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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음 Mar 31. 2023

쏘 카인드 당근

카레부터 당근라페까지

      어릴 때 저녁 메뉴로 카레가 자주 올랐다. 지금의 커리와는 다른 질감과 농도의 카레였다. 감자와 당근 그리고 양파가 큼지막하게, 고기는 자잘하게 들어있는 걸쭉한 풀 같은 농도의 카레였다.

     갓 지은 뜨거운 하얀 쌀밥 위에 크게 두 국자 퍼올린 카레밥은 늘 전투자세를 요하는 메뉴였다. 감자와 양파는 크기와 상관없이 충분히 익고 나면 호감이 가는 맛과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당근은. 

     당근은 뭐랄까. 양파처럼 단맛을 가졌지만 뭔가 비릿하고 감자처럼 부드럽지만 질긴 섬유질이 느껴졌다. 

     엄마는 아마도 채소를 많이 먹여야 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카레를 끓였던 걸까. 

     어린 시절은 당근을 피해 다니느라 에너지를 쏟았다. 숟가락을 요리조리 옮기며 당근을 피해 카레와 감자와 양파(그렇다고 양파를 썩 좋아한 것도 아니지만 양파와 당근 둘 다 피하기에는 엄마의 날 선 눈길을 감당할 수 없었다.)를 밥알과 잘 버무려 입안까지 배송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그렇게 당근은 어린 시절 절대 백해무익한 무미의 식재료였다.


     나이가 들면 입맛도 변한다. 

     생각도 변하고 호불호도 변하고 마음도 변하고 모든 것이 변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변하고 달라지는 것에 두려움을 갖거나 오손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오히려 비어있는 부분이 채워지거나 과한 면이 비워지지 않는 것을 스스로 돌아볼 필요가 있다.

     변화의 한가운데에 당근이 있다.

     

     당근은 너무나 멋진 색감을 가지고 있다. 오렌지 컬러라고 하기에는 좀 더 붉은기가 머물고 깊은 색이다. 노랑과 빨강이 섞여 만들어진 색이지만 그 둘이 가지고 있지 않은 깊은 색감 때문에 당근색이 보여주는 스펙트럼은 넓고 깊다.


     당근은 날것일 때의 식감과 익힌 것일 때의 식감이 사뭇 다르다. 날 것의 당근은 인간이 가진 저작咀嚼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식감이다. 인내심을 가져야만 느낄 수 있는 맛을 가지고 있다. 우물우물 오랜 시간 씹는 과정에서 당근이 가진 단맛과 뿌리 식물이 가진 흙맛이 달큰하게 올라온다. 뚝뚝 끊기는 섬유질은 질기디질겨 씹다 뱉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섬유질이 아니라 소극적이고 유약한 강도를 가지고 있어서 부담스럽지 않다.

     반면 익힌 당근은 어릴 때 만난 당근의 얼굴이 아니다. 적당히 부드럽지만 특유의 식감이 나쁘지 않다. 달큰한 맛은 양파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당근이 변할 리는 없으니 내가 변한 거겠지.


     프랑스에서 당근은 두 가지 메뉴로 많이 접했다.

     하나는 당근 라페라고 부르는 꺄호뜨 하뻬와 익힌 당근 샐러드인 살라드 드 꺄호뜨 퀴트.


     당근을 가늘게 채 썰어 레몬즙, 씨겨자, 올리브오일로 버무린 꺄호뜨 하뻬는 점심 무렵 무릎 위에 큰 냅킨을 펼쳐 바게트와 함께 식사를 하는 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적당하게 식초로 절여진 당근 채는 꼬들꼬들한 식감으로 씹는 즐거움을 배가하고 상큼하고 쌉쌀한 소스는 쫄깃하고 덤덤한 바게트와 잘 어울렸다.

      당근은 도톰하게 납작 썰기를 하고 모난 부분을 둥글게 깎아 물에 데쳐내어 올리브오일과 소금, 허브로 러프하게 버무린 익힌 샐러드는 고기가 주인공인 메뉴에 꽤 매력적인 씬스틸러의 역할을 담당했다. 독특한 식감과 맛과 향이 올리브오일과 잘 어우러져, 고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메인 메뉴 같은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익히든 익히지 않든 둘 다 매력적인 당근.

     당근은 반드시 오일과 함께 요리, 섭취해야 당근이 가진 베타카로틴이라는 성분이 체내에 흡수된다고 들었다. 


      당근 같은 사람이 되고 싶네. 불현듯.

      내가 당근 할 테니 당신은 유기농 냉압착 엑스트라버징 올리브 오일이 되어 주세요.

      나 하나만으로는 흡수가 안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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