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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May 19. 2020

안녕, 짝사랑

Goodbye to Romance


"언니가 오빠 좋아했던 거
오빠도 알고 있더라고요"




언니, 월요일 잘 보냈어?

얼마 전에 A를 만났거든. 근데 덕분에 기나긴 짝사랑이 끝난 기분이야.


아니 왜 있잖아, 내가 대학생 때 되게 좋아했던 오빠 있지. 응 그래 그 사람. 내가 좋아하는 거 모를 거라고 그랬었잖아. 지금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잖아. 근데 A가 그러는 거야, 몇 년 전에 우연히 이야기하다가 내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때 그랬대. 내가 자길 좋아했던걸 알고 있었다고.


감동인 건 내가 그 당시에 나름 티를 냈거든. 근데 오빠가 안 받아줬어 그래서 나는 막 티는 못 내고 끙끙 앓았지. 맞아, 모를 수가 없었겠지. 되게 어렸잖아, 내 마음이 얼마나 투명하게 보였겠어. 근데 그때 되게 상 안 주려고 잘 돌려 돌려 거절했었다, 뭐 이런 식으로 말했다더라고.


A한테 그 말을 듣는데 되게 좋더라. 그 오빠가 내 감정에 대해서 되게 좋은 식으로 말했나 봐, 잘, 조심스럽게? 뭐 그 둘이 만나서 그 이야기를 나눈 것도 몇 년 전이니까.


사실 나도 직접 고백을 하진 않았지. 그래서 직접 거절을 당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온갖 티는 냈으니까 말하지 않아도 아는 거잖아. 그래서 뭐랄까. 그 말을 전달받는 순간 이제야 짝사랑이 정리된 느낌이랄까? 잊고 있던 짝사랑이 '이제 진짜 끝!' 이런 순간이 온 느낌이었어. 정말 되게 잘 정리된 느낌이었어. 약간 해리포터 완결 본 느낌처럼. 게임 최종 보스 깬 느낌?


그러면서 '내가 좋은 사람을 좋아했구나', 싶은 생각이 드는 거야.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 좋은 사람이 맞았구나 하는 거지. 그 오빠가 A한테 했던 말을 듣고서 마음이 따뜻해졌어. 좋은 짝사랑이었다, 싶은 느낌.





내가 좋아하는 김이나 작사가님 알지? 본인 찐 경험담을 넣은 노래가 있다는데 갑자기 그 노래가 떠오르는 거야. 써니힐 Goodbye to romance! 나도 내 경험담을 가사로 써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서 그랬나? 히히


맞아, 언니 기억나? 내가 언니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그 오빠랑 같이 밥 먹으러 갔던 거. 누가 봐도 되게 우리 연인 같아 보인다고 언니가 놀렸었잖아. 사장님이 놀리셨었나? 토이 노래 가사처럼 나도 그 농담에 밤새 설렜었는데.


근데 나 아직도 그날 생각하면 되게 설렌다? 고작 밥 한 끼 같이 먹은 건데 말이야. 그날 지하철 타고 내렸는데 그 오빠가 지하철 의자에 앉아있던 장면이 아직도 선명해. 정작 그날 식당에서 뭘 먹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이없지? 기억나는 게 되게 단편적이야.  우리가 창가에 앉았었거든. 그 창가에서 여름의 청계천을 찍었던 사진이 아직도 클라우드에 있을걸? 맞아. 그래서 생각이 가끔 나나 봐.


언니도 첫사랑 근황 궁금해지지? 사실 나는 첫사랑이 누굴까 싶은데 잘 모르겠어. 첫사랑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거든. 처음 좋아한 사람인가? 처음 사귄 사람인가? 어느 정도의 감정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 오빠는 내 로맨스는 맞는 거 같아.


맞아, 그리고 나 이 오빠 얘기 듣고 되게 뿌듯했어. 내가 좋아했다는 걸 그 사람이 알았다는 부분이 되게 뿌듯하더라고. 만약에 내가 끙끙 앓으면서 좋아했단 걸 나만 알고 말도 못 하고 지나갔으면 되게 후회했을 것 같은 거야.


근데 내가 나름 내 감정을 표현했고, 그 사람이 눈치를 챘다는 거잖아. 그럼 그 감정이 일단 전달이 되었다는 거니까, 그 점이 난 좋더라. 그리고 그 감정을 조심스러워하는 사람이라 더 좋았던 것 같아


막 여기저기에 '걔가 나 좋아하잖아~'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고 '얘를 어떻게 상처 안 주고 돌려서 잘 말하지'라고 고민하는 사람이라. 그 당시에도 대화를 하다가 그 오빠 속 깊은 부분들을 볼 때마다 내가 더 치였던 것 같아. 지금 기억났어. 맞아 그래서 내가 참 좋아했었어.



역시 그 사람 좋아하길 잘했던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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