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룸매거진 동남아리포트 아카이브
* 본 내용은 투룸매거진 26호(2023년 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투룸매거진 앱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예쁘게 디자인 된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그저 항상 따뜻할 것 같은 베트남 북부에는 독일 겨울과 닮은 어둡고 칙칙한 겨울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태국에 비해 거칠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나중엔 그저 웃기고 재밌더라고요. 베트남 고추는 눈물 나게 맵지만 음식은 하나도 안 맵고요, 두부는 일단 튀기고 보는 것이 마음에 꼭 듭니다.
하노이의 한 카페에서 주문을 마쳤을 때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남자 직원이 나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나는 한국이라고 답했고 그는 놀란 표정으로 와우...를 내뱉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궁금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깟바섬으로 가는 교통편을 물었을 뿐인데 미소를 머금고 하롱베이 크루즈 투어부터 사파 여행패키지를 조곤조곤하게 설명하던 호텔의 여자 매니저는 파트너가 독일 사람이라는 걸 알고 당신은 아시아에서 온 것 같은데... 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한국이요. 그는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고,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한국 여자들은 피부가 하얗고 메이크업을 잘하고 예쁜 옷을 입는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유 돈 룩 라이크 코리안. 유 룩 라이크... 힘(파트너)” 하하하하하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얼마 뒤 푸꾸옥섬에 도착해 지금껏 만났던 베트남 사람 가운데 영어를 가장 잘하는 택시운전사의 차를 탔다. 숙소로 가는 길에 푸꾸옥에 한국 사람들이 아주 많으며 특히 한국 여자들은 피부가 하얗고 메이크업을 잘해서 너무 예쁘다고 했다. 요즘은 베트남 여자들도 메이크업을 꽤 잘하는데 얼굴이 예쁘지 않은(?) 베트남 여자가 피부까지 하얗지 않으면 남자친구를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외국인 남자친구를 만들면 되겠네요!
베트남은 자동차고 오토바이고 가리지 않고 거의 모든 운전자가 경적을 울려댄다. 도로를 가득 메운 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미치게 빵빵 삑삑거리며 길을 건너려고 해도 멈춰주지 않는다. 차에 타면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수시로 휴대폰을 보며 경적을 울리는 운전자를 만난다. 언제 어디에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을 환경인데 다들 별일 아니라는 듯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오고 사라진다. 정신없고 시끄러운 길가를 피해 공원에 들어갔다. 다른 공원에서도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걷고 뛰거나 개 산책하는 사람은 물론 낯설고 특이한 광경도 눈에 들어왔다. 목줄은 없지만 옷은 입고 다니는 작은 강아지들과 농구공을 야무지게 굴리며 뛰어다니는 개, 명상하는 사람, 매점 주변에 앉아 먹고 마시는 사람들, 다짜고짜 이발해준다는 청년무리, 다양한 자신만의 몸짓으로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춤추듯 맨손체조 하는 사람들, 네트를 사이에 두고 제기를 공처럼 주고받는 사람들, 공놀이하는 사람들, 야외 운동기구 근처에 모여 각각 운동하는 사람들, 마치 아줌마 파마를 연상시키는 모양의 털모자를 씌운 아기를 안고 있는 할머니. 한쪽에는 중년남성들이 시커먼 옷을 입고는 우글우글 몰려있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곳곳에 열린 장기판을 관람하고 있었다. 공원을 한 바퀴 걷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져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 현장이 너무 재밌어서 자꾸만 웃음이 터졌다. 혼돈의 카오스 같은 도로에서도 아무튼 천천히 걷기 시작하면 길을 건널 수 있다. 아무런 질서가 없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지켜보니 신기하게도 나름의 질서로 별일 없이 꽤 잘 돌아가고 있었다.
푸꾸옥 길가의 작은 가게에서 거의 마음에 드는 비키니를 찾았을 때 밖에 있던 파트너 P가 상기된 얼굴로 급히 다가왔다. "폰을 도둑맞았어." 우리는 약 5초간 뇌가 정전된 듯 어쩔 줄 몰랐다. P는 일단 내 폰으로 도난당한 폰의 위치를 파악하고 잠금을 걸었다. 그는 영혼을 날치기당한 것처럼 상심했다. 카페에 갈 계획이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라 숙소로 돌아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숙소 직원 D가 경찰서에 같이 가준다고 했다. P는 폰의 위치를 보여주려고 맥북을 챙겼고 나는 걱정이 앞섰다. 다행인지 경찰서가 문을 닫아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왔더니 D가 경찰 핫라인과 통화했고 당장 가야 한단다. P는 가져간 아이패드로 종종 메시지를 보냈다.
20:52 경찰들이 폰을 찾으러 갔어.
20:21 오래 걸릴 수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
21:22 여기에 날치기당한 한국인 커플도 있는데 그 폰도 같은 장소에 있대.
날치기 범죄의 규모가 큰 것 같다. 도난당한 폰이 쌓여있는 시커먼 방. 태국보다 물가는 저렴하고 아이폰 가격은 유럽이랑 큰 차이가 없는 베트남에 이상할 만큼 흔한, 그 많은 아이폰이 날치기당한 중고폰인가? 같은 생각을 하다 잠들었다. 자정쯤 겁에 질려 돌아온 P가 부르는 소리에 깼다. 사복경찰들은 자꾸 자기 아이클라우드 비밀번호를 묻고, 아이패드를 가져가겠다고 하고, 같이 간 D는 베트남 경찰이라 못 믿냐 하고, 어둠 속 조명이 떨어진 야외 테이블에서 두 시간을 기다리질 않나. 어느 순간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너무 외롭고 무서웠고, 심지어 같이 간 D마저 모두 한패가 아닐까 하는 의심에 내 걱정까지 했단다. 다음날이 되자 P는 다시 경찰서에 가겠다고 했다. 나는 못마땅해하며 어차피 폰을 찾을 수도, 보험처리가 되는 것도 아니고, 어제 네 말에 따르면 믿을 수 없고 불안한 곳인데 굳이 가려는 이유를 물었다. 그는 그래도 경찰들이 노력하는데 자신이 진술서를 쓰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진술서만 작성하고 오는 거니까 두 시간이면 될 거라고 나를 달래며 다시 아이패드를 들고 갔다.
14:06 아휴 계속 경찰서, 법률사무소 등 여기저기를 이동하고 있어.
14:52 맙소사 내 폰이 여기 있어.
14:57 여기에 있다고 나와. 진술서 복사본을 받았어.
15:49 내 폰을 받았어!
16:21 폰 받은 거랑 관련해서 서류를 또 엄청나게 써야 된대.
오후 1시에 나간 그는 결국 오후 8시가 되어서야 끊임없는 기다림과 서류작성에 질렸다는 얼굴로 돌아왔다. 손에는 폰 케이스가 사라진 날치기 당했던 폰을 꼭 쥐고.
<투룸라운지> 24. 하노이에서 딱 한 끼만 먹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