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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수 Aug 24. 2024

만 팔천 개의 인도네시아

투룸매거진 동남아리포트 아카이브

* 본 내용은 투룸매거진 35호(2023년 1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투룸매거진 앱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예쁘게 디자인 된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여행기를 쓰면서 지나간 날들을 다시 살고, 관련 조사를 하며 가기 전에는 물론 머물 때도 몰랐던 것들을 뒤늦게나마 주섬주섬 배웁니다. 예컨대 인도네시아는 인구가 4번째로 많은 세계 최대의 무슬림 국가입니다. 18,3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걸 다 합친 면적이 한국의 19배나 되지만 그럼에도 섬이 가장 많은 나라는 아니라는 것들이요. 그중 여섯 섬에서 두 달을 떠돌고 나니 온갖 좋은 점과 아쉬운 점이 뒤섞인 복잡미묘한 감정이 생겨버렸습니다.


발리의 한 도로


테테바투의 대나무집


시간여행이란 이런 것일까? 이박삼일을 이고 지고 올라야 정상에 다녀올 수 있다는 린자니산 언저리의 대나무집에 머물며 한 번도 경험한 적 없는 추억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장면을 자주 마주쳤다. 롬복, 특히 그 대나무집 주변은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더운 날 발을 담글 수 있는 시원한 물이 흐르는 작은 폭포와 맑은 물줄기가 흐르는 피서지. 군데군데 바나나와 야자수가 자라는 싱그러운 초록빛 계단식 논밭과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함께 모여 손수 모내기하는 어른들과 오두막 근처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논 한쪽 귀퉁이에 놓인 양철 주전자와 접시에 남은 쌀알을 주워 먹는 도마뱀. 시간의 흔적이 묻은 구멍가게들과 해맑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동네 사람들.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닭들과 코뚜레 묶인 소들과 조심스러운 고양이들.


발리에서는 인간이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고, 롬복에서는 원숭이가 인간에게 먹이를 준다. 수줍음이 많아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 검정 원숭이 무리를 만나기 위해 로비는 다른 가이드 친구에게 전화해 실시간 위치를 알아냈다. 너무 멀리 있어 형태만 아련히 보이는 검은색 긴 꼬리가 아래로 축 쳐진 원숭이 가족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원숭이가 먹으려고 딴 베리가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열매 맛을 궁금해하자 로비가 그걸 주워주었다. 블루베리만 한 크기의 단단한 야생 열매를 조금 깨물었다. 떫고 거칠고 새콤한 과육을 씹다 보니 작은 알갱이들이 톡톡 터지면서 향긋함이 조금 느껴졌는데 또 먹고 싶은 맛은 아니었다. 우리가 열매 맛보는 걸 보고 나누어준 건지, 그저 실수로 떨어뜨린 건지는 아무래도 모르겠지만 원숭이 쪽에서 우리 쪽으로 또다시 베리가 떨어졌다. 


누렇게 익은 벼를 양손 가득 움켜쥐고 냅다 땅에 내리치며 쌀알을 털어내는 광경을 볼 수 있는 천혜의 섬을 즐기기 위해 감내할 것도 있다. 심심찮게 보이는 플라스틱 쓰레기는 제쳐두고도 쓰레기 태우는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지독하다. 로비는 인도네시아 남자 90%가 흡연자라고 했다(통계는 70%). 롬복은 독실한 무슬림들이 사는 ‘천개의 모스크’ 섬으로 유명한데, 모스크는 동틀 무렵부터 하루에 다섯 번 확성기로 기도 소리를 내보낸다. 보통은 10~20분이면 끝난다는 기도가 그 동네에서는 체감상 두 시간 정도 이어졌다. 여행하며 둘러보니 공사 중이거나 이미 지어진 모스크가 다섯 집마다 하나는 있는 것 같았는데 찾아보니 실제로 무려 팔천 개가 넘는 모스크가 있단다. 덕분에(?) 무거운 눈꺼풀을 부여잡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기도, 마지막 날 그곳을 떠나기도 수월했다.


테테바투의 대나무집
롬복의 환상적인 폭포



아주 작은 섬에서의 나날


해안가를 따라 두세 시간여를 걸으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섬. 자동차는 없고 바다거북이 유유히 노니는 새파란 바다와 해변 가까이 산호초가 살아있는 섬에 차마 안 가고 배길 수 없었다. 발리를 찾는 관광객들이 많이 가지만 롬복에서 훨씬 가까운 세 섬, 트라왕안, 메노, 아이르. 윤식당 촬영지로 알려진 트라왕안은 셋 중 가장 큰 대도시, 메노는 덜 발달된 순박한 시골, 아이르는 그 중간 어딘가, 모든 게 적절히 섞인 소도시 같다. 도보로 어디든 갈 수 있는 섬의 주요 이동수단은 마차와 자전거인데 요즘엔 전기자전거와 개조한 전기 스쿠터도 다닌다. 마차를 타지 않기 위해 선착장에서 가까운 숙소를 선택했다. 동물권에 예민한 관광객들이 많은 모양인지 부두 근처 한쪽엔 말들의 복지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는 안내판 같은 것이 보여주기식으로 붙어있다.


바다 건너 롬복이 먹구름으로 가득 덮인 날에도 길리는 언제나 화창하고 따사로웠다. 모래사장은 하얗게 변한 산호조각과 조개껍질로, 바닷물 속은 살아있는 산호초와 크고 작고 화려한 열대지역의 물살이들로 가득하다. 죽은 산호조각과 해초로 가득한 물속 바닥은 발 딛고 물놀이하기엔 영 별로지만 물이 빠지면 꾸물대는 생명들로 구경거리가 풍성해진다. 천천히 걸으며, 가만히 서서 지켜보면 불가사리, 성게, 납작한 바다 민달팽이, 소라게, 작은 물살이들이 저마다 꾸물꾸물 바삐 움직인다. 유명한 바다거북 서식지답게 거북이 물속과 부두 근처에 출몰하고, 여기저기 거북이 나타난다는 표지판과 함께 스노클링 장비 대여점이 늘어서 있다. 메노에는 거북 ‘생추어리’가 있다는데 알고 보니 아기거북을 납치해 관광객들에게 돈을 받고 ‘방생하게 해주는’ 곳이어서 씁쓸했다.


푹 자고 조식 시간이 끝나갈 즈음 일어나 수영복 차림으로 스노클링 장비를 챙겨 해변으로 터벅터벅 걸어가 코코넛워터와 과육을 퍼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해변을 산책하며 예쁜 산호조각과 조개껍질을 주워 감상하고 특히 마음에 드는 것들은 사진으로 수집한다. 아직 초보인 스노클링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까지만 가는데 굳이 배를 타고 나가지 않아도 아름다운 산호초와 물살이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하루는 해초 뜯는 거북의 찬란함을 삼십 분 넘게 관찰하고 다음 날 앓아눕고 말았다. 썰물 땐 한참 산책하며 부드럽게 움직이는 생명체들을 두 눈과 카메라에 담는다. 해질녘에는 섬의 서쪽으로 걸어가 자리를 잡고 저녁을 먹으며 석양을 즐긴다. 누구는 길리섬이 작아서 3일이면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세 섬을 요리조리 돌며 2주를 보내고도 떠나기 아쉬웠다. 


길리 메노의 석양
해변에 굴러다니는 산호뼈조각들
길리 아이르에서 만난 최고의 조식


발리의 n가지 얼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람들이 왜 그렇게 여기를 못 와서 안달인지 알 것도 같았다. 꽃나무가 곳곳에서 자라는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의 유일한 힌두섬. 색색깔 다양한 패턴의 전통 복장을 차려입은 사람들과 전통악기의 영롱한 소리, 집집마다 놓인 손바닥만 한 꽃바구니와 섬 전체에 진동하는 향 피우는 냄새. 찬디다사에 머물며 운 좋게 5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어떤 마을의 크레메이션 세레모니(화장의식)를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건기임에도 비가 내려 다들 조금은 서운한 눈치였지만 뽀송뽀송한 어린이들, 세상의 풍파를 겪어낸 어르신들 상관없이 모두 사롱을 곱게 챙겨 입고 오랫동안 준비한 행사를 즐겼다. 야자수잎에 숯으로 힌두 신 세밀화를 그리고, 직조로 스카프 따위를 만드는 수공예 장인들이 살고 있는 전통가옥 마을은 관광객이 줄어 힘겨워 보였다.


좀처럼 빨래가 마르지 않는 촉촉한 열대우림 기후의 우붓은 밝은 황토색과 거멓게 색이 바라는 회색 돌로 지어진 사원 같은 집들 안팎으로 고사리와 박쥐란 같은 열대식물이 번성해 신비로운 분위기를 뿜어낸다. 바깥 양옆에 할머니 할아버지 모양 혹은 안쪽 바로 한 가운데에 코끼리 모양 가네샤 동상이 지키는 유난히 좁은 대문으로 들어가면 여러 집이 모인 작은 공동체가 나온다. 사진에 목숨 거는 관광객들과 음식 귀한 줄 모르는 원숭이들로 우글우글한 몽키포레스트와 입을 쩍 벌린 동굴로 유명한 고아가자 사원은 신이라고 해도 믿을법한 모습의 거대한 나무들이 훨씬 인상 깊었다. 토요일엔 우붓 마켓 근처에서 전통춤 공연 표를 샀다. 귀에 꽃을 꽂은 남자들이 몽환적인 발리 전통음악을 연주하고 화려하게 꾸민 여자들과 남자들이 눈을 부릅뜨고 춤을 추었다. 


발리에는 파도타기, 스쿠버다이빙, 열대우림, 사원, 계단식 논, 전통 공연, 요가, 생채식, 수공예, 쇼핑, 파티, 그 이상이 있다. 때문에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자연의 뒤편은 관광객들로 미어터진다. 인파로 인해 일출 등산코스는 정상까지 줄을 서서 올라야 하고, 해질녘의 울루와투 사원 안에서 휴대폰은 신호를 잃는다. 파도타기 좋다는 해변은 전부 서핑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 차고, 험하게 운전하는 택시와 교통체증 때문에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멀미로 고생했다. 코로나로 몸살을 앓았던 세계인이 사랑하는 관광지의 장사꾼들은 그동안의 손해를 메우겠다는 작정인지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바가지를 씌우려고 들었다. 그럼에도 알알이 동그랗게 깎인 모래가 있는 드림랜드 해변과 아늑한 비건 영화관 그리고 템페가 있는 발리에 언젠가 다시 간다면 그날은 꼭 비성수기일 것이다.


세레모니를 위해 한껏 꾸민 길가
관광객들로 미어터지는 울루와투 사원
발리 어떤 동네의 크레메이션 세레모니


발리 크레메이션 영상 https://youtu.be/YMbZQwy_M4o?si=TGBbzwn-c8K2Yeeo

길리 바다생태 관찰기 영상 https://youtu.be/dVjY195vBr8?si=EVw90VhZBIs4Cv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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