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수아 에두아르 피코, 에로스와 프시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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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연애를 쉰 지 약 2년이 넘었다.
그동안 그래도 흔히 말하는 '썸'이라는 관계는 드문드문 있었다. 호감 있는 남자와 연락을 나누고, 그와 영화를 보고, 술을 마시고, 서로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의 관계를 암묵적으로 함께 도모했었다. 그러나 2년간 끝내 연애로까지 이어진 이는 없었고 그 결과 나는 어쩌다 2년 간 이성과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 채 내 20대 초반을 보냈다. 나중엔 분명 지난 2년을 후회할 것 같다. 그 파릇파릇한 청춘의 나이에,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채 2년을 보냈으니, 그 어린 나이에서만 할 수 있는 푸른 사랑을 나누지 못한 것에 관한 후회 말이다.
사랑과 외로움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그 2년 간 나는 이러한 질문을 스스로 끝없이 해왔다. 내가 지금 공허함을 느끼며 대화를 하고픈 누군가를 찾는 것, 내 가치관을 들려주며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고픈 누군가를 찾고픈 이 욕망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연애를 쉬면 유독 그러한 욕망을 자주 느꼈다.
이 욕망은, 그러니까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는, 신기하게도 친구들에게서는 쉽게 해소가 되지 못했다. 내 인간관계는 마치 송곳 같아서 한없이 깊고 좁다. 중학생 혹은 고등학생 때부터 나를 알았기에 내 가치관은 물론 연애를 옆에서 직접 봐왔던 친구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 욕망은 늘 낯선 누군가를 향해 발휘되었다. 왜 하필 연애를 쉴 때마다 이러한 욕망이 들끓는지는 이 글을 읽는 당신조차 알 수 있을 것이다. 외로움, 그 하나뿐일 것이다.
그냥 자기 허전한 밤. 누군가와 깊은 대화를 나누다 기절하듯 자고픈 밤. 낯선 이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공감하고 내 이야기를 꺼내다 잠에 들고픈 밤. 밤과 새벽이란 인간의 감정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드는 고요한 시간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욕망은 보통 낮이 아닌 밤에 출몰되고는 한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이란 먼저 강조하건대, 단순히 이성과의 육체적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와의 깊은 대화, 오직 사랑의 감정에서 발현되어 나오는 대화에 대한 욕망만을 뜻한다.
나는 그러한 밤을 수없이 보내왔다. 그러나 그 원인만은 늘 불분명했다. 내가 왜 늘 그러한 욕망을 가진 채 공허함을 느끼는지, 왜 그러한 밤의 횟수는 점점 많아지는지, 왜 이리도 누군가와의 대화가 간절한지에 대한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나는 이 글을 작성함으로써 조금이나마 '깊은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에 대한 내 욕망의 원인을 스스로 조금이라도 예측해보려고 한다.
사랑. 발음만 해도 혀끝이 간지럽고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이 간지러워지는 단어이다.
인간은 사랑을 함으로써 스스로 존재함을 느끼고 살아있음을 실감한다. 사랑은 심지어 인간의 파멸까지 가져다주고, 자해까지 하게 하지만 사랑이 없는 세상이라면 인간은 그 어떤 재미로 인생을 살아갈까.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로 인해 상처받는 것이 인생의 반복이지만, 그로 인해 외피는 단단해지고 인간을 보는 안목마저 성장한다.
이것으로 볼 때 나는 인간에게 사랑이란 그 무엇보다 진귀하고 소중한 감정이라 생각한다.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이라는 동물에게 사랑이라는 이성의 감정은 굳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종족 번식을 위해서라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처럼 사랑 없는, 그저 성관계만이 존재하는 번식을 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남기기 위한 본능에, 사랑은 절대 필요 없는 부가적 가치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이성을 사랑하고 또 사랑에 고통받는다. 자연이 우리에게 이 쓸모없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준 이유는 무엇일까.
한낱 미개한 인간 중 하나인 나로서 자연의 생각을 읽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인간은 사랑을 통해 성장하고 고통받으며 그로 인해 살아있음을 느낀다는 것이다. 내가 떡볶이를 좋아하는 것, 내가 키우는 고양이를 좋아하는 것, 글쓰기를 좋아하는 것 모두 수많은 사랑의 형태 중 하나이다. 이 지구에서 사랑을 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고로 우리 모두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완전히 지배된 채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중에서도 유독 이성을 향한 사랑의 힘이 제일 거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해보건대 이성을 향한 사랑이 곧 종족 번식의 본능을 충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지구 상 모든 인간들의 사랑이 육체적인 쾌감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어딘가엔 육체적 관계를 하지 않고 플라토닉 사랑을 하는 인간들도 존재할 것이고, 그것은 충분히 존중받아 마땅한 그들만의 가치관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앞선 주장에 대한 반박이 생긴다.
육체적 관계를 요구하지 않는 플라토닉 러브를 실행하는 인간들은, 자손 번식이라는 본능을 거스른 돌연변이라는 것인가? 아마 이것은 그들의 우직한 가치관이 자손 번식이라는 본능적 가치보다 더욱 또렷하기 때문에 그들 나름대로 판단을 한 것이 바로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고, 그런 그들에게 번식의 본능은 크게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러한 그들이 여전히 신비롭고 대단하게 느껴진다. 자손 번식이라는 본능을 스스로 다스려 다른 가치를 찾아 자리 잡은, 인간이기 이전에 하나의 동물로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한 그들이 대단했다.
이렇듯 이성을 향한 사랑의 힘은 유독 다른 사랑의 그것보다 거대하다. 내가 아무리 떡볶이를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하는 이성 앞의 그것보다는 비교도 되지 않게 덜할 것이다. 그러나 그만큼 거대하고 힘이 세기에 그 사랑의 부재는 다른 것보다 더욱 고통스럽게 다가오기도 한다.
이성을 만나지 않을 때, 혹은 못할 때. 외로움이나 공허함이란 감정은 인간을 강타하고 심지어 자존감까지 깎아내리기에 이른다. 나는 이것이 특히 연애에 실패했을 때, 그리고 만나던 누군가와 연애라는 관계까지 발전시키지 못했을 때 심했었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 없는 존재인가?
나는 여자로서 매력이 없는 것인가?
진정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는 존재할까?
이러한 자괴감은 곧 누군가의 비교까지 이어지는데 나와는 완벽히 다른 상황의 동성을 보며 스스로 낮추는 것이다. 이러한 자해는 곧 사랑의 부재에서 온다.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인간들이 이러한 사랑의 부재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으며, 이는 애정결핍 환자가 아니더라도 많은 인간이 겪는 공통적인 고통이다.
이성으로부터 안정적인 사랑을 받지 못하여 나 자신에게 갖는 원망. 나 자신에 대한 증오.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달콤한 말로 인해 탄생하는 고통이라는 것이다. 이를 볼 때 인간은 말 그대로 사랑에 지배되어 사는 것이 맞다. 어쩌면 인간에게 제일 막강한 신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감정의 영향이 피부로 느껴지고, 한 인간을 파멸까지 다다르게 할 수도 있으며, 그와 동시에 기적을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니까.
인간은 사랑의 부재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죽을 때까지 나를 사랑하는 이성이 한 명도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상해보자. 그 인생은 과연 아름다울 수 있을까. 사람마다 아름다움의 가치와 기준은 다르지만, 이성으로부터 받는 사랑이란 곧 자손 번식의 본능적 욕구에 직접적으로 다다르기에 인간에게 절대 떼어낼 수 없는 족쇄와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제아무리 독신주의자여도 평생 이성의 사랑 없이 살기란 힘겨울 것이라 나는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물론, 이성의 사랑과 연애 따위 없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사는 이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힘겨울 것이라 추측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성의 사랑'이란 흔히 원나잇이라고도 말하는 찰나의 육체적 욕구도 포함한다. 육체적 욕구로 이루어지는 성관계 또한 그 이성의 육체에 끌리고 도취되어 아주 빠르게 사랑에 빠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사랑의 방향이 그 이성의 존재 자체가 아닌 육체, 그뿐이어도 말이다.
나는 사랑이라는 낭만적인 단어를 믿는다. 운명적인 만남과 로맨틱하다는 단어에 끌리는 편이고, 어쩌면 그렇기에 외로움과 공허함을 자주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공허함은 육체적 관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아무리 육체적 쾌락을 느낀다고 해도, 절대 이 감정들을 풀어낼 수 없다. 목이 마를 때 탄산음료를 마시면 더더욱 물을 찾게 되듯 공허함을 느낄 때 가벼운 육체적 관계는 오히려 더욱 간절한 사랑을 요구한다. 우리는 목이 마를 때 물을 찾아야 한다. 가벼운 육체적 관계라는 탄산음료가 아닌, 사랑이라는 물을. 이성과 나누고픈 사랑이라는 애틋한 감정을 단순히 육체적 관계의 욕망으로 오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처음엔 단순하고 짜릿하겠지만, 분명 그 부작용은 치명적일 것이다. 더욱 목마르고 더욱 공허해질 것이다. 사랑에 대한 욕망과 성관계를 하고픈 욕망은 엄연히 다르다. 우리는 이것을 철저히 분리시킬줄 알아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외로움과 공허함을 쉽게 표현하기 부끄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특히 이성에 관한 사랑이라면 더욱 그렇다. 한때는 이 감정이 혹시나 충족되지 못한 또 다른 내 욕망의 잘못된 발현이 아닐까, 생각했다. 돈을 더 벌고 싶은 욕망.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픈 욕망. 이러한 욕망이, 사랑에 대한 외로움이라는 감정으로 잘못 분출되어 나 스스로 오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홀로 고찰한 적도 매우 많았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나날 속 내뱉은 결과는 역시나 사랑의 부재였다. 어쩌면 나는 다른 인간들보다도 유독 더 외로움을 타는 것일 수도 있다. 아니, 그런 것 같다. 혼자가 편하면서도 혼자가 외로웠으니 말이다. 어쩌면 자존감이 낮아서일 수도 있다. 자존감이 낮기 때문에 더더욱 사랑을 원하고, 낭만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굴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스스로 개척해나가야 할 숙제이다. 끝없이 외로움과 정면 싸움하며 사색해야만 한다. 이 감정의 원인과 이 감정을 충분히 이겨낼 수 있는 방향을 언제나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을 느끼고 음미하는 것 역시 충분히 좋은 행위이다. 외로움으로 인해 자존감을 깎아내리고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 그 자체를 음미하며 혼자이기에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것 말이다.
인류에게 사랑이란 아주 냉철한 양날의 검이다. 사랑은 눈물 어린 기적을 불러일으키기도, 처절한 파멸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렇기에 더더욱 사랑 그 자체에 갈증을 느끼는 것일지 모른다. 파멸이든 기적이든, 사랑으로 인해 파생되는 모든 감정이 인간의 뇌를 쑤시는 짜릿한 자극들이니 말이다.
사랑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느끼자. 그로 인해 나를 돌아보고, 나를 사랑하자.
우리는 오늘날 이러한 외로움과 공허함을 숨기지 말고 맘껏 표출하며 이 감정을 즐겨야 한다. 이렇게 외로움을 느끼는 나를 고찰하며 글을 쓰는 것 또한, 외로움을 음미하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인 것처럼.
사랑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당당히 홀로 고찰하며 외로움을 음미하고 즐길 줄 알아야만 한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끝이 없어 자괴감과 공허함이란 수많은 감정들을 잉태한다. 그전에, 우리는 외로움에 홀로 맞서 싸우는 것을 배우고 표출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랑의 부재로 인한 외로움과 부정적인 감정들은 오로지 인간이기에 느낄 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