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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Jan 05. 2022

난시의 세상


<산드로 보티첼리, 봄>


-사랑에 빠진 이는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안대를 쓴 큐피드는 그런 의미에서 탄생되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 또렷하게 무언가를 직시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단순히 앞의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1차원적인 눈앞의 시야를 떠나 무언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는 정신적인 의미까지 나아가며 그 중요함을 전달한다.






 약 반년만에 찾은 영화관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외화 영화를 봤고, 오랜만의 혼영에 굳이 열심히 꾸미고 나오기까지 했다. 그러나 나는 영화가 시작한 첫 장면부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끝까지, 단 한순간도 집중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순히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막은 보였으나 내 시야각을 꽉 채운 주인공들의 커다란 얼굴 속,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의 줄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넓은 스크린 속 주인공이 운다. 나는 보지 못한다.

넓은 스크린 속 주인공이 웃는다. 나는 보지 못한다.

넓은 스크린 속 주인공이 싸운다. 나는 보지 못한다.

넓은 스크린 속 두 주인공이 키스한다. 나는 보지 못한다.



 주인공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구나,라고 어림짐작하듯 자막과 소리를 눈앞의 뿌연 잔상에 맞출 수밖에 없던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보다 말고 답답함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앞으로 고갤 내밀었다. 흐릿한 이목구비는 아주 살짝, 그 찰나에만 선명해질 뿐 5초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눈이 설마 더 나빠진 건가.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나는 찝찝한 마음으로 영화관을 나왔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렌즈를 끼지 않은 눈으로 렌즈 판매점으로 향했다. 아주 오랜만에 '맨 눈'으로 나온 탓에 모든 것이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 아니라 검은 머리, 가지각색의 몸뚱이, 두 개의 다리로만, 마치 곤충처럼 흐릿흐릿 내 눈을 강타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힘겹게 횡단보도 건너편의 초록불을 얼핏 보고 사람들을 따라 길을 건넜다. 곤충이 되어버린 주변 인간들의 무리에 섞여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내디뎠다. 늘 걸었던 길은 마치 완전히 처음 온 정글이라도 된 듯 곳곳에 위협적인 것들로만 가득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로 엄청난 불편함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는 게을러도 책만큼은 성실하게 읽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나는 꽤 어린 나이부터 안경을 써왔었다. 거기다 급진적인 현대 기술의 발달로 도입된 스마트폰의 출현에 그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졌다. 렌즈를 벗고 뚱뚱한 안경을 쓴 집안에서의 나는, 거울을 보다가도 혼자 킥킥 웃으며 웃기는 사진을 찍고는 했다.

 그런 내가 설마 더 시력이 안 좋아진 걸까. 조금은 불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렌즈 판매점으로 간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시력 측정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렌즈를 샀던 게 고작 3달 전이다. 그때 검사한 시력보다도 더 안 좋아진 것은 분명하니 시력 측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던 상황이었다.



"저희 가게는 시력 측정을 한 번으로 끝내지 않고 세 번은 해요."



 주름살로 두 눈이 축 처진 인자한 인상의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대로 다른 안경점과는 달리 눈앞의 기구에 턱을 올려놓은 채 낙하산을 세 번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아야만 했다. 내 시력을 측정해준 직원은 이곳에 취직하지 얼마 안 된 듯, 세 장의 검사지를 두고 사장님과 꽤 오랫동안 토의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듣지 않는 척 무던히 애쓰며 괜히 가게 속 렌즈들을 구경했지만 점점 길어지는 토의 시간에 손끝에 땀이 어렸다. 꽤 긴 토의 시간 후 내가 듣게 된 결과는 이렇다.



"난시가 꽤 심하시네요. 난시가 있으신데도 여태까지는 그냥 일반 근시 렌즈를 껴서, 그래서 먼 거리에 있는 게 늘 뿌옇게 보였던 거예요. 난시용 렌즈를 새로 구매하시는 게 제일 좋을 겁니다."



 난시용 렌즈, 라는 것을 나는 그날 처음 들었다. 어릴 때부터 안경 대신 컬러렌즈를 껴왔던 내게 렌즈란 그저, 난시용이든 근시용이든 그저 컬러렌즈, 라는 개념만이 머릿속에 깊숙이 처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미지의 문장들을 귀담아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력이 나쁜 줄은 알았지만 난시일 줄이야. 난시는 단순히 시력이 안 좋은 것을 떠나 사물의 초점을 제대로 잡을 수 없어, 그 사물이 마치 두 개로 겹쳐 보이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맨 눈'의 나는 모든 세상이 모자이크 처리된 것처럼 빛 번짐이 매우 심했었다.



"이게 난시용 렌즈입니다. 우선 투명 렌즈로 테스트를 한번 해보죠. 시간 괜찮으시면 지금 한번 껴보시겠어요?"



 친절하신 사장님께서는 흔쾌히 일회용 렌즈 두 개를 내게 내밀었고,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생애 처음 난시용 렌즈를 만졌다. 일반 투명 렌즈는 컬러렌즈보다도 훨씬 두께가 얇아 손가락에 얹기조차 힘들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컬러렌즈보다도 약 두 배는 더 두꺼워 다른 의미로 손가락에 얹기가 힘들었다. 힘겹게 검은 자 위로 그것을 끼우자마자 나는 눈을 한번 깜빡이며 가게 내부를 쓱 둘러봤다. 낡은 필터를 써오던 로봇이 최신용 필터를 눈에 씌운 듯, 내가 여태 봐오던 세상과는 정 다른 모습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멀리 있는 작은 글씨까지 선명히 보이시죠? 그게 바로 정상적인 렌즈를 끼웠을 때 시력인데, 여태까지 근시용만 쓰시느라 늘 뿌옇게만 보셨던 거죠."



 나는 사장님에게 지난 영화관에서의 일을 말했다. 영화를 보러 갔는데 자막은 얼핏 보이지만, 주인공들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아 매우 당황스러웠다고. 그래서 시력이 더 나빠진 듯한 불안감에 부리나케 온 것이라고. 사장님은 내 말에 모두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는 훨씬 더 세상이 쾌적하게 보일 것이라 말했다.


말씀하신 그대로 전엔 지나치게 멀리 있는 글씨는 뿌옇게 두 개로 빛이 번져 제대로 보이지 않아 늘 눈살을 찌푸려야만 했는데 이제는 전혀 그러지 않았다. 거리의 가로등의 빛 번짐도 전혀 없고 아무리 먼 거리라도 또렷하게 실체가 보였다. 그야말로 내게는 신세계였다. 어릴 때부터 난시용이든 근시용이든 그저 시력만 맞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무지에 맞게, 나는 지난날 정 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가 다시 시력을 얻은 것처럼 완전히 다르게 펼쳐지는 세상의 공기에 매우 낯설면서도 편안했다.


 만족스럽게 난시용 렌즈를 구입하고 나는 가게를 나왔다. 난시인 내 눈에 제대로 된 렌즈가 끼워지고, 드디어 나는 비로소 제대로 남들 보는 것처럼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무리 먼 거리라도 또렷이 물체가 보이고 더 이상의 빛 번짐은 없다. 그것이 너무나도 신기하여 나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저 먼 거리의 롯데타워 꼭대기를 들여다보았고, 하늘을 찌를 것처럼 우중충하게 솟아오른 수 십 개의 가로수 가지들을 쳐다보았고, 멀리 걸어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전에 없이 또렷하고 선명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렌즈를 빼면, 다시금 전과 같은 뿌연 세상이 펼쳐졌다. 다시금 인간은 곤충으로 되어 뿌연 잔상만을 보이고 20cm 앞의 글자조차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내 눈의 실체였다.


 난시용 렌즈를 사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

새로운 필터를 끼움으로써, 비로소 나에게 맞는 최신용 필터를 끼움으로써 제대로 세상을 남들처럼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난시인 내 눈으로 이 세상을 보는 것도 남들은 쉽게 겪을 수 없는 '또 다른 세상'의 얼굴이란 것이다.


 안경과 렌즈를 모두 빼고 난시로 이 세상을 보면 마치, 지구를 모방한 발칙한 안개의 몸뚱이에 휩싸인 듯 몽롱해진다. 그 시선으로 앞을 보면 모든 것은 잔상이 되어 흐릿하게 문드러지고, 거울 속 내 얼굴조차 눈살을 찌푸리지 않으면 눈코 입도 보이지 않는다. 그로 하여금 내 눈에 싸인 렌즈와 안경이라는 이 최신용 필터가 사회와의 유일한 연결점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사랑에 빠진 이들의 시선도 내 눈과 같을까.

사랑에 빠지면 판단력이 흐려지고 이성은 무뎌진다. 또렷한 눈은 난시가 되고, 평온했던 정신은 허무하게 무너진다. 이 사람은 안 된다는 머리와는 달리 심장은 정 다르게 몸을 움직이게 하며 기어코 한 인간을 사랑의 함정에 빠지게 만들곤 한다. 그것이 그 인간을 자살로 몰고 갈 만큼 엄청난 함정이든, 마음속 깊이 남아 피가 철철 흘러넘치게 만드는 상처든, 상관없이.


 그 언젠가 나 역시 사랑에 빠졌을 때 그랬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능숙히 내 곁에 다가왔던 그 사람은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으며 앞으로의 미래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시간이 갈수록 사라져 갔고, 마침내 다른 누군가에게까지 시선을 빼앗기며 수없이 많은 날카로운 상처를 내 가슴에 남기기도 했었다. 그 모든 순간 하나하나를 떠올리면 나는 여전히 그가 내 심장에 피뢰침을 내리꽂는 기분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그때 안대 쓴 눈으로 차마 그의 손을 거절하지 못했었다. 나를 두고 다른 누군가와 '바람피웠던' 그 사람의 연락을 차마 거절하지 못했고, 처음처럼 다시금 빛나는 미래를 간절히 호소하는 그에게 냉철하지 못했다. 나는 그때 안대 쓴 큐티드 그 자체였던 것 같다. 머리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렷이 눈앞에 보이는 진실을 마주하지 못하고 흐린 눈을 한 채 심장이 시키는 대로 따랐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마지막 모습까지 난시의 눈으로 맞이했었다.

또렷한  없이, 흐릿한 덩치의 무기물로만 보이는 안갯속 세상의  남자를 배웅했고, 안았으며, 다시는 한눈팔지 말라며 귀여운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남자의 얼굴과 이목구비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말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던 그날 아침, 난시의 눈으로  남자의 표정과 그리웠던 맨몸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그날 아침, 나는 왠지 렌즈를 끼지 않았다. 만약 또렷한 시선으로 선명한 선을 보이고 있는 그를 봤다면, 나를 버리고 갔던 그를 직시했다면, 나는 그제야 지레 겁먹으며  머릿속 판단을 따랐을까. 흐릿한 잔상과 흐릿한 미소를 끝으로 다시는 그를   없었다.



난시의 눈은, 그렇다.



 모든 사물을 또렷하게 볼 순 없으나 늘 몽상가의 시점이 되어 이 세상의 다른 얼굴을 본다는 것. 똑같이 먹고 똑같이 걷던 이 거리와 주변 풍경 모두가 다른 차원의 형이상학적 색채의 무기물로만 보여, 나는 이 속에서 그저 부유하는 또 다른 의미 없는 무기물 중 하나로만 느껴진다는 것.


 난시인 내 세상에서, 또렷한 선 없이 허공을 부유하는 듯 보이는 색채로 뭉뚱그려진 무기물들은, 그것을 보는 나까지도 의미 없는 무기물의 존재로 인식하게 한다. 정신없고 바쁘디 바쁜 이 세상에서 아주 잠시나마 휴식을 제안하고 그저 이 속에서 멍하니 부유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무언가를 굳이 또렷하게 관찰하려 하지 말고, 그 형체와 색채를 느끼며, 인간이 곤충이 되든 내 얼굴이 먼지가 되든, 오히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느낄 수 있게 하는 아주 손쉬운 방법을 난시는 제안한다.


그런 나의 눈이 고맙다고 나는 오늘 생각했다. 불편하고 한없이 뿌옇지만 늘 이 안개를 선사해줘서 고맙다고. 다른 이는 절대 낄 수 없는 이 '난시' 필터를, 안경원이나 렌즈 판매점에서는 절대 살 수 없는 이 '난시' 필터를, 내가 가지고 있어 고맙다고 말이다.


심지어 그것이 사랑에 관한 것일 지라도, 결국은 내가 감내하고야 말게 만드는 나의 난시가 나는 좋다. 그게 바로 나니까.


오늘도 나는 렌즈를 끼고 사회로 나아간다.

집에 오면 늘 그랬듯, 난시인 눈으로 색채의 안개가 된 내 방을 보며 사색에 잠길 것이다. 잠시나마 이름 없는 몽상가를 따라 하며 나는, 이 안갯속에서 의미 없는 부유물이 되어 영감의 파도로 몸을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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