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다르를 아시나요
#유난히 차갑고도 시렸던 2월의 겨울바람
2015년에서 2016년으로 넘어가던 겨울은 유난히 나에게 혹독했다. 한 번에 힘든 일이 겹치니 나는 지쳐버렸다. 무조건 떠나야 했다. 상처 받은 나를 품어줄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겨울의 동유럽으로 떠났다.
여행은 대체적으로 간소했다. 처음 가보는 유럽이었지만 이렇다 할 관광지도 모르고, 여행 계획도 제대로 세우지 못한 채 그저 책 한 권 달랑 손에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그리고 2주 동안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거쳐 마침내 크로아티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품어주는 도시를 만났다. 바로, 자다르(Zadar).
#아마 내가 자다르에 가게 된 것도 운명
사실 자다르는 내가 처음부터 가기로 계획한 도시가 아니었다. 요정들이 사는 호수로 유명한 플리트비체를 가려고 비워둔 하루의 대타였다. 2월에는 앙상한 나뭇가지뿐이라는 후기들에 훗날을 기약하며 다른 도시를 찾던 와중 발견한 곳. 여행의 묘미는 늘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듯, 우연히 방문한 곳이 인생 여행지가 될 줄이야!
‘자다르에 가면 석양을 꼭 보세요.’라는 말에 홀리듯이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구시가지로 향했다. ‘4시 30분에 해가 진다고 했는데’, 하며 발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숙소로부터 구시가지까지 걸어가기에 무리 없는 거리였기에 지도를 친구 삼아 앞으로 앞으로 향했다. 구시가지는 크로아티아의 여타 도시와 다를 바 없었다. 방금 비가 온 듯 반질반질한 돌들, 공격받은 흔적이 있는 성터, 특유의 색감까지. 하지만 자다르의 보물은 해안가에 있었다.
#바다 오르간이 울린 건 내 엉덩이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나
여행 프로그램에서 스치듯 본 것 같은, 아니 어쩌면 수업시간에 배웠던지도 모를. 바로 바다 오르간(Sea Organ). 파도의 크기, 세기에 따라서 오르간의 소리가 달라진다는 곳. 니콜라 바시츠(Nikola Basic)라는 크로아티아의 천재적인 설치예술가가 바닷가의 산책로를 따라 만들었다는 바다 오르간은 35개의 파이프를 통해 매 순간 다른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입장료도 없고, 좌석도 정해지지 않은 야외 콘서트장에서 마치 고래들의 울음소리를 듣는 듯한 기분이었다. 주변의 은은한 조명 속에서 나는 조심스레 오르간이 있는 계단 위에 앉았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내 안에서 탄성이 나왔다.
“아, 살 것 같다.”
나는 숨 쉴 곳이 필요했던 거였다. 자다르의 바다는 나에게 충분한 위안이 되어주었다. 취업도, 사랑도 모두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들이라는 걸. 큰 파도가 치면 큰 소리가 나고, 작은 파도가 치면 작은 소리가 난다는 삶의 단순한 이치를 바다 오르간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오르간은 나의 엉덩이를 울렸고, 뿌연 하늘은 내 마음을 대변해주었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졌다고 생각한 순간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니 태양의 인사(The greeting to the sun)가 빛을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 위에서 불빛을 쫓아 뛰어다녔고, 산책을 나온듯한 노년의 부부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자다르의 사람들이 사랑하는 해안가의 모습이었다. 직장이라는 일상을 갖기 위해 진짜 나의 일상은 잊어버리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했다. 이 소중한 순간을 잊지 않으려 두 눈에 꼭 담아두었다.
#에필로그
차가운 동유럽에서의 여행을 마친 후 한국으로 돌아와 나의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 나는 노트북 앞에 앉았다. 막 학기 매일 뜨는 공채들에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을 보며 동유럽의 기억은 마치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내가 찍어온 사진과, 밤마다 썼던 일기들은 나에게 3주간의 기억이 꿈이 아니었다는 것을 되새겨 주었다.
그 이후 취업을 준비하고, 힘이 들 때마다 나는 자다르의 그 바다를 떠올렸다. 나에게 단순한 삶의 이치를 알려주었던 그 바다를. 힘든 시기를 거치고 취업을 한 요즘, 가끔 퇴근 후 지친 날이면 지난 여행의 일기를 펼친다. 그 여행기들을 읽을 때면, 어느새 나는 자다르의 바다 오르간 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