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첫 아동복 브랜드 패션필름
벌써 지금으로부터 몇 년은 된 거 같습니다. 패션 사진작가인 아끼는 후배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아동복 브랜드의 촬영이 잡혔는데, 클라이언트가 패션 필름도 함께 제작하고 싶어 한다며 저를 찾은 것입니다. 그런 연락은 굉장히 반갑습니다. 소중한 제안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수락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아동복 브랜드였습니다. 단순히 '아이 옷'이라기보다는, 성인들이 입는 힙한 스트릿 패션을 사이즈만 작게 줄여 놓은(Miniature) 듯 감각적이었습니다. 모델 역시 레거시 미디어 출연 경험이 있는, 작지만 단단한 내공을 가진 친구였습니다.
우리는 두 번 작업을 함께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 작업은 저에게 디렉팅(Directing)의 무게와 선택(Choice)의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 시간이었습니다.
촬영장에 도착하기 전부터 디렉터의 선택은 시작됩니다. 저는 사전 답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산과 일정의 한계로 촬영 당일 1시간 일찍 도착하는 것이 전부일 때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 1시간은 영상의 퀄리티와 굉장히 큰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습관처럼 손가락으로 네모난 프레임을 만들어 공간 구석구석을 대봅니다. 사전에 전달받은 공간 사진을 보는 것과 내 눈으로 보는 공간감은 천지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벽과 배경 중, 인물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너무 밋밋하지 않은 ‘사선 구도의 벽’을 찾아냈습니다. 화려한 세트장은 아니었지만, 그곳을 배경으로 ‘선택’했습니다.
촬영이 시작되고, 저는 또 다른 선택의 기로에 섰습니다.
"어떤 컷이 오케이(O.K) 컷인가?"
경험이 적을 땐 이 기준이 모호해 헤매곤 했습니다. 참 난감한 일입니다. 하지만 나름 경험이 쌓은 이번은 달랐습니다. 베테랑 아동 모델은 제가 굳이 행동을 하나하나 교정하지 않아도 멋진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아이의 행동을 적극적으로 고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이가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두고, 제 머릿속 그림과 일치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 컷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디렉팅이란, 모델을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 중 최상의 순간을 골라내고 책임지는 일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동일한 모델, 동일한 브랜드였지만 두 번의 작업은 기획 의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Project 1. 심플함의 미학 (Mood & Vibe) 첫 번째 영상의 레퍼런스는 '뉴진스 티저' 같은 몽환적인 필름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 무드를 살리기 위해 롱테이크(Long-take)와 차분한 앵글을 선택했습니다. 화려한 기교보다는, 심플하지만 확실한 하나의 톤 앤 매너(엔진)가 타임라인 전체를 묵직하게 끌고 가는 힘을 믿었습니다.
Project 2. 강약의 리듬 (Dynamic Performance) 두 번째 만남에서 모델 친구는 저를 기억하고 반갑게 웃어주었습니다. 대기 시간에 문지방을 양손과 양발로 짚고 스파이더맨처럼 기어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역시 초등학생은 초등학생이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저도 어릴 때 많이 하던 장난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큐 사인이 떨어지자 아이는 다시 프로가 되었습니다. 이번 컨셉은 컷 수도 많고 그래픽 효과가 가미된 역동적인 영상이었습니다. 끼가 넘치는 친구라 춤을 너무 잘 췄는데, 때로는 자신감 넘치는 동작이 화면 안에서 꽉 차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배려 있는 소통'이었습니다. (당연하 것이겠지만) 아이가 상처받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제가 원하는 앵글 안에서 놀 수 있도록 유도했습니다. 퍼포먼스가 강한 시퀀스 뒤에는 차분한 컷을 붙여 호흡의 강약을 조절했고, 그래픽이 들어갈 여백을 미리 계산하며 컷을 설계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영상은 클라이언트와 소비자 모두에게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편집실에 앉아 영상을 복기하는 제 마음 한편엔 씁쓸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첫 번째 영상 작업 당시, 저는 후반 작업에서 필름 룩(Look)을 구현하며 다소 ‘안전한 선택’을 했습니다. 클라이언트는 내심 더 과감하고 거친 필름 효과를 원했지만, 저는 혹시라도 과할까 봐 스스로 수위를 조절했습니다. 그것이 실패하지 않는 길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다시 보니 "조금 더 과감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가 듭니다. 나만의 색깔을, 나의 해석을 조금 더 밀어붙여 제안해 볼 걸. '안전함'은 실수를 줄여주지만, 때로는 작품이 가질 수 있는 매력의 고점까지 깎아내리기도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조금 더 과장을 하자면 제가 사라지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선다면, 그때는 안전함 뒤에 숨지 않고 조금 더 용기 내어보려 합니다. 그 과감한 선택들이 쌓여 결국 '나'라는 디렉터의 색깔이 될 테니까요.
>>Kids Fashion Film Archive
> Project 01. Simple & Vibe (Long-take) https://youtu.be/tYI_VqLvfU4
> Project 02. Dynamic Rhythm https://youtu.be/Cy4AbfU0f7o
수많은 선택으로 채워가는 포트폴리오. [ https://rhoakt.myportfolio.com/creati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