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으로 뜨개 하기
오래된 사진 속 어린 나는 엄마가 떠준 자주색 코바늘 버킷햇을 쓰고 있다. 엄마가 뜨개방에 다니면서 당시 유행하던 볼레로와 무릎까지 오는 롱 가디건을 떠서 입고 다니던 게 기억난다. 초등학생이던 어떤 겨울, 엄마한테 배워서 삐뚤빼뚤한 목도리를 뜬 것이 내 손뜨개 첫 작품이었다. 코바늘 뜨개도 엄마한테 배웠는데 그 이후로 목도리, 모자, 티 코지, 가방, 티코스터 같은 쉽고 작은 것들을 만들곤 했다.
캐나다에서는 하우스메이트들을 따라간 물물교환 파티에서 털실과 바늘을 여러 개 가져와 뜨개를 알려주러 온 어떤 분이 인기가 없다며 나에게 마음껏 가져가라고 했고, 계획 없이 구경하러 들어간 중고물품 가게에서 여러 털실과 바늘을 발견해 다양한 색상과 재질과 굵기를 섞어 목도리를 만들다가 재미가 붙어 창작 재료 가게에 가서 털실을 사고, 인터넷에서 새로운 뜨개 방법을 배워 뜬 목도리와 코바늘로 동그란 담요를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
날씨가 쌀쌀해지고 사람들이 입은 예쁜 니트를 보면 손이 꿈틀거린다. 이전까지는 손뜨개로 양말이나 옷을 만드는 것은 너무 복잡하고 어려울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몇 번 털실을 사보니 털실을 구매하는 가격이 만들어진 제품을 사는 것보다 비싼 경우가 많고, 내가 만들면 공장에서 만든 것보다는 엉성할 테니 차라리 이미 잘 만들어지고 저렴한 제품을 사는 것이 낫겠다는 마음에 직접 만들어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울이 들어간 니트가 따뜻하고 좋은 것이라는 인식에도 지금까지 오래 입는 내 니트는 전부 면으로 된 것들이다. 울이 들어간 것은 줄어들고 까슬거리고 보풀이 일어난다. 합성섬유로 된 것들도 가볍고 따뜻하지만 경험상 그렇게 오래 입지는 못했다. 순면으로 된 니트는 쉽게 찾을 수 없고, 내가 원하는 단순한 디자인과 색상, 재질의 니트는 만나기가 어렵다.
애인이 작년부터 사라졌다고 주장하는 검정 목도리가 필요한 계절이 되었다. 몇몇 가게를 찾아다녔지만 동물의 털과 합성섬유가 들어가지 않은 얇은 민무늬의 순면 목도리를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순면 털실과 대바늘을 사 왔다. 안에 종이심이 없이 실만 있어서 크기가 작길래 얼마나 사야 하는지 감이 안 와서 열 볼을 샀는데 목도리를 만들고도 실이 남아서 모자도 만들었다. 검은색 실로 계속 뜨다 보니 색깔이 있는 것도 뜨고 싶어 졌다. 춥고 해가 짧은 독일 겨울에 뜨개질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날이 추워지니 온라인에 더 많은 사람들이 손뜨개를 하는 것이 보인다. 한 트친이 조끼를 뜬 것을 보니 잘 입지도 않는 조끼 욕심이 생겼다. 구글 크롬으로 번역된 독일 손뜨개 온라인 쇼핑몰에서 털실을 샀다. 마 재질은 없었고, 리넨은 선택지가 아주 적고 색깔이 별로였다. 무엇에 실 몇 볼이 필요한지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조끼를 뜰 것, 양말을 뜰 것, 섞인 색깔이 예쁜 것 등등.. 더 많이 사고 싶은 것을 참으며 약 8만 원어치를 샀다.
핀터레스트에서 손뜨개 옷 사진들을 찾아보고, 유튜브에서 조끼와 양말 만들기 영상을 보고 또 봤다. 처음에는 뭐라는지 잘 모르겠던 것들이 계속 보니 하나둘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내가 원하는 색깔과 재질의 실로, 내가 원하는 디자인의 양말과 옷을 만들어 입을 생각에 설렌다. 아직 양말 뒤꿈치 부분 복잡한 기술은 안 해봤고, 조끼는 목 부분이 너무 크고, 욕심을 부리느라 가운데에 꽈배기 패턴을 넣은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쉬운방법의 뒤꿈치를 만든 양말을 만들고 있고, 조끼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풀어버렸다.
무지개 색깔이 섞인 실로 미니 목도리를 만들어 친구에게 선물하고, 조끼를 뜨고 있는 와중에 손뜨개 쇼핑몰에 들어갔다가 블랙프라이데이 세일을 봐버렸고.. 또다시 44.4유로만큼 털실을 샀다.. 올 겨울에는 털실을 그만 사야겠다..
뜨개질을 하려면 털실이 필요하다. 여름용은 종이, 리넨, 마 등 식물성 섬유가 많지만 겨울용 특히 두꺼운 실이나 예쁜 색상과 무늬의 것들은 대부분 동물의 털이나 오랫동안 썩지 않는 합성섬유가 들어간다. 독일 털실 쇼핑몰엔 한국보다 리넨이나 마 같은 식물성 섬유의 선택지가 더 적고, 그나마 있는 리넨, 대나무 섬유로 된 털실은 종류와 색상이 다양하지 않다.
동물의 털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얻을 수도 있어서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죽이는 것보다 더 잔인한 경우가 훨씬 많다. 앙고라나 새의 깃털은 동물이 살아있는 채로 뽑는다. 동물들은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울부짖는다. 동물의 권리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이 늘면서 뮬징하지 않은 양털, 동물복지 동물 털 같은 제품들이 나오지만 믿을 수 없다. 내 눈엔 그저 장사를 위한 마케팅으로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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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성섬유는 동물 털 없이도 가볍고 따뜻해 비건이지만 생산과정에서도 내손을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썩지 않고 쓰레기로 떠돌며 환경을 오염시킨다는 생각을 하면 차마 살 수가 없다. 그러면 면이 남는다. 가격이 너무 비싸지 않고, 리넨이나 대나무 섬유에 비해 종류와 색상이 다양한 면으로 된 실을 고르지만 세계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면은 GMO이며 GMO는 생산과정에서 주변 환경을 파괴한다.
그래도 가능하면 유기농이나 대나무 섬유로 된 실을 사서 옷을 만들어 오래 입고, 풀어서 다시 만들어 입으면 저렴하게 구매한 개발도상국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여기저기 이동하며 환경오염을 추가로 일으키는 동물 털이나 합성섬유가 섞인 옷을 입다가 상대적으로 빨리 버리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고민해본다.
요즘엔 자나깨나 털실생각, 뜨개생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