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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내용은 투룸매거진 36호(2023년 1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투룸매거진 앱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예쁘게 디자인 된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소문대로 깔끔하고 편리하고 효율적인 곳. 완벽하고 인위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싱가포르에서 저는 종종 얼떨떨했습니다.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보고, 지난 기억을 헤아리며 글을 쓰다 문득 그곳이 어떤 나라라기 보다 <싱가포르>라는 거대한 미래도시 테마파크 혹은 영화세트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굉장히 비싸기는 하지만 싱가포르는 한 번쯤 꼭 둘러보면 좋은 곳이에요. 곰곰이 생각했는데 당신을 우리 집에 꼭 초대하고 싶어요. 내 부엌에서 맘껏 요리도 해요.” 말레이시아 명상센터에서 며칠 동안 함께 봉사한 칸차나가 말했다. 가족들과 고향인 남인도로 긴 휴가를 떠나 8월에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그의 계획에 따라 우리의 싱가포르 여행 날짜가 정해졌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칸차나와 그의 집으로 들어가자 싱가포르가 아닌 인도에 도착한 기분이었다. 칸차나와 남편, 그리고 두 아들은 언제나 고개를 흔들거렸다. 얼마 전 인도가 배경인 시리즈에서 인도인들의 머리를 좌우로 흔드는 워블(wobble)을 배웠는데 모두가 그러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 미소가 번졌다.
칸차나의 가족은 타밀어를 쓰는데 ‘엄마, 아빠’가 한국어와 발음이 거의 같았다. 치파티라는 얇은 밀가루 빵을 먹는 북부와 다르게 남쪽은 쌀로 만든 도사나 빵을 많이 먹는다. 두툼한 난(naan)은 사실 현지인들은 거의 안 먹는 관광객용 음식이었다(!) 칸차나는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도구를 쓰며 평소에는 거의 만들지 않는 새로운 인도 음식을 매일 요리해 주었다. 그는 음식에 들어갈 마늘, 양파, 토마토, 고수 등 대부분의 재료를 푸드 프로세서에 자주 갈았다. 딱딱한 코코넛열매 속 과육을 갈아 처트니와 삼발(양념)을 만들었다. 그가 만든 파스타나 중식이라며 만든 가지볶음에서는 인도 향신료 맛이 났다. 한국인이 만든 외국 음식에서도 한식 맛이 날까 궁금해졌다.
하루는 함께 어느 대학교 축제의 공연과 전시를 보고는 칸차나가 가장 좋아하는 힌두사원에 들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간 그는 꽃잎을 집어 어딘가에 뿌리고 짧게 기도한 다음 빨간 가루를 이마에 콕 찍었다. 그다음 외부만큼이나 다채롭고 화려한 사원 내부를 천천히 걸으며 힌두 신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이름도 모습도 아름다워 당연히 여신일 줄 알았던 코끼리 모양 가네샤는 놀랍게도 남성이었다(!) 칸차나는 옷장 속 수많은 사리 중 하나를 꺼내 길고 긴 원단을 요리조리 잡고 접고 뱅그르르 돌아 입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의 남편은 남인도의 흥 넘치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그렇게 인도 가족과 문화에 푹 빠져 지내는 동안 인도에 대한 호기심이 한 뼘 더 자라났다.
공항에 내려 한국에 귀국할 때처럼 자동 입국심사대를 통과했다. 쓰레기가 굴러다니고 걸어 다니기 어려운 나라들을 여행하며 절실히 바라던 편리하고 깨끗한 곳에 도착했다. 특히 한국의 과거를 닮은 인도네시아에 있다간 터라 싱가포르에서의 순간들이 종종 미래로의 여행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쓰레기 투척 금지, 흡연 금지, 보행자에 양보 같은 문구가 흔히 붙어있고, 곳곳에는 CCTV가 지켜보고 있다. 안전한 보행자도로는 지붕까지 설치된 구간이 많다. 내부에서 식음료 섭취 시 벌금을 물리는 대중교통은 해외 신용카드로도 이용할 수 있다. 차량 구매 비용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유지비용 역시 많이 들기 때문에 자동차 수가 상대적으로 적어 교통체증도 거의 없다.
모든 표지판과 안내문이 영어로 되어있는 나라답게 어딜 가든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 건물 숲속을 걸으면 서로 다른 특이한 디자인의 건축물들이 눈길을 사로잡고 폭신폭신 연두색 열대식물들이 회색빛 도시에 작은 생명력을 더한다. 거리엔 다양한 옷차림과 생김새의 사람들이 다니고, 흔한 푸드 코트에서는 세계의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차이나타운 중심가에 위치한 부처의 치아사리를 보관 중인 불아사 사원에 갔을 땐 이전에 보았던 다른 불교 절들과 확연히 다른 그 규모와 호화로움에 놀라고 말았다. 불교 예술작품과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을 포함한 커다란 건물에는 볼거리가 풍성해 눈은 즐거웠지만 검소한 삶을 강조한 부처를 생각하면 뭔가 적잖이 겸연쩍었다.
단정하고 세련된 겉모습의 이상적인 도시도 결국 완벽할 순 없는 것일까. 도로를 달리는 트럭의 짐칸에는 안전장치도 없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어디론가 실려 가는 어두운 피부색의 남자들이 있었다. 칸차나의 집에 명상실로 쓰이는 가사도우미 방은 세탁기와 주방 옆 뒤편, 겨우 잠만 잘 정도 크기의 공간과 작은 화장실을 포함했다. 다른 집의 그 방은 크기도 더 작고 화장실도 따로 없어 가사도우미는 집 밖의 공용 화장실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인구밀집도가 높은 도시국가의 특성상 경작지가 전체 국토의 1%에 불과해 식량의 대부분과 담수까지 수입한다는 사실에 겨우 며칠을 여행하면서도 마음이 은은히 불안했다.(그럼에도 싱가포르의 식량안보 순위는 한국보다 높다.)
너무나 대놓고 도시인 곳에 있으면 아득히 자연이 그리워진다. 맹그로브 숲이 있는 생태보존 지역인 풀라우 우빈은 배로 들어가 자전거로 여행해야 하는 섬인데 체력이 바닥나서 패스. 좀 더 자연스러운 공원 같은 보타닉 가든과 싱가포르 특유의 인공적인 미로 가꾸어진 가든스 바이 더 베이 가운데 후자를 택했다. 뜨거운 한낮을 피해 늦은 오후에 도착했는데 정원이 크고 넓고 뭐가 많아서 일단 온실 쪽으로 걸었다. 왜 이렇게 사람이 많은가 했더니 얼마 전 검색하다 얼핏 봤던 아바타전이 클라우드 포레스트 돔에서 아직 진행 중이었다. 적지 않은 입장료와 인파를 무릅쓰고 영화 아바타의 신비로운 영상미와 상상의 동물들을 떠올리며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천장이 하늘만큼 높은 유리온실의 내부는 서늘하고 습한 것이 말레이시아의 더위에 시달리다 카메론 하이랜드에 도착한 순간의 느낌과 비슷했다. 온실이 아닌 온실은 어딜 봐도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 많은 식물을 도대체 어떻게 키우는 건지 마른 잎 하나 없이 완벽하게 아름다웠고, 곳곳에는 멋지고 사납게 생긴 상상의 생명체 모형들이 제자리인 양 자리 잡고 있었다. 익룡을 닮은 이크란 모형은 실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어쩐지 당장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너무 황홀하고 즐거운 동시에 이렇게 더운 나라에서 온실을 낮은 온도로 유지하고, 폭포와 미스트로 물을 뿌리고, 체험과 전시용 기계들을 운영하기 위해 쓰이는 에너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겨우 온실 하나인 줄 알았는데 한가운데 식물로 뒤덮인 7층 인공산을 샅샅이 관찰하다 그만 지쳐버렸다. 다음으로 가보고 싶었던 스카이웨이와 가든 랩소디 쇼를 포기했다. 이렇게 크고 둘러볼 거리가 많은 식물원에 오면서 감히 늦게 나온 것과 간식을 싸 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덥고 습한 나라의 커다란 가로수에는 초록빛 복슬복슬한 식물들이 들러붙어 자란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실내 인공폭포로 유명한 창이공항 주얼은 큼직큼직한 이파리의 열대식물로 가득해 여기가 쇼핑몰인지 식물원인지 헷갈린다. 싱가포르의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하는 건 얼마나 재미있을까? 아예 식물관찰 여행 테마로 매일 식물원과 공원에 다니며 걷고, 먹고, 쉬기만 해도 참 좋을 것 같다.
싱가포르 영상 https://youtu.be/vz04eRx-TGY?si=NHIb54F1vhnn393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