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 박힌 어떤 바위

사라졌다···· 없어졌다···· 옅어지거나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아닌.

by 무긴이

안국역에 도착했다. 플랫폼에서 자연스럽게 역 출구까지 걸어 나왔다. 자주 왔던 것은 아니었으나, 발걸음은 보이지 않는 줄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줄기의 흐름은 기둥을 지나고, 벽을 기대어 돌아 계단을 올랐다. 하늘은 여전히 화창했고, 역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패션 스타일이 흐릿했던 것만 같았는데, 지금은 어느 계절보다 또렷해지고 색채가 풍부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은 채도를 짙게도 하고, 투명한 안개처럼 흐릿하게도 한다.

나는 엉퀸 인파 속에서 미술관으로 가는 길을 되새겨 보았다. 기억은 또렷하지 못했다. 파도에 휩쓸려간 해변가에 적혀있던 어떤 고백처럼. 발걸음의 줄기를 차분하게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예상치 못한 걱정이었다. 만약 그녀가 미술관에 있으면 어떡하지? 그녀는 일요일을 좋아했다. 그리고 미술관을 좋아했다. 오늘은 일요일이고, 내 걸음은 미술관을 향해 있다. 물론 미술관이 이곳 한 군데만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정체 모를 날 선 불길한 기운이 목덜미를 싸늘하게 맴돌고 있다.


그녀와 만남이 귀결된 지도 5년이라는 긴 -짧다고 한다면 짧은- 시간을 지나고 있다. 그녀는 지구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햇살 같은 사람이었다. 온기를 좋아했고, 아름다움을 신봉했고, 사랑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그런 그녀가 나와의 연애를 통해 깨달은 것은 현실의 세상이었을 것이다. 온기가 닿지 않는 공허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름다움이 묻지 않는 음침한 이끼가 있다는 사실을, 자아가 없는 껍데기에 사랑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그녀가 이별을 고하며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무어라 답을 해야 했을까. 그녀에게 어떤 위로를 건네야 했을까. 가슴 한가운데가 쓰라렸다. 거친 가시덤불에 맨몸을 던진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라는 형이상학적인 고통이 아닌 그저 안타까움에 의한 것이리라. 그녀는 나를 사랑했다. 사랑이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희미한 갈피를 잡아 본다면-, 그녀가 내게 행했던 모든 선택과 희생은 사랑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리라. 그런 측면에서 그녀의 마지막 말에 어떠한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얼음이 녹아 땅에 떨어졌다. 얼음은 산산조각 났고 땅에도 흠집이 생겼다. 당시 나는 이 상황들이 자연적인 순리라 느껴졌다. 그렇지 않은가?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녀는 말했고, 나는 침묵했다. 그렇게 우리는 3년 동안의 연애를 한 순간의 대화로 마침표를 찍었다.


그녀와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는···· 아마도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것이리라. 물론 기억은 해변의 큰 바위처럼 파도에 닿고 바람에 깎이며 퇴화할 것이다. 그래도 바위는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몰려와 움직이려 해도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를 더욱 견고히 할 것이다. 바위는 크고 색이 진하다. 어떤 색이라고 특정하라 수는 없지만, 화사한 것은 결코 아니다. 높게 솟지는 않았지만, 울퉁불퉁한 굴곡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바위는 내 시선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 눈앞에서 검은 바다와 하늘을 가리는 것은 아니나, 어느 순간, 갑작스레 인식 속에서 자신을 새긴다. 걸리적거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자연스럽다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온기가 넘치던 존재에서 무언의 바위가 되었다. 바위를 보고 있으면 그 순간이 일렁이며 겹쳐진다. 색채가 빠진 공허한 눈빛과 카페 의자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가던 그 뒷모습. 그녀는 그렇게 나를 떠났다. 사라졌다···· 없어졌다···· 옅어지거나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아닌.


나는 역 출구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이대로 멈춘 채 하염없이 세월을 지나 동상이 되어 버릴 것만 같았다.-어떠한 기념과 상징도 없는 나라는 동상- 나는 어쩌면 그녀를 마주치는 것이 두려운 것일 수 있다. 아니, 두렵다는 감정이 거의 확실하다. 나는 대체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 마지막 대화에서 보았던 그녀의 두 눈은 슬픔과 기쁨, 사랑과 원망, 그 어떤 감정도 모두 증발한 폐허 같은 모습이었다. 그 두 눈. 나는 잊혔던 유령 같은 것을 마주하는 것이 꺼림칙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흙으로 뒤덮인 공터가 파란 풀들로 가득 메꿀 만큼 시간은 지났다. 나도 그녀도 과거라는 잔여물은 이미 개인적인 강을 지나 수평선 너머 바다로 흘러가 버렸다. -서로 기억이라는 바닷가에서 높지 않은 어두운 바위 정도로 아른거릴 뿐일 것이다.- 혹은 그제 싸구려 모텔에서 섹스를 했던 그녀가 했던 말이 내 안의 무언가를 흩트려 놓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내게 두려움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이 결국 필연적인 것처럼.

무언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뭉툭한 숨은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 속으로 흩어졌다. 생각을 멈춰야 한다. 모서리에 매달린 호흡을 다시 내 쪽으로 끌어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누군가 오른쪽 허벅지 부근을 건드렸다. 흠칫 놀라 돌아봤다. 그러나 그곳엔 무표정한 여러 군상이 지나갈 뿐이었다. 허벅지 부근에 떨림이 느껴졌다. 진동이었다. 연약하지만 뾰족한 진동. 맞다. 핸드폰이 울리고 있는 것이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어 화면을 봤다. '김', 그 녀석이었다. 나의 대학 시절 친구이자, 그제 홀연히 자취를 감춘 그녀와 아는 사이인 그 녀석 말이다. 아무래도 오늘은 높은 천장과 적절한 공기로 형성된 쾌적한 미술관은 갈 수 없는 형편인 듯하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미술관을 가지 않아도 죽지 않는다는 한숨일지도 모른다. 혹은 기억 속에서 멈춰버린 그 공허한 눈빛을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일 수도 있다. 뭐가 되었든 간에 나는 오늘 미술관에 가지 않을 것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