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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경 Aug 20. 2020

덕질의 역사 - 2

누군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덕질 계에도 유명한 잠언들이 있다.
 

네 새끼 소중하듯 내 새끼 소중하다.
입덕은 요란하게 탈덕은 조용히.
입덕 부정기는 짧을수록 좋다.
덕후에게 탈덕은 없다. 휴덕만 있을 뿐.
아이돌이 밥 먹여준다.


     내가 이걸 깨달은 때는 바야흐로 질풍노도의 시기. 찬란하게 빛나던 나의 10대 때였다. 유구한 나의 덕질 역사를 돌이켜보면 이 말들은 거의 예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엄마는 내가 좋아했던 아이돌은 핑클부터라고 말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좋아’했던 거지 ‘덕질’했던 건 아니었다. 나는 내 인생을 뒤흔든 그 겨울방학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나는 지금은 2인조가 되어버린 5인조 동방신기를 좋아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는 KM 뮤직이었나, 엠넷이었나, 뮤직비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다) HUG 뮤직비디오를 보고 거하게 치였다. 일명 덕통 사고. ‘정신 차려 이제부터 너의 최애는 나야’를 그때 처음 당했다.


     당시 나의 최애는 시아준수였고, 이때부터 SM덕질의 루트는 시작되었다. 콘서트 보겠다고 밤새 줄도 서보고, 그때는 제대로 된 굿즈 사이트도 없었지만 카시오페아 1기로서 후드도 있었다. (잠옷으로 잘 입었다)


     팬클럽 고유의 색상인 펄레드와 레드의 싸움에 휩싸이기도 했고, 당시 다음에 있었던 팬카페였던 유애루비에서도 (아 추억의 이름이다.) 열심히 활동했었다. 게다가 팬클럽 카드도 진짜 체크카드였다. (센세이션.. 생각해보니 제법 괜찮은 마케팅이었네) 또, 모든 팬시 용품은 동방신기로 꾸몄었다: 시간표, 펜띠 등등. 당시 버디버디 아이디도 ‘준수 부인’이었다는 건 TMI.


     아무튼, 각종 루머들에 어린 마음 많이 힘들었던 기억들이 난다. 하지만 동방신기를 걸고 엄마와 여러 성적 내기를 했고 (ex. 이번 중간고사 평균 몇 점 넘으면 다음 콘서트 or 공연 보내주기) 당시 내 장래희망까지 뒤 흔들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뭐.. 그때 내가 SM이 만든 아카데미에 작곡을 배우러 들어갔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직도 궁금하다. 엄마는 아직도 이 시절 이야기를 하면 혀를 내두른다. 당시 티비에 동방신기만 나오면 우리 가족 전부가 나를 부르곤 했으니까.


     하지만 이 시기의 덕질은 어디까지나 아티스트보다는 소속사의 목소리가 더 컸고, 팬들은 개인보다는 집단(팬클럽)으로서의 행동이 컸다. 팬들은 정체를 모르는 ‘팬클럽 회장’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고, 각 ‘파’를 만들어서 활동했다.


     당시 콘서트나 공방 뛰어본 사람들은 알겠지. ‘ㅇㅇ파’ 명함 한두 번쯤은 받아봤을 거다. 이게 아마 이후의 홈마 문화로 변경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같은 파원들은 특정 굿즈를 함께 쓰고, 특정 문화를 공유하며 팬덤을 유지했다.


     당시에는 유명 ‘파’에 속해 있는 게 자랑일 정도로, 까다로운 가입조건과 함께 해당 아티스트가 알 정도로 높은 인지도를 자랑했었다. 갑자기 몇몇 이름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데 정확히 이유는 생각나지 않지만 나는 파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의 아웃사이더 기질이 발동된 걸까..?


     돌이켜보면 재미있었던 10대 시절의 팬덤 문화와 팬질. 이 시기의 덕질은 나에게 많은 상처도 주었지만 많은 추억도 주었다. 같은 또래끼리 공유할 수 있는 문화가 가장 컸던 시기 - 그리고 확실히 이때부터 깨달았던 것 같다. 나는 SM의 노예가 될 거라는 걸. 제가 아마 구사옥의 창문 하나는 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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