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 의한 망상적 태도

by 무긴이

(1)


그녀에게 연락이 없다. 이런 상황이 이어진다면 우리 관계는 허무하게 귀결될 수밖에 없다. 혹은 희박한 가능성을 가진 어떤 변수에 의해 귀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우연히 벽에 머리를 가볍게 부딪히는 바람에 나에 대한 미움이 호감으로 기울어지는 경우 말이다.


망상은 망상을 낳는다.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복제된 상념들은 결국 울창한 밀림 아래의 뿌리처럼 걷잡을 수 없이 엉켜버린다. 나는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언제까지 기다릴 수 있을까. 그녀에게 연락이 영영 안 올 수도 있다. 혹은 오늘 새벽에 올 수도 있다. 혹은 내일, 일주일 뒤, 한 달 뒤, 아니면 언젠가.

방 한 면을 가득 채운 창문 밖은 어두웠다. 맞은편 아파트에서 불빛들이 분명하게 빛을 내고 있지만, 생활에서 태어난 평범한 빛으로는 심연을 거두기에는 미미했다. 깜빡했던 양치를 다시금 이어서 했다. 그녀도 나와 같은 어둠을 보고 있을까. 나는 영적인 능력이 있거나,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능력 같은 것이-정말 안타깝게도-없다. 그러나 무언가 느껴졌다. 미세하지만 분명한 것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아마도 그녀는 나보다 더 짙은 어둠을 보고 있을 것이다. 얼마동안 양치를 했을까. 화장실로 돌아가 세면대에 입안 가득히 채운 깊은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입안은 거품과 피로 가득했다. 회오리치는 빨간 피와 하얀 거품 사이로 그녀와 마지막 통화가 떠올랐다.


“그만할래” 그녀가 말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무언가 신경쓰는 건 더욱이나 끔찍하다고. 나는 이미 전해야 할 말을 다했어. 이 이상 대화가 필요하다는 건 오해 같은 걸 풀 때나 하는 거야. 내 생각엔 오해라고 할 것이 없어. 그러니까 대화는 더 이상 무의미해. 정말로 무의미하다고.”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영혼을 어디에 두고 온 듯했다. 차키를 놓고 나왔다든가, 지갑을 놓고 왔다든가, 핸드폰을 놓고 온 것처럼 말이다.


“그래" 나는 아무도 듣지 못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이런 대화를 하고 싶었어. 너의 마음을 알 수가 없거든. 너의 함축적인 말들이나, 단편적인 표정으로 추측하고, 상상하는 건 별로야.” 그런 건 너무 괴로워,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말은 현실의 문을 넘어서지 못했다.

“알았어.” 그녀의 말은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는 이미 끊어져 있었다. 누군가 날 선 도끼로 케이블 선을 끊은 듯했다. 저기에 있던 공기는 이제 여기에는 없다. 공백은 마음을 산산이 조각냈다.


전화벨이 울린다. 화장실에서 달려 나와 핸드폰을 들었다.


07081708191


이런 늦은 시간에도 광고 전화라니. 고도로 발전된 자본주의사회는 사람을 공허하게 만든다. 한숨을 몇백 번 내뱉어도 그 공허함은 당최 없어지지 않는다.

노란빛의 스탠드 조명을 껐다. 빛 입자들은 순식간에 작은방을 떠났다. 영원할 거 같은 어둠도 어느 순간 익숙해졌다. 미리 펼쳐 놓은 이불에 몸을 던졌다. 이불은 부드럽고 베개는 적당히 푹신했다. 사실은 푹신함을 잃은 지 오래되었다. 그래도 푹신했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인지 마치 그런 것처럼 느껴지긴 했다. 눈을 감았다. 불빛에 가려졌던 냉장고가 느긋하게 소리를 내고 있다. 지긋지긋한 고도자본주의사회.


(2)


“어떤 말이든 입 밖으로 나와 존재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이 지나면 말은 허공 속으로 흩어져 사라지게 돼.”


그-친구-가 내 얘기를 한참 듣다가 참다못해 터져나듯이 말했다. 그의 말에 적극 동의하는 바다. 그 말이 백번만번 맞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멈칫거리는 사이에 그녀는-혹은 그녀의 마음은- 벌써 몇 광년은 떨어진 별로 떠나버렸다. 그녀에게 나의 말은 닿지 않게 됐다. 오히려 나라는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는 지우고 싶은 과거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시공간을 초월하는 기회가 오기도 한다. 대부분은 기회를 인지하지 못하고 놓치기 마련이지만 말이다. 아쉽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진짜 피를 흘리는 현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은 세상의 테두리들을 흐릿하게 지우고 있다. 무뎌진 회색 아파트의 낡은 창문 사이로 보이는 우중충한 풍경은 방 안을 더욱 숨 막히게 만들고 있다. 방 안은 작은 스탠드 조명에 의지한 채 사물의 경계를 무너트리고 있다. 옅은 그림자와 밝지 않은 빛. 잡동사니와 책들로 뒤덮인 책상 위에는 조그만 권총 한 자루가 놓여 있다. 한국에서 ‘헤클러&코흐HK4’를 구하는 건 굉장히 어러운 일이다.-불가능에 가까운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지구 반대편 국가의 가상 IP를 만든다.


어둠의 웹 접속을 위해 여러 준비를 한다. (노트북의 보안을 무너트리고, 호환성을 확장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등)


가짜 신분을 만들어주는 불법 사이트를 찾는다.


‘그’ 웹에서 건샵(Gun Shop)을 찾는다.


몇 달 동안 수많은 익명들을 마주치고 의심하고 싸우고 협박도 당한다.



나는 결국 그-그녀일지도 모른다-와 접촉하게 됐다. 그가 어떻게 총을 밀수해 오는지는 모른다. 궁금하긴 했으나 지금도 충분히 위험한 처지이기에 묻지 못했다. 그와 거래를 성사시키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못했다.-이 과정을 면밀히 얘기한다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시스템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서로 신뢰를 형성한다는 건-일반인들에겐 신뢰라 말할 수 없는 정도라도- 우연하게 만든 비눗방울을 1년 이상 유지하는 것하고 비슷하다.


“이제 뭘 해야 될까?” 심연이 물었다.

“모르겠어. 나는 이제 빈털터리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맞아”


심연은 말을 더 잇지 않았다. 그 침묵은 바로 행동으로 옮기라고 말하고 있었다. 순간적인 고요함은 마리아나 해구의 밑바닥처럼 엄청난 압력을 만들어냈다. 결국 손에 총을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운 총의 무게감만큼이나 쓸쓸함이 몰려왔다. 당황스러웠다. 두려움도 아닌 쓸쓸함이라니. 상관없지만 말이다.


“그건 쓸쓸함이 아니야” 심연이 침묵을 깨고 말했다.

“후회이자 미련이고 외로움이야. 너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었지. 그러나 그저 빈 껍대기일 뿐이었어. 다른 것들로 채워진 무언가. 심지어 어디서 주워 온지도 모르는 쓰레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지. 미안하지만 이게 사실이야. 내가 그 증거야. 나는 너가 만들었어. 그저 망상이나 환상, 환청이 아니야. 나는 실재한다고. 너와 수많은 대화를 했고, 너의 더럽고 비열한 진심을 다 보았어. 나는 너지만 너는 내가 아니야. 빛을 잃은 자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연결될 수 없어. 너도 너무 잘 알고 있는 규칙인걸. 빛을 잃었다는 건 그림자도 잃었다는 의미야. 네게는 아슬아슬하게 이어진 세계와 끈을 끊는 거뿐이야. 이것만이라도 제대로 해내면 돼.”


심연의 말에 대꾸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무엇하나 대응할 수 없었다. 한숨을 느긋하게 뱉었다. 급할 필요는 없으니까. 손바닥에 밀착된 총 손잡이의 재질이 느껴졌다. 피부에 쇠의 거친 질감이 온전히 전달됐다. 왜 총이었을까? 칼도 있고, 로프도 있고, 옥상도 있었는데 말이다. 존레논 때문이었을까? 커트코베인 때문이었을까? 킬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내 착각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방아쇠는 당겨져야 한다. 총구는 이미 관자놀이에 올라가 있다. 이럴 때 심연은 능숙하고 성실했다. 심연은 잘 선택했다며 나를 타일렀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


천둥 같은 방아쇠 소리가 작은 방안에 울려퍼졌다.

그러고 보니 총알을 안샀다.



(3)


지구의 자전축에 의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돌처럼 얼어붙었던 모든 것들이 녹아내린다. 그러나 현실의 겨울과 메타포 속의 계절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건 분명 ‘생기生氣’일 것이다. 봄은 얼어붙은 것을 녹이며 생명들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의 봄은 상실에 가까운 것으로 모든 것을 녹인다. 뇌와 몸, 정신, 마음, 영혼, 상념, 그림자, 빛, 시선, 숨, 나라는 것을 형성하는 모든 것들을 말이다.


오랜만에 집 밖을 나섰다. 집 밖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하늘은 머리 위를 뒤덮고 있고, 지면은 나를 아직은 지탱해 주고 있다. 무심한 바람과 함께 사람들이 지나고 있다. 나는 그사이를 정처 없이 걸었다. 무엇을 해야 할까? 모르겠다. 걸으며 무한한 사념의 공간에 나를 놓았다. 현실의 삶 속에서는 수많은 생채기가 발생한다. 그것은 절대 일방적일 수가 없다. 눈을 밟으면 발에 눈이 묻고, 책상이 벽에 부딪히면 모서리에 흠집이 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얼마나 걸었을까. 집에서 꽤나 멀리 벗어났다. 땀은 창문에 맺힌 김처럼 몸을 가늘게 덮었다. 걸음을 멈추고 정면에 시선을 던졌다. 어슴푸레한 석교 위로 전철이 지나갔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떤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하며, 어떤 인생을 추구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나가 버렸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사람들 한 무더기가 있었다가 없어졌다.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 앞에 내가 그렇게 스치기도 한 것이다. 내 존재를 모르겠지만.


걸음으로 달궈진 몸의 열기를 식히고자 근처 벤치에 앉았다. 신도시라서 그런지 벤치는 말끔했다. 굳이 털지 않아도 될 만큼. 앞에는 농구 코트가 인적없는 호수처럼 잔잔하게 있었다. 사실 농구 골대가 없다면 그저 회색의 시멘트 바닥이겠지. 배드민턴 네트가 있었다면 배드민턴 코트가 됐겠지. 만약 시멘트 바닥 위에 아무것도 놓여져 있지 않다면 저기는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닌 곳이 될 것이다.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서 저기로 가는 길 정도. 아무도 머무르지 않는, 시작도 끝도 없는 경계가 희미한 그런 길. 누군가 잠깐 멈출 순 있겠지만, 특정한 목적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빠른 걸음에 숨을 고르기 위해 잠깐 멈춘 것일 수도 있고, 마침 푸른 하늘을 나는 멋진 새를 보기 위함일 수도 있다.


“결국 아무것도 못 했네” 잠잠했던 심연이 말을 걸어왔다.

“그럴 줄 알았어.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하면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게 되니까. 필연적으로.”

“나 좀 내버려둬”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총알을 깜빡하다니. 정말 어이가 없어서”


나는 침묵으로 심연을 무시했다. 더 이상 그의 말에 휘둘리지 않으리라. 벤치에서 일어나 농구 코트로 걸어갔다. 농구 골대를 힘을 주어 밀어봤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신음 섞인 무거운 한숨이 튀어나와 땅에 그대로 떨어졌다. 툭. 그래도 변한 건 없었다. 나는 아직 농구 코트 위에 발을 붙이고 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고개를 숙여 발아래를 봤다.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펼쳤다. 손목을 돌려 손등을 봤다. 손은 깨끗했다.

그러나 나는 결국 그녀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었다. 분명한 사실이다. 그 상처는 현실적인 차원에서 치명적일 것이리라. 그녀와 나는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상태로 돌아가려 애쓰고 있다. 나보다는 그녀가 더욱 그러할 것이다. 서로 상흔을 가득 안고 전장을 떠난 병사처럼 각자의 고향으로 걸음을 돌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농구 골대조차 움직일 수 없는 하찮은 인간이다. 땅에 떨어진 한숨을 바라보았다. 한숨은 시멘트 바닥 깊숙이 박혀있다. 다시는 뽑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깊숙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