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인프피는 브로콜리너마저를 좋아하는가

스무 살의 흐릿한 잔상들

by 무긴이

(1)


주황색 줄기가 점차 옅어졌다. 길게 늘어선 가로등이 이어져 만들어진 빛의 굵기가 얇아졌다. 그렇다는 건 가로등의 간격이 더욱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빛이 부족해도 상관없는 곳으로 가고 있다. 어쩌면 어둠을 향해 가는 것일 수 있다. 버스 안에는 나와 기사 아저씨를 포함해 서너 명이 타고 있다. 창문을 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어둠과 주황색 빛 줄기, 그리고 내 얼굴이 맺혀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로 연약해지는 빛들이 스쳐 지나갔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는 누군가의 대화 소리로 가득했다. 디스코자키가 무어라 떠들고, 이름 모를 존재의 사연을 읊어주고, 익숙한 노래 혹은 낯선 음악들이 흘렀다.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디스코자키의 목소리에 이어 과장된 소리로 도배된 광고가 나왔고, 이어폰에서는 전자 노이즈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손가락만 한 엠프쓰리 플레이어를 꺼냈다. 아마도 주황 빛 줄기에 따라 라디오 통신의 세기도 약해지는 듯 보였다. 나는 플레이어 상단에 달린 작은 버튼을 몇 번 눌렀다. 플레이어 화면에 비추던 숫자와 헤르츠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파란 버스 지붕 위에서 갈팡질팡하던 주파수는 걸음을 돌렸다. 플레이어 화면에는 혼성 밴드와 그들이 만든 음악의 제목이 떠올랐다. 해가 진 밤 골목 한구석에 가로등이 켜지면 보이는 어떤 공백처럼.


‘그때는 그럴 줄 알았지. 2009년이 되면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너에게 말을 할 수 있을 거라. 차갑던 겨울의 교실에 말이 없던 우리. 아무 말 할 수 없을 만큼. 두근대던 마음. 우리가 모든 게 이뤄질 거라 믿었던 그날은 어느새 손에 닿을 만큼이나 다가왔는데, 그렇게 바랐던 그때 그 마음을 너는 기억할까. 이룰 수 없는 꿈만 꾸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 진학을 했다. 살던 곳에서 백 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지방에 있는 작은 대학교다. 세 시간을 내리 시외버스를 타고 터미널에서 내리면,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한 시간을 타고 산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터미널이 있는 도시에서 학교로 가는 버스는 단 한 대뿐이었다. 그래서 아침 시간에는 학교로 들어가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아침이 지나면 밭일하러 가는 노인들로 가득했다. 낯선 풍경이었다. 한 곳으로 모이기 위한 젊은이들과 원래하던 일을 묵묵히 하러 가는 노인들. 그 파란 버스에서는 일상의 정경이었다. 내가 오기 전에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루였을 것이다.

사실 나는 도망쳐 온 것이다. 호시탐탐 내 목숨만 노리고 있는 총 칼을 든 킬러들을 피해서 아무도 모르는 타지로 줄행랑을 친 것이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러나 도망친 것은 맞다. 킬러나, 빚쟁이, 현상금 사냥꾼처럼 무시무시한 것에 쫓기는 신세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쩌면 나는 무엇에도 쫓기고 있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도망을 쳐야 했다. 나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야만 했다. 과거를 숨겨야 한다는 그런 콤플렉스는 아니다. 단지, 아주 낯선 환경에 내 몸과 영혼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리라. 어쩌면 그저 혼란스러웠던 것일 수도 있다. 졸업을 앞두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는데, 무언가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이 폭우 속 파도처럼 날 덮쳤을 수도 있다. 그 바람에 회색 건물들로 즐비한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고, 나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벗들을 피하고 싶었고, 나를 아껴주는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던 것일 수 있다.


‘・・・・언젠가 넌 내게 말했지. 슬픈 이별이 오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친구가 되어줄 수 있겠냐고, 아니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웃으며 말을 했었지. 정말로 그렇게 될 줄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2)


버스는 듬성듬성 서 있는 주황 가로등을 지나 어두운 터널로 들어갔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산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느껴졌다. 청록색의 어두운 빛들이 그 구멍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꺼풀을 중력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맡겨보았다. 앞은 어느새 온통 검은 면이었다. 공간감이 사라진 정면에는 일렁거리는 얼룩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길쭉한 모양의 얼룩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아래에서 위로, 사선에서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다. 공기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내리막길에서 가속도가 붙은 궤 안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이곳은 일순간에 그곳이 되었고, 나는 저곳을 향해 나아갔다.

결국 끝나지 않을 거 같은 터널을 빠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나는 눈을 떴다. 창문 밖에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대학교가 보였다. 어두운 하늘에 가위로 모양을 낸 것처럼 산들이 검은 형태로 놓여 있었고, 그 중앙에는 빨간 벽돌의 건물이 모여있었다. 학교 창문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고, 정리된 거리에는 순백의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다. 빛들은 모여 건물의 윤곽을 비추고 있었다. 그 앞에는 조용한 학교와 대비적으로 빨갛고 노란 간판들이 밀도 높게 형성되어 있다. 고정되지 않은 색들은 열렁거리며 대학가의 밤 풍경을 만들어 낸다.


‘이제는 어떤 말을 어떻게 하는 것도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는 걸까. 그러면 네가 했던 그 모든 얘기들은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말이 되는 걸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에서 기사 아저씨를 뺀 모든 사람이 내렸다. -그래봐야, 나를 포함해 세 명이었지만- 버스는 우리를 토해내고는 이곳을 떠나 터널을 향해 달려 나갔다. 아무도 앉아 있지 않은 뒷좌석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벼운 한숨이 뱉어졌다. 대학가의 밤거리는 어수선했다. 강의를 마친 학생들은 좁은 거리에서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젊음의 소음들이 산 속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거리에 개인들이 객체가 아닌 하나의 덩어리로 보였다. 버스 안에서 보았던 열렁거리는 색 덩어리처럼. 낮의 열기를 담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그리고 수많은 빛들과 취한 대학생들이 추상적으로 일그러지고 있다.


‘・・・・너에게 할 수 없던 말들, 너에게 할 수 없던 나를, 하지 않았다면 좋을 말들, 유난히도 파랗던 하늘.’


나는 이어폰을 귀에서 빼내어 길쭉한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동그랗게 감았다. 휴대전화를 열어 화면을 보았다. 어떠한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곧장 홍을 검색하여 전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에서 라디오헤드에 하이 앤 드라이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중간부터 나왔는데, 끝날 때까지 홍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더부룩한 음성 메시지 안내 음성이 들렸고, 나는 휴대전화를 닫았다. 나는 양 손을 깍지를 끼어 기지개를 켰다. 둥그런 숨을 볼 가득히 채우고 뱉어냈다.

홍은 나와 같은 과 동기다. 신입생이었던 나는 당연하게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매일을 조용히 지냈다. 강의실에서도 중간쯤 창문 쪽 책상에 혼자 앉아 있었고, 학교 체육관 뒤에 있는 작은 공원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식사는 보통 치킨 덮밥을 포장해 먹었다.- 강의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터널을 지나 터미널이 있는 도시 외곽에 있는 원룸으로 곧장 갔다. 자취방에서 매일 노래를 듣고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시답잖은 소설을 읽었더랬다. 그러던 여름 냄새가 산을 덮고 있던 어느 날, 강의실 앞에서 홍이 내게 말을 건넸다. 내용은 담배 한 개비를 빌릴 수 있냐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담배를 건네어 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태어나서 담배를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홍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렇다면 담배 피우러 같이 가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결단코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담배 냄새를 싫어하기도 하고, 담배를 안 피운다고 말했는데 말이다.- 몇 달간 사람다운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던 나는 민망하게도 흔쾌히 제안을 수락했다.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친구라는 것이-혹은 그렇게 불러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존재가- 생긴 순간이었다.




(3)


아스팔트에 배어 있던 낮의 열기가 진작에 날아가 버렸지만, 젊은이들의 숨결에 섞인 채도 높은 빛 덩어리는 식을 줄 몰랐다. 그런 광경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지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정류장 옆 조경용 바위에 앉아 컴컴한 밤하늘을 보았고, 산등성이에 얹어져 있는 벽돌 건물을 보았고, 맞은 편 낡은 분식집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다. 한숨이 가볍게 콧등을 스쳤다. 휴대전화를 열어보았지만, 시간과 무심하게 마주쳤을 뿐이었다.

홍은 나와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혹은 침팬지보다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는 개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관심받는 것을 즐겼다.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었고, 안부를 묻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으며, 그의 미소는 마주하는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그는 고등학생 때에도 공부에 흥미가 있는 편이어서 성적도 굉장히 우수했다.-왜 이곳 산골짜기 대학교로 왔는지 나를 포함해 모두가 의문이었다.- 심지어 농담도 곧 잘해서 어눌한 상황에도 말 한마디로 주변 이의 미소를 슬며시 끌어 낼 수 있었다. 홍은 마치 소설이나 드라마에 나오는 학교에 한 명씩 있는 그런 존재였다. 평범하다 못해 보편적인 종(種)인 나와는 전혀 달랐다. 그런 그가 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었을까. 왜 나와 함께 점심을 먹고, 서로의 고민을 얘기하고, 술잔을 기울였을까. 왜 오늘 만나자고 했을까. 왜 연락이 없을까.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에게 연락을 다시 하는 건 무의미할 것이리라- 하염없이 기다릴 수만은 없을 노릇이었다. 숨을 천천히 들여 마셨다. 공기는 가볍고 차가웠다. 여름의 손길이 미세하게 느껴졌다. 떠나는 이가 남기고 간 여운 같은 것이었다. 숨을 음미하며 뱉어냈다. 뜨거워진 숨은 흐르고 흘러 추상적인 빛 뭉치에 엮여가며 녹아갔다. 나는 오른발을 들어 앞으로 나아갔다. 왼발이 지면에 닿고 술로 가득한 거리로 걸음이 옮겨졌다.

술에 취한 대학생들은 정열로 가득했다. 하늘을 찢는 듯한 웃음소리와 술잔 부딪히는 소리, 강렬하고 허무한 숨결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생각해 보니 대학가의 밤거리를 거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게 술자리는 홍과 종종 터미널 근처 소소한 선술집을 가는 것이 전부였다. 보통 밤의 대학 거리는 과제를 밀어 둔 채, 없는 걱정을 만들어 내어 마시는 술 자리를 즐겨하지 않는다면 접할 기회가 전무했다. 이 거리의 요소가 되어 흘러가니, 밀도 높은 광기와 공허한 공기가 서로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야, 어쩐 일이야” 그녀가 멀리서 달려오며 말했다.

“이 시간에 네가 여기 있는 걸 처음 보는 거 같은데”


그녀는 홍과 마찬가지로 같은 과 동기다. 홍과 비슷한 느낌의 사람으로 나이스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홍과 친분이 있어서 가끔 그녀와 함께 점심을 먹은 적도 있었다. 물론 홍과 그녀가 대화의 대부분을 만들어 냈고, 나는 -귀를 닫지 못하고- 묵묵히 밥만 먹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작은 키에 말랐지만 연약해 보이거나, 소심하게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녀의 미소 때문이리라. 미인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투명한 해변의 파도 같은 미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미소는 음침한 골짜기에 떠다니는 상념에 따뜻한 햇살을 비추는 것만 같았다.


“혹시 길을 잃은 거야?” 그녀는 농담과 함께 미소를 지었다.

“홍과 만나기로 했었는데 연락을 안 받네”

“홍? ・・・ 아까 학교에서 동아리 모임하고 있었어”

“동아리 모임・・・・・ 아직 안 끝난 걸 수도 있겠네”

“그럴지도 모르지”


나는 다시 휴대전화를 열었다. 낮익은 파란 물결무늬의 배경 화면이 나를 반겼다. 홍은 약속을 깜빡한것 일 수도 있다. 그는 나와는 다르게 신경 써야 할 대상이 많다. 그가 만약 약속을 어긴다 해도 서운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는다. 다만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여기서 술 마시고 있어”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쪽에 보이는 야장 테이블 보이지? 거기서 학과 선배들이랑 술 마시고 있는데, 네가 터덜거리며 지나가고 있는 거야.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았어. 그렇잖아? 너는 항상 해가 지면 신데렐라처럼 저 꼭대기 터널을 지나 다른 세계로 쉭 하고 가버리니까 말이야.” 그녀는 자신의 말이 재미있었는지 쿡쿡 웃었다.

“정류장에 앉아 있다가 몸도 뻐근하고 해서・・・・・” 나는 무슨 의미를 잃어버린 말을 뱉었다.

“딱히 하릴없으면 같이 술 마시러 갈래? 성격 좋은 선배들이어서 너도 좋아할 거야”


나는 속으로 쿡쿡 웃어댔다. 사실 그녀는 나에 대해 모른다. 그런 그녀가 내가 좋아할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녀의 선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러니한 상황에 웃음이 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는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잃어버린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녀의 두 눈은 내 신을 허공에 맴돌게 했다. 간판과 가로등, 밤하늘을 떠돌던 내 눈은 그녀의 얼굴에 안착했다. 그녀의 눈은 술에 취해 가볍게 떠 있었으나 그 안에는 햇빛에 반짝이는 순백의 눈송이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시끌벅적한 거리가 순간 차분해졌다. 아니,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빛깔 덩어리 속에서 마비되었던 정신이 부드럽게 풀리는 것만 같았다. 멀리서, 혹은 가까운 곳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스피커를 지나, 하얀 가로등 빛이 묻은 채도 빠진 푸른 나무를 지나, 취기가 잔뜩 묻은 숨결로 가득한 공허한 거리를 지나서 말이다. 수나롭게 그녀와 나에게 닿았다.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그 여름날 밤 가로등 그 불빛 아래 잊을 수도 없는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너의 목소리에 믿을 수도 없는 꿈을 꿔.’


“오늘은 왠지・・・・”

“그럴 줄 알았어” 나의 말이 매듭지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나중에 홍이랑 셋이 먹자. 생각보다 맛이 좋은 곳이 많거든. 지금 내가 있는 곳도 치킨에 파무침이 올라가 있는 안주가 있는데, 술과 궁합이 굉장히 좋아.”


나는 그녀와 함께 술을 마시는 상상을 했다. 뜨끈한 닭살과 파무침, 그리고 시원한 맥주 한 잔을 그녀와 함께 먹는다.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단번에 날리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농을 한다. 나의 웃음소리는 밤하늘 곳곳에 퍼진다. 하늘은 시꺼멓지만 덥지도 춥지도 않다. 오히려 안락하고 잔잔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나를 본다. 그녀의 눈은 휘어지고 입꼬리는 살포시 올라간다. 아주 근사한 미소다. 그녀와의 술자리는 낯선 거리도 어떠한 가능성도 충만한 공간으로 변하게 하다.

그렇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녀를 따라 그 술자리에 갔다면, 그녀의 근사한 미소를 멀찍이서 몰래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안개 낀 들판에서 하늘에 뜬 태양의 일렁임을 어렴풋이 보는 것처럼. 그녀는 다시 그곳으로 떠났다. 오묘한 표정과 함께.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그것은 어쩌면 측은한 마음이리라. 밤거리를 떠도는 유령에 대한 본능적인 따뜻함 같은 것 말이다.


‘・・・・이제는 늦은 밤 방 한구석에서 헤드폰을 쓰고 춤을 춰. 귓가를 울리는 슬픈 음악 속에 난 울 수도 없는 춤을 춰.’


나도 결국 다시 걸음을 옮겼다. 휘황찬란한 거리의 끝자락에 거의 다 와 갔다. 뒤를 돌아보았다. 떠들썩한 술자리들이 거리 곳곳에서 피어나고 있었다. 빛나는 색채들이 한데 모여 뒤엉키고 흐트러지고 있다. 마치 추상적인 형상을 한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였다. 내 발밑을 보았다. 저 생물의 빛이 닿지 않는 거리의 끝이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오래된 맨션 단지가 있었다. 저 안에는 수많은 대학생이 부모들의 강압에 휩쓸려 들어가 있을 테고, 꿈을 안고 누워 있을 것이고, 아무런 상념도 피우지 않고 벽을 보고 있을 것이다.-혹은 또 다른 술자리가 벌어지고 있을지도- 나는 정열의 경계선에 서 있다. 앞을 보았다. 그곳은 어둠이 있었다. 낮에는 분명 푸른 나무가 있고, 풀이 우거진 공간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검은 그림자로 쌓여 있는 구멍 같은 공백이다. 그리고 주황색 가로등 하나가 주변을 간신히 밝히고 있다. 내 앞에 놓인 석교를 바라봤다. 저 다리를 건너면 대학가 밤거리를 정말로 벗어나는 것이다. 저기는 어둠과 주황빛 가로등만이 놓인 지방 도시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 혹은 아무도 모를 어느 한 공간, 그렇지 않는다면 그저 허공일 뿐이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열었다.



(4)


흐릿한 주황색 가로등만이 연약하게 주변의 어둠에 매달려 있다. 나는 그곳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내가 닿아야 했던 곳은 뜨거운 커피에 피어오르는 희미한 김처럼 사라졌다. 나는 그렇게 불나방처럼 빛을 향해 걷고 있다. 아슬아슬해 보이는 주황의 색은 빛 특유의 명랑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부룩한 느낌을 들게 했다. 저 가로등에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이 매우 강하게 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 뒤를 보았다. 간판의 색들이 엉킨 덩어리가 더욱 응집되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치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혹은 불안정한 홀로그램 이미지.

그곳에서 다시 고개를 돌려 미천한 주황색 가로등을 바라봤다. 결국 나는 눈을 감았다. 내 힘으로는 저 빛을 끌 수 없기 때문이리라. 순식간에 어둠은 나를 덮쳤고, 눈앞에는 여러 잔상이 흘러 내렸다. 터널을 지나는 버스에서 봤던 도형보다 더 간결하고 흐릿한 상들이 일렁거렸다. 어둠은 점차 그 상을 잠식해 나갔다. 경계가 사라지고 형태가 옅어지고 나약한 빛은 사라져갔다. 완전한 어둠이었다. 석교를 지나 색과 빛의 세계를 벗어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눈꺼풀을 내리고 가만히 있는 것.-


‘우린 긴 춤을 추고 있어. 자꾸 내가 발을 밟아. 고운 너의 그 두 발이 멍이 들잖아. 넌 어떡해. 어떻게 해야 해. 이 춤을 멈추고 싶지 않아.’


어둠 속에서 잔잔한 파도처럼 너울거림이 일었다. 아주 천천히 차분하게 여기서 저기로, 거기서 어디로 흔들거렸다. 반복적으로 너울거리던 어둠은 한곳에 모이더니, 덩어리가 되었다. 점차 입체감 있는 형상이 되었고, 어렴풋한 사람의 형태로 변해갔다. 그-혹은 그녀-는 내 앞에 서 있다. 형상은 상당 부분이 어둠에 녹아든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거기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여기가 어디인가?” 그는 말했다.


입을 열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들렸다. 공기를 매개로 파동이 일진 않았지만, 또렷하게 들렸다는 말이다. 나는 그의 질문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왜 그는 내 앞에 나타나 이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것일까. 나는 그의 질문에 어떤 답을 해야 할까. 이곳은 ㄱㅅ군 ㅁㅈ리 ㅊㅂ면이에요, 라고 대답하면 되는 걸까. 아니면 그와 내가 함께 있는 이곳을 말해야 하는 걸까. 이곳은 어둠이에요, 이렇게 말이다. 지금 이곳은 현실 세계인가 망상의 어둠인가.


“여기가 어디인가?” 그는 다시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 그는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여기가 어디인가?” 그는 냉철한 기계처럼 그 말을 반복했다.


“여기는 2010년이에요.” 나는 지나가는 말을 낚아 채어 답했다.


그는 어렴풋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끄덕인 것처럼 보였다. 내 답을 들은 그의 형상은 어둠과 더욱 혼합되고 엮이며 경계가 무너졌다. 그의 모습은 완벽하게 사라졌다. 어둠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의 질문을 생각했고, 나의 대답을 돌이켜 봤다. 방금 일어난 일이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사실이다. 여기는 2010년이다. 열아홉 살을 지나 스무 살이 된 내가 지면을 딛고 서 있는 2010년 말이다. 상념이 다음 상념의 꼬리를 무는 순간 어디에선가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것은 지금의 것이 아닌, 미래에서 넘어온 감정이었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래의 어디 에서 지금의 나를 그리워하는 쓸쓸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느껴졌다. 그 마음은 단순한 회한의 감정이 아니었다. 스무 살의 비루하고 초라한 모습을, 그리고 그 시기에만 존재하는 환상의 생물 같은 농도 짙은 낭만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확실하지만 않지만 그런 것이리라. 아까 검은 형상의 그가 남기고 간 것일까. 심연의 그는 누구일까. 이 감정은 무엇일까. 이제는 어찌해야 하는 걸까.

나는 막연한 심연 한 가운데서 미약한 한숨을 쉬었다. 깊은 밤 해수면 위로 내리는 한 방울의 빗물처럼. 아주 나약하고 불안정한 한숨을 내쉬었다.


‘우린 긴 꿈을 꾸고 있어. 문득 꿈이 깨진 않을까. 눈을 뜨면 모든 게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마치 없었던 일처럼. 난 눈을 감고 춤을 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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