을 전한 뒤, 작지만 정갈한 살림살이들로 채워진 거실에 앉아 아버님의 옛 추억들을 함께 펼쳐보았다. 어머님을 부축해 뒷산에 올라 봄을 맞아 제철을 맞은 두릅을 따보기도 하고, 부족한 솜씨지만 정성을 다해 어머님을 도와 푸짐한 저녁상을 준비하기도 했다.
밤눈이 어두운 두 내외를 위하여 마당에 태양열 전등을 설치하기도 했고, 낡은 집 구석구석을 살피며 여기저기 손봐드리기도 했다. 전구가 수명을 다해 어두워진 화장실도 다시금 밝혀드려 어머님, 아버님이 편안하게 볼일을 볼 수 있도록 도와드렸다. 늦은 밤에도 한낮처럼 환해진 마당과 아들의 손길을 거쳐 쾌적해진 집안 환경에 어머님은 마치 아이처럼 한참을 밝게 웃으셨다.
여주에서 옥선 어머님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 뒤, 나는 먼저 서울에 올라왔고 얼마 뒤 어머님을 병원으로 오시게 했다. 바쁜 진료 일정의 연속이었지만, 틈틈이 짬을 내어 어머님이 검사 받는 과정을 살폈고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계속해서 체크했다. 1박 2일을 함께 보내면서 나도 모르게 틈틈이 어머님의 무릎을 살폈다. 걸음걸이 이와 통증의 양상도 계속해서 눈여겨 봐왔다. 이미 무릎 연골 손상이 많이 진행되었을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정밀 검사 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옥선 어머님은 그동안 얼마나 모진 세월을 겪어오셨던 것일까. 이를 보여주듯, 어머님의 무릎 연골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사실 완전히 닳아버려 뼈와 뼈가 맞닿은 심각한 상황이었다. 나는 어머님께 퇴행성관절염 말기 판정을 내렸고, 지체할수록 통증만 배가될 뿐이기에 이튿날 곧바로 필요한 절차를 밟아 '인공관절수술'을 진행했다. 수술을 하는 내내 나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또한 아들의 마음으로 어머님이 이 수술을 통해 하루빨리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빌었다.
나의 진심이 통한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수술이 끝나고 3일이 흐르고, 어머님은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병실의 긴 복도를 홀로 걸어 다니실 수 있게 됐다. 곧게 펴진 다리로 어머님은 세상에 나설 수 있게 되신 것이다. 마치 런웨이를 걷는 슈퍼 모델처럼 위풍당당하게 걸으시는 어머님의 모습에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입가에 피어오르는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옥선 어머님을 시작으로 나는 지금까지 서른 명의 가까운 어머님들을 직접 찾아뵙고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 드리고, 아픈 곳을 치료해 드리고 있다. 어머님이 계시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찾아가고 있는 요즘. 여주, 화성, 양평, 가평, 안성, 태안, 울진, 이천, 양양, 보령, 의성, 삼척, 평창, 무주, 홍성, 부여, 인천, 김포, 서산, 포항, 예산, 산청, 춘천, 안동 등 전국 팔도 방방곡곡을 누비고 있다.
진료를 마치고 어머님들이 계신 곳까지 차를 몰아 달려가려면 사실 체력적으로 지칠 때도 많다. 하지만 오매불망 의사 아들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어머님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나는 길 위를 달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숨 가쁘게 도착한 내가 어머님들과 소중한 추억을 쌓고, 어머님 댁의 크고 작은 문제점과 불편한 점을 해결해 드린 뒤, 집을 나서면 그분들은 밀려오는 진한 아쉬움에 눈물을 보이신다. 하지만 병원에서 곧 만나자는 재회의 약속을 드리고 나는 서둘러 진료실로 돌아온다. 며칠 뒤, 어머님들이 병원의 문을 두드리시면 나는 온 힘을 다하여, 아들로서 진심을 다해 치료에 임한다.
여담이지만, 얼마 전 성공적으로 치료를 끝마치신 어머님께 귀한 선물을 받았다. 집에서 직접 담근 김장김치와 경상도 북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빨간 식혜였다. 어머님댁을 방문했을 때, 유난히 내가 김치와 식혜를 잘 먹는 모습을 보고서는 아들에게 주고 싶어 안동에서부터 직접 챙겨오셨다고 했다. 아들을 주겠다고 그 먼 곳에서부터 무거운 가방을 이고 지고 올라온 어머님을 생각하니 코 끝이 찡해지며 감동과 감사함이 밀려왔다.
어머님이 건네주신 식혜를 내가 직접 국자로 일일이 퍼서 직원들에게 나눠주고, 함께 마시며 나는 또 다른 다짐을 했다. 내가 힘이 닿는 데까지는 이 프로젝트를 결단코 멈추지 않으리라고. 지금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해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전국 방방곡곡의 어머님들을 찾아뵙고, 그분들에게 건강한 여생을 선물해 드리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