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떠난 개

허공에는 영겁에 세월 동안 쌓인 흐릿한 우연이라는 자국이 남아있었다.

by 무긴이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누런 빛에 감싸진 화장실로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해서 수염을 대강 밀었고, 머리를 말리지도 않은 채로 모텔방을 빠져나왔다. 그곳에 더 있다가는 먼지로 뒤덮인 낡은 스탠드 테이블이 되었을 것이리라. 심한 두통은 걸음 뒤에 이어질 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근처 작은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 몸을 숨기듯이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에도 고약한 난쟁이 뇌를 뭉개고 있었다. 뜨거운 땀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덮었다. 땀방울이 각각의 개체로써 느껴졌다. 작은 땀방울···중간 땀방울···큰 땀방울···. 테라스는 생김새가 다른 의자 두 쌍씩과 작은 원형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밖은 습하고 후덥지근했지만, 에어컨디셔너가 내뿜는 인공적인 냉기보다는 땀을 흘리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음료는 차가운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차가운 커피를 앞에 놓았다. 그녀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지만, 나를 바라본 눈빛에는 곤란함이 묻어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매장에서 사람이 쓰러지기라도 한다면 난감할 것이다. 여자의 걱정을 조금 안정시키고자, 가까스로 미소 비슷한 것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내 미소를 보지 못했던 것 같았다. 커피를 놓고는 그대로 뒤돌아 시원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뿐만 아니라 누구도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리라.

나는 머그잔 담긴 커피의 반 정도 되는 양을 한 번에 들이켰다. 고약한 난쟁이로 인해 피신 갔던 정신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코로 숨을 들이마시며 눈을 감았다. 심연의 수면 위로 그녀가 했던 질문을 떠올랐다. ‘당신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적이 없어요?’, 나는 그 문장을 다시 입으로 소리 내 말해봤다.-다행히 테라스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그 문장이 우리 사이에 나타나기 전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러나 기억은 무너진 모래성처럼 흐릿한 윤곽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뭉개진 모래 덩어리에서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날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결코)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거기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지점이 하나 더 있었다. 질문을 받았을 당시에는 그것이 대수롭지 않았다는 것이다. 질문이 흘러 나에게 닿았고, 나는-아마도- 어색한 미소로 답을 했다. 우린 싸구려 모텔방으로 장소를 옮겨 보편적인 섹스를 했고, 아무런 꺼림칙한 것 없이 평온하게 잠에 들었다.-그녀는 그때도 내 대답을 기다렸을 수도 있지만- 도시 소음에 눈이 떠졌고, 그 질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덮쳤다. 잠에서 방금 일어난 정신이 응석 부릴 시간도 주지 않고. 그녀의 질문은 마구잡이로 뇌 구석구석에 자신만의 표식을 새겨 놓았다. 그것들은 너무도 개성이 강해서 당분간은 지워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렇게 일련의 흔적만 남겨 놓고는 사라졌다.

나는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과 마주하게 되었다. 경험이 아닌 개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사랑이 눈앞에 -꽤나 짙은 형태로- 아른거리게 되었다. 사랑을 한 적이 없는 에게.


뜨겁게 달궈진 지면에서 피어오르는 여름의 냄새와 허름한 골목의 소리를 담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눈을 감고 스쳐 가는 여름의 오늘을 느꼈다. 공기를 폐에 가득 담고, 서서히 내뱉었다. 도시의 열원이 아른거리며 피부에 닿았다. 어둠의 표면에는 추상적인 도형들이 꿈틀거렸다. 기묘한 움직임을 지긋이 느꼈다. 세모도 아닌, 네모도 아닌, 동그라미도 아닌 모양이 끊임없이 움직였다. 이마에서 시작된 땀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눈앞에는 작은 도로와 길쭉한 전봇대가 하늘을 향해 솟아있었다. 그리고 시야에 개 한 마리가 터덜거리며 들어왔다. 개는 털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털은 옅은 갈색과 하얀색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개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아무래도 웰시코기처럼 보였다. 개의 청결해 보이는 부드러운 털을 보니, 이 개를 기다리고 있는 주인의 모습이 상상됐다. 분명 기다리고는 있지만, 성급하지는 않으리라.

개는 혼자 도로를 돌아다니고 있다. 전봇대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개한테 나는 존재하지 않는 거나 다름없었다. 여기 있지만, 거기에는 없었다. 나도 상관없다. 그저 주인의 품을 잠시나마 벗어난 개일뿐이다. 웰시코기와 비슷해 보이는 연한 갈색털의 개.

나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실제로는 멈출 수 없지만- 커피를 입에 넣고 삼키지 않았다. 맛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아니고, 몸의 열을 식히기 위해서였다. 차가운 커피를 머금고 코로 숨을 쉬었다. 입안의 공기가 차가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식은 숨을 마시고, 그 후에 미지근해진 커피를 삼켰다. 이것이 인생이다. 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하지만 사랑은 아니다. 고개를 짧게 좌우로 흔들었다.-살짝 어지럼증이 났다.-

사랑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은 맞다,라고 소리 내어 말해봤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인가? 질문은 공허한 들판에 피어올랐다가 금방 흩어졌다. 허공에는 영겁에 세월 동안 쌓인 흐릿한 우연이라는 자국이 남아있었다. 옅어질 순 있으나,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얼룩’ 말이다. 잠시만, 오늘은 그만 생각하기로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오늘은 사랑에 대해-그 무엇에 대해서도- 그만 생각할 것이다. 그런 건 내일 생각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페르디난도의 재채기처럼.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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