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창을 넘은 햇살은 방바닥에 네모난 호수 같은 양지를 만들었다. 그 빛은 어찌나 밝은지 마치 지면에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뽀송한-이불속에서 그것을 보고 있었다. 어떠한 상념도 남겨 놓지 않은 채로 지긋이 시선을 주었다. 눈꺼풀은 가벼웠고, 머릿속은 쾌청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으르렁 거리던 장기들도 나른한 고양이처럼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집 안 깊은 곳까지 은은하게 묻어있는 먼지 냄새가 났다. 기분 나쁘지 않은 친근하고 익숙한 나의 일부였다.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어 앉았다. 발코니 너머에는 세상을 아름답게 보는 화가의 수채화 작품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향긋한 바람이 살짝 열린 창문을 지나 귓불을 간지럽혔다. 평온한 공기는 어제의 고통이 마치 망상의 한 조각처럼 느껴지게 했다.
어제 나는 -비유적으로- 죽은 상태였다. 이따금 눈이 떠졌지만, 망막에 맺힌 건 이미지들뿐인 상태··· 그것은 기호도 상징도 상실해 버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세계였다. 신체는 작동하지만, 주인 없는 공장··· 버튼 없이 작동되는 기계, 아무도 멈출 생각이 없는 컨베이어 벨트 끝단에는 공허만 떠돌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침착하게 이어가는 것뿐이었다. 어둠의 농담이 짙어졌다가 옅어졌다 반복했지만, 결코 밝아지는 일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뭉뚝한 쇠막대기로 짓누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고통은 조수에 의한 파도처럼 일렁였다. 공기의 촉감에 집중하고, 그 패턴에 의식을 맡긴 채 겨우 잠에 들었다. 정말 대단한 숙취가 아닐 수 없었다. 위장은 날카로운 갈퀴로 긁히는 고문이 계속되었고,-모든 질문에 사실을 말해도 끝나지 않는 고문이었다.- 정신이 떠난 육체는 허공에 붕 떠서 마비의 영역에 지배되었다. 나는 이 고통이 끝날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지만, 동시에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기분에 두렵기도 했다.
그런데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상쾌하게 눈이 떠졌던 것이다. 여운은 거짓말이 되었고, 진실은 따사로운 아침 햇살로 가득 차 있었다. 일요일 오전 특유의 여유로움과 함께 말이다. -그것은 일주일 중에 일요일만 갖고 있는 분위기다. 만약 누군가 각 요일의 아침을 보여주고 어느 것이 일요일인지 맞혀보라고 한다면, 단번에 맞출 자신이 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느긋한 공기를 헤치고 나아가 차가운 물을 한 잔 마셨다. 물은 식도를 지나 온몸의 감각을 깨웠다. 저절로 웃음이 나올 정도의 차가움이었다.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양치를 하고 샤워를 했다. 거울을 보니 하루치의 수염이 나 있었다. 나는 한 올도 남김없이 말끔하게 면도를 했다. 그래픽(Graphics) 같은 구름에게 수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머리를 드라이어기로 신중히 말렸다. 다시 방으로 가보니, 그곳은 태양의 축복으로 충만했다. 모든 것들이 아무렴 상관없다는 듯이 포근했다. 창문을 마주 보고 바닥에 앉았다. 구름은 천사들의 하얀 성(城) 같은 견고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늘은 파스텔로 칠한 것처럼 골고루 푸르렀다. 그런 하늘은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게 했지만, 아무렴 어때,라고 생각했다.
문득 언젠가 갔었던 미술관이 떠올랐다. 순백의 벽과 거인들을 위해 지은 것 같은 높은 천장, 그리고 벽 가장 위쪽에 걸려있는 투명한 큰 창. 그 안에 공기는 후텁지근하지도, 춥지도 않은, 이상적인 공기의 밀도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미술에 관심이 없다. 미술뿐만이 아니다. 영화도 보지 않는다. 연극도, 드라마도, 책도 그렇다. 예술이란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단 음악은 예외다. 예술을 눈으로 좇지는 않으나, 차분한 콘트라베이스의 박동은 여러 날의 꽤나 많은 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미술관이 떠올랐다니. 심지어 당장 그곳에 가고 싶어졌다. 물론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작품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단지 그 공간의 쾌적한 분위기에 둘러싸이고 싶었으리라.
나는 곧장 집을 나섰다. 통이 큰 블랙진과 오버사이즈 파란색 반소매 티셔츠를 몸에 두르고, 검은 척테일러 캔버스화를 신었다. 어쩌면 미술관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격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에겐 그런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내게는-혹은 사람이란- 태생부터 부족하거나, 형성될 수 없거나, 갖고 있지 않은 것이 있다.
밖은 후텁지근했다. 미술관을 가기 위해선 전철을 타야 한다. 그리고 역까지는 10분 정도가 걸린다. 만약 호흡이 목구멍 안팎을 헐떡거릴 정도로 걷는다면, 더 빠르게 도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급할 이유가 없었다. 뜨거운 태양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달아오른 지면을 한 발 한 발 밟으며, 역을 향해 가면 된다. 그래, 아무렴 어떠한가.
전철 안은 시원했다. 나는 적당한 빈자리에 앉았다. 아직 여름이 만개하지는 않았지만, 에어컨디셔너의 찬 바람이 겹겹이 쌓여갔다. 창문 너머로는 새로 지어진 회색 건물이 무심하게 줄지어 있었다. 감정 없는 색들은 늘어져, 결국 이어졌고, 이내 지하의 어둠에 닿으며 우리를 덮쳤다. 미술관을 마지막으로 갔던 적은 아마도 5년 전쯤이랬다. 당시 여자 친구의 -거부할 수 없는- 권유로 몇 번이나 갔던 적이 있던 터였다. 그녀는 미술과 영화에 열광했고, 패션에도 남들보다 더 짙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세상은 의미로 넘쳐나는 흥미로운 놀이동산 같았을 것이리라.
“당신은 왜 미술관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거예요?” 그녀가 물었다.
“참 신기한 사람이에요. 영화관에도 가지 않고, 연극은 본 적도 없고, 책은 불사하고 만화도 본 적이 없다니 말이에요.”
“그런데 가지 않는다고 해서 죽지 않는다고.” 나는 대꾸했다. 그녀는 혼잣말로, 술집에는 안 가면 죽는 것이냐며 중얼거렸다. 뾰로통한 표정조차 패셔너블(Fashionable)한 그녀였다. 삐죽 나온 빨간 입술···, 꿈틀거리는 흰 피부···, 그리고 안 그래도 커다란 눈에 진한 아이라인이 경계를 더 뚜렷하게 해주고 있어서, 심통 가득한 시선이 내게 더욱 강하게 내리 꽂혔다. 사실··· 미술관에 간다고 해서 죽는 것 또한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