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그녀에게 고백했었다.

일요일 낮에 우연히 형성된 낯선 공간에 우리였다.

by 무긴이

술집은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두운 지하에 있었다. 계단을 타고 층계를 돌아 내려가니 침침한 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 나왔다. 그곳은 푸른 하늘에 노랗고 빨간 햇빛을 피해 숨은 것처럼 보였다. 문은 길쭉한 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흐릿한 시트지를 붙여 놓아서 기묘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마치 빛에 몸이 녹아버리는 뱀파이어들이 모이는 곳처럼. 긴 유리문에는 '아모르 호프 AMour HOF & Bar'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글자는 오랜 세월을 온전히 지나온 듯했다. 칠은 갈라져 있었고 테두리는 면을 벗어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는 이곳에 왔다. 김을 만나러 말이다. 그는 문 너머에 있을 것이다. 태양을 피해 홀로.

뿌연 문을 밀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김은 나무로 만들어진 바(Bar)에 혼자 앉아 있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는 땅콩을 까먹으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그와 같은 맥주를 주문했다. 그는 나를 봤지만, 눈썹만 까딱거렸을 뿐, 입은 열지 않았다. 그는 땅콩 껍데기를 한 손으로 벗기고, 입에 털어 넣고, 맥주를 홀짝 마셨다. 주문한 맥주가 나와서, 그에게 잔을 들이밀었다. 그는 입술만 삐쭉거리는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는 잔을 들어 부딪혔다. 무더운 여름에 퍽 어울리는 맥주였다. 나는 보리향 가득한 탄산의 청량감을 느꼈다. 김은 코로 긴 한숨을 뱉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직 벌건 대낮이어서 그런지 두 테이블정도가 전부였다. 그들은 어쩌다 이곳에 들어와 술을 마시고 있는 걸까. 일요일 낮에. 분위기로 봐서는 산책하다 목을 축일 겸 들어온 듯했다. 그들은 조용히 술잔을 부딪히고,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그들의 대화는 진동 같은 웅성거림을 만들었다.- 가게에는 잔잔한 재즈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귀에 익숙한 곳이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빌 에반스의 썸데이 프린스 어쩌고 하는 곡인 듯했다. 나는 귀를 열고 노래를 들었다. 사실 내가 원한다고 귀를 닫을 순 없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일요일 낮에 우연히 형성된 낯선 공간에 우리였다.


“그녀와 연락이 안 돼.” 김이 말했다.

“며칠 전 모임에서 우리가 함께 술을 마신 이후로 말이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아무도 모르게 내쉬었다. 내게 그녀의 행방에 대해 그에게 물어봤었더라면, 내 입장이 난처해졌을 것이다. -결국 거짓을 뱉어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래봐야 3일이 지났을 뿐이잖아.” 내가 말했다.

“그녀도 주말에는 아무하고도 연락하고 싶지 않겠지. 누구에게나 그런 날들이 있잖아.”

“너의 말이 맞아. 하지만 상황이 달라. 이건 좀・・・” 그는 말을 멈추고 맥주를 들이켰다. 망설임은 그를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내 눈엔 그 모습이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맥주를 마시며 시선을 돌렸다. 그가 하던 말을 삼키든,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오든,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간에 나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기다려야만 했다.


“그날, 그녀에게 고백했었어.” 그가 말했다.

“술을 마시다가 따로 불러내서, 이제껏 느끼고 있었던 그녀에 대한 마음을 모두 털어놓았어. 계획했던 건 아니야. 술이 얼큰하게 올랐고, 선선한 공기가 그녀와 내 사이를 스쳤고, 휘날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보고 있다 보니, 주저리주저리.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고백 비슷한 걸 한 거야. 그리고 그녀는 가만히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고는, 옅은 미소를 짓더라고. 아주 잔잔한 강물 같은 미소를 말이야. 이상하게도 그 미소는 어떠한 답이 될 수는 없었지만, 괜히 위로가 되었어. 이상하지?”

“그녀가 다른 대꾸는 안 했어?”

“응. 미소를 지었고, 그만 들어가자고 했어. 내 마음에 대한 답을 원한다고 말하려다, 입을 닫았어.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내 마음이-주저리 떠들어버린 얘기가- 스며들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함께 술자리로 돌아갔을 뿐이야.”


나는 남은 맥주를 모두 마셨다. 김도 남은 맥주를 들이켰다. 우리는 맥주를 다시 주문했다. 그와 나 사이에는 침묵이 낙뢰처럼 번쩍이며 내리쳤다. 그는 땅콩을 연신 까먹었고, 나는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봤다. 머리 위에는 따로 마감돼 있지 않아 거친 시멘트가 드러나 있었다. 고드름 같은 형태로 시멘트가 나를 향해있다. 이런 게 떨어진다면, 나는 유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고드름은 아니었다. 떨어질 일 없는 시멘트 덩어리일 뿐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맥주가 차가운 땀을 흘리며 앞에 놓여 있었고, 우리는 재차 잔들 부딪히고 입안 가득히 맥주를 넣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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