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 남은 맥주를 말끔히 비운 이후에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작은 숨소리조차 기척을 숨긴 채 그를 바라봤다. 머리 위에서 내려오는 노란빛은 얼굴에 묻어 근심을 더욱 짙게 만들었다. 그의 호흡은 일정했고, 차가운 공기가 그의 폐에 닿아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늘에 가려져 두 눈을 정확히 쳐다볼 수 없었지만, 슬픔이 고독과 불안에 침식되어 진한 어둠이 일렁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혹시 나와 그녀가 자신이 고백한 날에 함께 있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내게 스스로 실토할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무표정한 얼굴은 그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나에 대한 분노가 서려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것도, 그저 한순간의 욕망으로 그녀와 섹스를 한 것을, 내게 그녀는 단지 스쳐가는 시간이었을 뿐이란 걸, 그는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해버린 나를・・・.
"아무래도・・・" 그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나는 흠칫 놀랐지만, 애써 태연한 척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한 것 같아." 그의 말에 비열한 한숨이 슬쩍 튀어나왔다.
"그녀는 놀랐을 거야. 갑작스러운 고백에 말이야. 그녀는 나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거든. 겉으로 친한 척 웃으면서 시답잖은 세상 이야기나 지껄이는 사이가 아니라, 정말 서로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타인・・・ 친구라 생각했는데, 내가 그 관계를 갑작스럽게 무너트린 거야. 너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그녀는 상처가 많은 사람이거든. 특히 어떤 관계에 의한 상처가・・・"
그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두 눈은 슬픔의 호수에 아주 깊게 잠겨있었다. 그 슬픔은 나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심히 고통스럽다는 것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아주 천천히 깊고 무거운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진한 알코올이 숨에 엉켜 노란빛에 섞였다. 그늘진 가게의 구석에서 성질 고약한 난쟁이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서너 명 정도 돼 보였는데, 그들은 오래된 나무 장식장 뒤에서 우리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우리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순간을 재는 거 같았다. 그들은 나태하고 오만한 존재이지만, 뇌를 짓누를 기회가 살짝이라도 보인다면, 그 누구보다 프로페셔널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멍해지는 신경의 냄새를 맡은 것이다. 비겁한 알코올의 진한 향을.
"그녀를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만 같아. 나는 그 부분이 너무 힘들어. 너무 아파. 마음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녀의 따뜻한 숨결을・・・ 두 손을 한번 잡아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떠나보내하는 건 너무 괴로워. 그런데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는 것이 나를 더욱 조여와."
"단정 짓지 마. 그녀는 잠깐 휴식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어."
"맞아. 네 말처럼 내일 아침이면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알 것만 같아. 정확한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떠나버린 것을 느낄 수가 있어."
"일단 좀 생각을 멈춰야 할 거 같아. 그리고 너도 좀 쉬어야 돼. 지금 너는 불안에 떨고 있어. 그 불안은 네게 이상한 느낌을 들게 하지. 마치 영원한 이별 같은 허상을・・・"
나는 말을 멈췄다. 그가 고개를 떨구고 울기 시작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한 남자의 조용한 통곡을 보고 있다. 길쭉하고 가는 어깨는 깊은 어둠 속에서 출렁이는 검은 파도처럼 불규칙적으로 들썩거렸다. 그의 슬픔을 두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쩌면 그녀는 나 때문에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내게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어 했으리라. 그리고 거기서 그녀는 예상치 못하게 자신이 떠나야 하는 확신과 맞이한 것일 수 있다. 공허한 세상・・・ 허무한 마음・・・ 사랑이라는 허상・・・ 삶과 수많은 관계・・・.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하 세계에서 올라왔다. 지면의 세상은 이미 검은 하늘로 덮여있었다. 나는 택시를 불러 그를 태웠다. 그에게 오늘은 집 가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술은 더 마시지 말고 잠을 청하라고 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말라고 일러줬다. -차라리 휴대전화로 의미 없는 동영상을 보고 있으라고도 말했다.- 그는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아주 미세한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미소가 아닐 수도 있지만. 생기를 잃은 그의 두 눈은 안개 가득한 망망대해의 표면처럼 잔잔하고 막막했다. 창문 너머로 그에게 건넨 말을 마지막으로 택시는 떠났다. 빨간 후면등이 어둠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그를 속이고 말았다. 나의 무덤덤한 태도는 그에게는 악의적인 현재가 되었다. -어쩌면 나와 그녀의 실종은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만약 그와 그녀가 다시 만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녀가 그의 고백을 받아들인다면, 나와 있었던 그날의 일을 비밀로 간직할까. 아니면 그에게 모두 얘기할까.그녀는 다시 돌아올까?
나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은 구름 한 점 없는 깨끗한 검은색이었다. 김의 두 눈이 떠올랐다. 망망대해・・・안개・・・해수면・・・ 언젠가 푸른 새벽녘에 검은 해수면 위로 비가 내리는 걸 본 적이 있다. 비는 검은 표면을 수없이 내리쳤다. 반복의 반복. 시작은 끝이 되고, 끝은 시작이 되어, 반복은 과정이 되었다. 모르겠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생각은 그때 가서 하면 된다. 일이 벌어지면 벌어지는 것이고, 벌어지지 않는다면 또 다른 일이 벌어질 테니 말이다. 그에게 건넸던 한마디가 서늘한 밤공기와 함께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