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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Apr 29. 2023

그 호칭은 틀렸다.

헨릭 입센 <인형의 집> 감상문

*시작하기에 앞서, 해당 글은 본래 대학교 레포트 제출용 글이었음을 밝힌다. 제출 전 해당 내용을 통째로 다른 내용으로 수정하여 제출하게 되었고, 써놨던 글이 아까워 브런치에 올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 업로드하게 되었다. 해당 본문은 분량이 길어 한 페이지를 삭제, 수정한 글임을 참고하길 바란다.






 ‘종달새’ ‘다람쥐’.

이러한 단어들을 보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과거의 나는 만약 누군가가 나를 이런 단어로 불러준다면, 우선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에 그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생명체로 보인다는 점이 기분이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인형의 집>을 읽은 뒤 그러한 내 생각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요즘 시대는 외모 칭찬조차 실례라고 여겨진다. 초면의 사람을 보고 ‘정말 예쁘시네요.’라고 말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감사한 칭찬이 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을 우선 보며 ‘예쁘다’라는 말로 평가하는 것으로도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종달새’와 ‘다람쥐’ 같은 단어도 누군가에겐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고, 특히 그 호칭들을 매일같이 듣고 살았던 노라에게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인형의 집>을 감상하며 느꼈던 무수한 감정을 글로나마 찬찬히 써보면서, 노라가 매일 들었을 ‘종달새’와 ‘다람쥐’의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한다.    


 나는 우선 이 작품이 발표된 시기가 정말 놀라웠다. 여성 인권 운동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몰랐지만, 이렇게 혁신적인 작품이 1879년에 나왔다니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형의 집>은 요즘 시대에 나와도 손색없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발표 당시 많은 사람이 해당 작품을 ‘매우 부도덕한 작품이며 입센은 가정파괴범’이라고 했다고 한다. 당시 시대상을 생각하면 해당 작품을 발표한 입센의 정신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노라는 변화하는 인물이다. 작품 초반부, 나는 노라를 ‘돈과 쇼핑을 좋아하는 철부지 여자’라고만 생각했다. 노라는 작품 초반부에 남편 헬메르가 하는 ‘종달새’ ‘다람쥐’처럼 본인을 그저 귀여운 애완동물로만 여기는 그의 말에도 전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러한 노라의 모습은 결말 노라의 모습과 극심하게 대비된다. 심지어 노라는 마카롱 하나 먹는 것조차 남편의 허락 없이 먹지 못해 몰래 먹지만, 그러한 기이한 점들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노라 입장에서 남편 헬메르의 그러한 말들과 통제 행위들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그 당시 여성들의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남편의 통제가 익숙했을 그 당시 여성들은 <인형의 집> 속 초반부 노라 그 자체였을 것이고, 해서 나는 읽기에 매우 찜찜했다. 남편 허락 없인 과자 하나조차 멋대로 먹지 못하는데도 그러한 것들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해맑게 말하는 노라의 모습은 지금 나의 시선엔 매우 기이했다.


 “변화” 전 노라는 빌린 돈을 갚기 위해 다양한 부업을 하는 제 모습에 ‘마치 남자가 된 것 같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제 범죄가 헬메르에게 들킬 것을 걱정하며 그의 명예를 위해 죽는 것까지 상상한다. 이렇듯 노라는 중반부까지 그 시대 사회에 흔하게 있던 여성 중 하나였다. 이때까지도 노라는 자신이 그저 헬메르의 인형이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 시대의 사회가 여성을 다루었던 것, 여성에게 주입했던 사상이 그러한 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당시 여성들은 남성의 서명 없이는 돈도 빌리지 못했다는 것 또한 매우 놀라웠다. 노라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돈을 빌려야만 했고, 의아스럽게도 그것은 후반부 헬메르가 강조하는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였다. 이것은 헬메르가 그로그스타드의 편지를 받고 노라의 범죄를 깨달은 후 내뱉는 대사 중 일부에 나타난다.     



‘그걸 내가 말해야 아나?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책임이 아닌가!’     



 노라는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인 남편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 서명을 위조하여 돈을 빌려 그를 내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로 인해 노라는 범죄자가 되어버리고 헬메르는 그녀로 인해 명예가 더럽혀질 위기에 처한다. 입센은 사회가 여성을 기이하게 다루는 구조로 인해 벌어지는 부작용에 대해 명확히 꼬집었다. 그 당시 남성들을 상징하는 헬메르는 ‘아내로서 해야 할 의무’를 강조하지만, 막상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범죄자가 되어버린 아내를 전혀 보호하지도 이해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모순은 곧 그 당시 사회 구조가 지닌 빈틈을 명확히 꿰뚫는다.


 물론, 이런 노라는 결국 후반부 “변화”한다. <인형의 집>의 핵심은 바로 노라라는 인물의 “변화” 그리고 “자각”이다. 이 “변화”는 단순히 ‘여성의 자아 주체 자각’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자아 정체성 자각’으로 확장하여 볼 필요가 있다. 노라는 자신이 인형에 불과했음을 자각하고 스스로 “변화”한다. 주인공의 주체성 자각은 입센의 작품이 띄고 있는 대표적 성향이며, 이를 입센주의라고 형용하기도 한다.


 한편 남편 헬메르는 그 시절 남성을 대표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아내를 귀여운 소유물로 여기며 과자 먹는 것조차 본인의 통제 아래에 두고, 그녀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서명을 위조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본성을 드러내며 험악한 말들을 내뱉는다. 사실 작품을 보며 헬메르의 몇몇 대사가 ‘대체 뭐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여성으로서 보기 안 좋은 것들이 많았는데, 후반부 대사들은 그야말로 그 모든 것들을 응축해놓은 난장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들먹이기도 하고, 경박한 여자라고도 하고, 그녀를 보호하기는커녕 아이들과 멀리 떨어지라고도 하면서, 남이 볼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집에서는 떠나지 말라고 한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장면이었다. <인형의 집>을 보며 제일 충격적인 대사는 아래 문장이었다.     



 ‘자기 아내를 용서했다는 걸 마음속에 품고 있는 건 남자에게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일이지. 자기 아내를 진심으로, 거짓 없이 용서했다는 것 말이야. 그럼으로써 여자는 두 배로 그의 소유물이 되니까.’

    


 그 당시 남성은 여성을 소유물로 여겼고, 해서 여성은 남성의 허락 없이는 돈도 마음대로 빌릴 수 없었다. 입센은 이러한 사회의 허점을 명확히 꼬집으며 그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비극을 <인형의 집>으로 풀어내었다. 크로그스타드가 차용증을 보냈을 땐 자신을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를 ‘용서’한다고 하지만, 노라는 이미 헬메르의 파국적인 대사들로 이미 자신이 인형이었음을 자각한 뒤였다. 헬메르는 노라가 떠날 때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전혀 모르고 그녀가 떠나는 명확한 이유조차 알지 못한다. 어쩌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시대의 남성이라면, 가족을 두고 떠나며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키려 하는 여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 이로 인해 노라가 변한 것은 거듭 강조하지만, ‘여성의 자각’ 뿐만 아니라 ‘인간의 자각’으로도 봐야 한다. 노라는 흔한 그 시대 여성상에서 탈피하여 본인의 길을 찾아 나서는 인물이 되는데 이는 한 인간으로서도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다. 가족을 두고 버린 여자라는 손가락질도 견뎌야 할 것이고, 부유한 남편 옆에 살며 누렸던 각종 혜택 또한 포기해야 할 것이었다. 그럼에도 노라는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고 이는 곧 한 인간이 자신을 가둬두던 어떠한 새장에서 탈출하고 자신의 자유를 위해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장 속에 있으면 물과 먹이, 잠자리까지 포근하고 안락하지만 나의 자유는 없다. 새장 밖을 나가면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지만 나의 자유는 명확하다. 인간은 늘 이러한 딜레마에 휩싸이지만, 우리는 그러한 딜레마에 늘 시달리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를 외쳐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자유는 고작 새장 같은 것이 막을 수 있을 만큼 작고 연약한 주체가 아닐 것이다. 새장에 갇혀 있단 것을 깨달은 인간은 과연 그 안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노라는 자신을 가두고 있던 새장을, 인형의 집을 전혀 모르고 살다가 스스로 자각하여 기꺼이 자유를 선택한다. 이는 곧 인간이라는 지성체 자체가 추구하는 길이기도 하다.     


 이 ‘인간의 자각’은 곧 자아정체감 회복과도 이어진다. 인간의 자아정체감 회복엔  크게 신체를 통한 회복, 역할 변화를 통한 회복이 있는데 나는 역할 변화를 통한  회복에 집중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밑에 커오며 아버지의 ‘딸’보단 ‘인형’ 으로 살면서 수동적인 역할에 익숙하게 살아왔지만, 성인이 되고 난 후부턴 친구들 을 통하여 조금씩 ‘인형’의 역할에서 벗어나려는 잠재력을 키우게 된다. 다만 결혼 하고 난 뒤에는 아내로서의 주체성은 없고 남편 앞에만 서면 본인도 모르게 인형이  되었지만, 우리는 이때 등장한 린데 부인과 랑크의 모습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 다. 노라와는 달리 두 사람의 자율적인 모습은 그녀로 하여금 서서히 인형의 역할 에서 깨우치게 해주고, 본인의 자아를 자각한 뒤 스스로 인형의 집을 탈출하게 만 들어준 ‘자율성’을 생성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미약하게나마 그녀를 자극했던 두  사람이 없었다면 노라가 제 자아를 자각했더라도 쉽사리 헬메르를 떠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요즘 시대에서 여성 인권을 다루는 문제는 늘 화두에 오른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모두의 관심사에 오른 지는 20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늘 이러한 주제에 관심을 주어야 한다. 어느 한 집단의 인권은 곧 인간사에 관련되어 있고 우리의 후대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며, 크게 보자면 인간의 가치와 자유에도 크나큰 무언가를 남길 것이기 때문이다. 여성 인권에 관심이 있었으면서도 페미니즘 작품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었는데, <인형의 집>을 읽으며 180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시각이 존재했음을 깨달아 많이 놀랐고 또 앞으로 우리가 다룰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희망을 느꼈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이 주제에 대해 싸우거나 서로를 헐뜯지만, 19세기에도 이 점에 문제를 느낀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앞으로 이 문제는 계속해서 제기될 것이며 언젠가 분명히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종달새’ ‘다람쥐’ 같은 말들에 전과 같은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러한 불편함이 나를 성숙하게 만드는 대단한 발판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러한 불편함에 더 익숙해지며 유연하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누군가는 ‘종달새’나 ‘다람쥐’ 등등 칭찬 같은 단어도 쉽게 하지 못하는 사회가 진정 좋은 것이냐 묻겠지만, 그로 인해 불쾌함을 느끼는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결단코 이 사회 속 칭찬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어설피 넘어가서는 안 된다. 지금도 ‘인형의 집’에 묶인 채 본인이 인형인 것도 모르고 살고 있을 수많은 노라를 위해서라도.               



*참고 문헌*

저자 강수미. 『인형의 집』에 나타난 노라의 자아정체감 회복 과정 분석.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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