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이데아란 요컨대 관념을 뜻해. 하지만 모든 관념이 이데아는 아니야. 이를테면 사랑 자체는 이데아가 아닐 수도 있어. 하지만 사랑을 성립시키는 건 틀림없이 이데아지. 이데아 없이 사랑은 존재할 수 없어. 사실 이런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도 정확한 정의 같은 건 몰라.”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2권, 전이하는 메타포⟫
나는 단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다. 그렇다고 연애를 못 해봤다는 의미는 아니다. 삼십 년이라는 인생을 살면서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몇 번의 연애경험이 있다. 하지만 그 관계가 사랑에 의한 것이냐고 묻는다면 명확한 답을 줄 수는 없다. 확실한 건 여러 매체에서 나오는 사랑의 형태에 가깝지 않다고-오히려 몇 광년 떨어져 있다고-할 수 있다. 정녕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아니,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그건 (원자핵 주변에 확률적으로 나타나는) 전자처럼 분명한 현상이지만, 정의 내릴 수는 없을 것이리라. 사랑은 존재하는 것일까?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하는 것이냐, 이 말이다.
나는 살면서 사랑에 대해 그다지-혹은 완전하게- 관심이 없었다. 나에게 연애라는 건, 그저 어떤 사람과 만남이 반복되는 것이었고, 그 반복이 공식적인 연애라는 상태로 넘어가는 (생물적인, 혹은 사회적인) 자연스러운 연속성이었거나, 굳이 거부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뿐이었다. 즉, 관계라는 축을 기준으로 마음과 행동들이 주변을 공전하고는 있었지만, 중심에는 중력이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내 생각은 모순일 수 있다. 공전은 하지만 중력이 없다. 연애는 했지만 사랑은 없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다.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도, 모순이 진하게 배어있는 것도.
나에게 사랑이란 발아래 반대편 아르헨티나에 사는 페르디난도의 재채기 같은 것이었다. 나랑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사랑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 수영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 겨우 발이 닿는 풀에 몸을 던진 것과 마찬가지로.
먼지 가득한 두꺼운 커튼 틈 사이로 아침의 햇살이 들어오고 있다. 빛은 가늘게 들어와 이불 위에 기다란 양지를 만들었다. 눅눅한 이불 안에는 속옷만 입고 있는 다리가 자리 잡고 있다. 다리 위로는 배와 가슴, 목, 어깨, 팔, 그리고 변변치 못한 머리가 달린 ‘내’가 있다. 일어난 지 꽤나 되었지만-오전 6시에 눈이 떠졌다.-, 10시가 넘도록 꿉꿉한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얼룩진 창을 통과한 빛이 방안을 은은하게 채우고 있다. 촌스러운 장미가 그려진 벽지, 과장된 곡선이 가득한 화장대, 한 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텔레비전, 천장에 매달린 기묘한 거울까지, 싸구려 모텔과 잘 어울렸다. 나는 묘한 냄새가 나는 침대 위에 홀로 앉아 있다. 그곳에서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모텔방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뒤엉킨 공기를 천천히 들이마시며.
“당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없어요?”
어젯밤-오늘 아침에 눈을 뜨기 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녀가 내게 했던 질문이다. 그녀는 홀연히 나타나, 그 질문을 던지고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젯밤 우리는 서로의 지인들과 함께했던 술자리에서 빠져나왔고, 자연스럽게 조용한 술집으로 들어갔다. 그녀와 나, 단둘이서.
술집은 취해있는 남녀가 술을 더 마시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더 끈적했던 술기운에 기억이 뚜렷하진 않지만, 빛과 소리, 분위기, 모든 것들이 어슴푸레한 것만은 머리 한편에 남아있다. 그녀와 나는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미셀 공드리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고, 캐나다 밴드 멘 아이 트러스트의 베이스 연주에 대해 향유했고, 햇살이 좋은 날의 공원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눴다. 내용이 대단하다고 할 수 없겠지만, 대화는 술이 입에 닿을 때 빼고는 끊기질 않았다. 보편적으로는 이런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몇 번의 만남이 이어지고 물 흐르듯 연인 관계가 된다. -혹은 그날의 잠자리를 함께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린 눈앞에 있는 술을 말끔하게 해치우고, 같은 술을 (그녀는 하이볼, 나는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술이 준비되는 동안에 그녀가 내게 ‘그’ 질문을 던졌다. 맥락에 맞지도 않을뿐더러,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 문장을.
나는 짧은 신음을 뱉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허벅지 정도의 작은 냉장고를 열어 500ml 생수병을 꺼내 마셨다. 입에선 짙은 알코올향이 올라왔다. 가늠할 수 없는 시공간을 초월한 고대의 미생물이 물에 닿아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나는 코로 숨을 짧고 빠르게 뱉어냈다. 그녀는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돌아오는 건 숙취로 인한 두통뿐이었다. 냉장고 앞에 있던 금박 장식이 다 벗겨진 검은 의자에 주저앉았다. 성질머리 나쁜 난쟁이가 뇌를 짓눌러 두통이 심각했다.
그녀는 내가 눈 뜨기 전에 이곳을 빠져나갔다. 도대체 어디를 그리 급하게 간 것일까. 나와 아침 햇살 아래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것일까. 어째서 아무런 메시지도 없이 떠나버렸을까. 나는 고개를 떨구고 두 엄지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연락하여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핸드폰 안에는 그녀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친구이자, 나의 친구인 그 녀석에게 물어볼 수도 있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호감이 있다.-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된다.
여러 상념과 의문들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생각은 고약한 난쟁이를 피해 우연히 뭉쳐있던 의문 덩어리에 닿았다. 혹시 어제의 모든 일이 나의 상상은 아니었을까? 사실 나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런 상념들은 오래가지 않았다. 내 왼쪽 손목과 팔꿈치 사이에는 그녀의 이 자국이 선명하게 멍이 들어있었다. 그녀의 치아 개수를 정확히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