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 있는 작품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번역할 때
전시 영상 의뢰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카메라를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작가의 작업 노트를 펴고, 이전 인터뷰를 찾아 읽으며, 작가가 걸어온 시간을 역추적합니다.
누군가는 전시 영상을 단순히 "공간을 예쁘게 스케치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짐벌을 들고 전시장 한 바퀴를 매끄럽게 돌면 끝나는 일이라고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전시 영상의 본질은 물리적인 공간의 기록이 아니라, ‘작가가 숨겨둔 의도’와 ‘디스플레이의 맥락’을 영상 언어로 치환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왜 이 그림을 여기에 걸었는지, 관객이 이 작품 앞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길 바랐는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 영상은 껍데기만 훑는 CCTV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에게 전시 영상 제작은 ‘잘 찍는 것’보다 ‘잘 듣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저는 촬영 전, 작가와의 사전 소통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작가의 성격이 작업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이번 전시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인지 파악해야 비로소 렌즈가 향해야 할 곳이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 전혀 다른 물성을 가진 두 작가의 전시를 기록했습니다. 하나는 정적인 회화이고, 하나는 관객의 움직임을 요하는 설치 미술입니다. 저는 이 두 작업을 관통하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내기 위해 각기 다른 문법을 적용했습니다.
Case 1. 기억의 풍경을 ‘응시’하다 윤정선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시각예술가입니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10여 년간 구축해 온 ‘기억의 풍경’을 조망하고, 처음으로 인물 시리즈를 공개하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작품들이 뿜어내는 정서는 ‘정적’이면서도 찰나를 붙잡아둔 듯한 ‘고요함’이었습니다. 저는 영상 역시 그 결을 닮기를 바랐습니다. 현란한 무빙이나 기교는 오히려 소음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고요한 일상의 한순간’처럼 보이도록 기획했습니다. 특히 ‘서드뮤지엄’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간만의 유니크한 분위기와 차분한 무드가 작품과 어떻게 어우러지는지를 담백한 컷 연결로 담아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전시장의 공기를 느낄 수 있게 했습니다.
Case 2. 관객의 움직임으로 완성되는 예술 반면, DDP 갤러리문 ‘칼레이도(Kaleido)’ 단체전에서 만난 홍수현 작가의 설치 작품은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달라야 했습니다.
이 작품은 겹겹이 쌓인 선과 구조물 사이(in between)를 관객이 직접 지나갈 때 비로소 완성됩니다. 가만히 서서 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시선에 따라 시각적 요소가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저는 카메라를 고정하지 않고, ‘실제 관람객의 시선’이 되어 구조물 사이를 유영하듯 촬영했습니다. 다양한 앵글의 트래킹 샷을 통해, 현장에 오지 못한 사람들도 간접적으로나마 ‘공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작가의 의도를 이해했다면,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낼 ‘기술적 판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저는 두 전시에서 각각 ‘공간(프레임)’과 ‘시간(셔터스피드)’을 다루는 방식을 달리하여 메시지를 시각화했습니다.
틈새로 응시하는 시선 (Framing) 윤정선 작가의 영상에서는 화려한 기술 대신, 카메라가 서 있는 '위치’에 집중했습니다. 저는 작품을 온전히 정면에서 담기보다 벽과 벽 사이, 혹은 나무와 나무 틈새에서 작품을 바라보듯 촬영했습니다.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어떤 대상을 볼 때 그것 하나만 뚝 떨어져 존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항상 주변의 사물들과 섞여 있고, 그 사이로 무언가를 바라봅니다. 저는 ‘무언가의 사이’에서 대상을 볼 때 시선이 더욱 깊게 집중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상 프레임 안에 또 하나의 프레임(틈)을 만듦으로써, 일상의 시선을 재현함과 동시에, 액자 사이로 그려진 일상의 그림을 보듯, 전시를 담은 장면들도 그 '사이'로 지그시 ‘응시’하기를 바랬습니다.
움직임과 멈춤의 대비 (Shutter Speed) 반면 홍수현 작가의 영상에서는 장노출(Slow Shutter)이라는 기술적 변주를 주었습니다. 셔터스피드를 의도적으로 느리게 설정하여, 프레임 안에서 구조물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서 있고 그 사이를 지나는 관객들은 흐릿한 잔상(Motion Blur)으로 남게 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구조물은 움직이지 않지만, 변하는 것은 당신의 시선”이라는 메시지를 시각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움직이는 사람들을 흐릿하게 뭉개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구조물의 조형미를 극대화하고 싶었습니다.
이처럼 저에게 영상 기술이란 단순 멋을 부리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작가의 언어를 영상 언어로 ‘번역’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입니다.
누군가의 포트폴리오를 영상으로 기록한다는 것은 꽤 부담감이 따르는 일입니다. 작가가 수개월, 수년을 고민하여 쌓아 올린 세계를 단 몇 분의 영상으로 압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불가능하지만요. 그래도 최대한 근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이해해 주세요.)
그렇기에 저는 앞으로도 계속 ‘듣는 작업’을 먼저 할 것입니다. 화려한 편집 기술을 뽐내기 이전에, 작가가 남겨둔 행간을 읽고 그 의도가 가장 정확한 온도로 전달될 때까지 고민할 것입니다. 작가의 마음을 읽는 영상이, 시간이 지나도 보는 이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 Exhibition Archive
> Archive 01. 윤정선 개인전 (Painting & Space) https://youtu.be/ruA4dChPWk4?si=dWqnDTie0CryBP8i
> Archive 02. 홍수현 'in between' (Installation Art) https://youtu.be/EmO30EDKzSQ?si=hTbSpSSCDWW-EL1H
작품의 깊이를 이해하고 기록합니다. https://rhoakt.myportfolio.com/wo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