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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지수 Aug 11. 2024

호불호 없는 대만

투룸매거진 아시아리포트 아카이브

* 본 내용은 투룸매거진 30호(2023년 6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투룸매거진 앱에서 더 많은 사진과 예쁘게 디자인 된 기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이 맛있어서, 사람들이 친절해서, 다양한 식물이 많아서, 동물 친화적이라서 등등 좋아하는 이유는 각자 달라도 아직 대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만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대만에서 길을 걷다 우연히 두유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발견하는 기쁨과 어딜 가도 큰 고생 없이 비건 음식을 챙겨 먹으며 매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작은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직접 만난 대만은 ‘비건 천국’ 그 이상의 매력으로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타이베이의 공원


섬세한 대도시


계속해서 들려오는 ‘비건 천국’이라는 소문을 좇아 마침내 대만에 도착했다. 타이베이를 향해 지상에서 최대 16미터 높이의 공중을 달리는 공항철도 안에는 스마트폰 무선충전기가 설치되어 있다. 한껏 들뜬 여행자들이 싱그러운 초록색 수풀이 무성한 산부터 빽빽한 건물과 도로로 바뀌어 가는 창밖의 풍경에 넋을 잃는 동안 현지인들은 무심히 쪽잠을 청했다. 이곳에서 먼저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높은 인구밀도로 유명한 도시임에도 대부분의 화장실에 설치된 노약자를 위한 안전 손잡이와 비상벨이었다. 다안 삼림 공원을 비롯한 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휠체어 사용자의 일상을 마주하며 최소한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모국의 휠체어 사용자들의 치열한 싸움이 떠올랐다.


타이베이에는 최대한 많은 사회 구성원을 포용하고 배려하려는 섬세한 친절함이 여기저기 묻어있다. 아직 한국에는 부족한 성중립 화장실과 가족 화장실은 물론이고, 여자 화장실과 10미터 이상 떨어진 남자 화장실 사람 그림 옆에는 기저귀 갈이대 표지가 당연하게 붙어있다.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위한 전용도로가 나뉘어 있고, 횡단보도 앞에서 끊긴 점자블록은 두꺼운 페인트로 이어두었다. 하루는 시내버스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는데 모든 하차 벨 조금 위쪽에 작은 투명 박스로 소중하게 감싸진 수상한 벨이 있었다. 저건 뭘까 하고 눈으로 근처에 적힌 글자들을 살피다 [성추행 & 소매치기 알람] 표시를 발견했다. 전에 이런 걸 또 본 적이 있었나 잠시 생각했다.


친절한 사회가 친절한 사람을 키워내는 걸까, 친절한 사람들이 친절한 사회를 만들어 가는 걸까? 아니면 기분 탓일까, 대만에선 유난히 언어를 뛰어넘는 다정함과 여유를 자주 느꼈다. 버스정류장에서 우연히 말을 걸어 온 중년여성은 외국인들이 걱정되었는지 버스 안에서 손수 야시장 지도를 그려주는 걸로 모자라 아예 같이 내려서 직접 길을 안내하고는 쿨하게 떠나셨고, 번역기 앱을 쓰면서도 쩔쩔매고 있으면 항상 현지인들이 먼저 다가와 도와주었다. 혼자 공원에 앉아 천천히 밥을 먹기도 하고, 산책 중 냄새를 맡거나 벤치에 앉아 쉬는 강아지를 차분히 기다려 준다. 집값이 터무니없이 비싸고 사람이 많은 복잡한 대도시라지만 타이베이라면 한번 살아봐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추행 & 소매치기 알람벨


또우장이 있는 아침


여기저기 널려있는 익숙한 한자를 보며 무슨 뜻일까 추측해 보고, 대만의 인사말 니하오(안녕하세요), 쎼쎼(감사합니다)가 입에 붙게 반복하고, 타이완 달러에 적응하기 시작한 5일째, 우리는 타이베이에서 자동차와 간단한 캠핑 기어를 빌려 로드트립을 떠났다. 거의 매일 다른 곳에서 묵으며 10일 동안 제대로 빨래 한번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지만, 아무리 작은 도시에 가도 눈에 띄는 素食(채식)이 적힌 간판을 따라 들어가 만두와 국수를 먹고, 카페보다 흔한 테이크아웃 버블티 가게에 가서 달달한 쩐주(타피오카 펄)를 추가한 씁쓸한 우롱차나 그 자체로 깔끔한 맑은 홍차를 주문하는 등 반복되는 일상의 조각들이 생겨나 불안정한 생활에 묘한 안정감을 안겨주었다.


그중 제일은 역시 조식으로 먹는 또우장(두유)이다. 또우장 가게는 한국의 김밥가게만큼 많으며 맛도 비슷한 듯 다른데 정말 유명한 곳은 한 시간씩 줄을 서서 먹는다. 아침에는 대부분의 또우장 전문점에 사람들이 가득가득하다. 설탕을 한 스푼 넣고 따뜻하게 덥힌 또우장이 기본인 듯하지만 차갑게도, 설탕 없이도 주문이 가능하고 파는 곳에 따라 어떤 것은 훈제 향이 나기도 한다. 가게에 가면 달달하고 뜨끈한 두유에 요우티아오라는 튀긴 밀가루 반죽을 찍어 먹는데 어떤 튀김은 딱딱하고 기름에 절었고, 어떤 건 갓 튀겨 바삭하다. 숙소 조식 한 자리엔 항상 또우장이 있고, 버블티 가게엔 흑당 버블이 들어간 두유가 있고, 편의점이나 슈퍼마켓엔 수십 가지 종류의 두유가 있다.


대만을 떠나는 날, 작정하고 일찍 일어나 숙소 근처의 또우장 가게에 갔다. 또우장은 국민 아침 식사이자 야식이기 때문에 밤에 장사를 시작해 조식까지 판매한 다음 문을 닫는 곳도 있는데 이곳이 그랬다. 또우장과 요우티아오를 주문하고 들어가 앉았더니 그릇에 담긴 따뜻하고 달콤한 두유를 먼저 가져다주었다. 사실 둘째 날 유명한 또우장 집에 갔다가 기나긴 줄을 보고 ‘두유가 뭐 거기서 거기겠지’하고 포기했는데 콩국수의 콩국 맛이 천차만별인 것처럼 두유도 그렇다는 걸 그 집 두유를 맛보고 깨달았다. 감탄하며 두유를 떠먹다가 가게 앞에서 방금 튀긴 바삭하고 뜨거운 요우티아오를 건네받아 베어 물었을 때, 사람들이 왜 그렇게 한 시간씩 줄을 서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갓 튀긴 요우티아오


자연온천 대모험


맛있는 먹을거리도 구경할 것도 너무나 많아 즐겁고도 지치는 타이베이를 벗어났는데 고층 건물은 줄어들 뿐 사라지지 않았다. 각종 산업공단과 발전소가 빼곡한 서쪽 해안가의 공중으로 띄워 놓은 고속도로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달렸다. 산으로 이루어진 국토의 70%를 제외한 활용 가능한 땅은 모조리 개발하고, 경작이 가능한 땅에는 전부 농사를 짓고 있는 듯, 산에는 차밭이 바다 바로 옆에는 논이 있었다. 대만 내 어디를 가도 멀지 않은 거리에 음료, 아이스크림, WIFI, 화장실, ATM, 주차장 등 정말로 없는 게 없는 편의점이 있어서 어떤 대만인의 “한국 시골에 편의점이 없다”는 불평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발짝도 떼지 않고 해발 2782m에 도달할 수 있는 산 중턱의 구불구불 멀미나는 포장도로가 있지만 그보다 훨씬 넓은 잘 보존된 푸른 자연엔 곰, 원숭이, 공작새 등 야생동물들이 살고 있다. 그런 산 어딘가에 숨겨진 자연 온천을 알아낸 파트너의 성화에 못 이김 반, 궁금함 반으로 흙길을 달리고, 산동네 길 한 가운데에서 왈왈 짖어대는 개들을 지나쳐 빛바랜 리송 온천 표지판을 만났다. 모험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낡은 목장갑 모자를 쓴 철근과 두툼한 밧줄로 이어져 있는 경사가 거의 90도에 이르는 거친 산길을 40분가량 내려갔다. 온몸이 후끈해지고 땀이 줄줄 흘렀으며 옷은 흙먼지로 뒤덮였다. 험난한 길 끝에는 까만 올챙이들이 놀고 있는 계곡물이 있었다.


온천은 계곡물을 건너고 거슬러 올라가야 있다고 말하는 듯 밧줄이 이어져 있었다. 긴팔 긴바지를 벗고 수영복만 입은 채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을 건너며 좀 전의 ‘이렇게 더운데 온천을?’ 하는 걱정이 싸악 사라졌다. 걸쳐있는 밧줄을 따라 다시 바위를 오르고 물을 건너며 마침내 앉아있는 사람이 보이는 온천가에 도착했나 했더니 마지막 관문, 허리춤까지 오는 깊은 물 건너기가 남아있었다. 뼛속까지 시린 찬물에 하반신이 푸욱 잠기니 턱이 달달 떨리며 깩깩 비명이 나왔다. 호다닥 뛰어가 닿은 온천물은 또 너무 뜨거워 찬물과 뜨거운 물 사이에서 잠시 방황했다. 곧 마음의 안정을 찾고 주위를 둘러보니 온천물이 흘러내리는 상아색과 녹색이 뒤섞인 바위, 맑은 터콰이즈 색 계곡물, 나뭇잎 사이로 부서져 쏟아지는 햇볕의 현실성 없는 아름다움에 실실 헛웃음이 났다.


아름다운 리송온천


*리송 온천은 겨울에만 나타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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