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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Feb 01. 2022

전쟁 속에서도 피어나는 사랑과 헌신

<아킬레우스의 노래>를 읽고 난 후.



<파트로클로스  밑에 헥토르의 시신을 내려놓는 아킬레우스, 조제프 브누아 쉬베>






아주 오랜만에 읽은 로맨스 소설이었다.

500페이지 분량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하루 만에 읽은 장편 소설이었다.

또한 처음으로 이만큼 울며 읽은 소설이기도 하다.


 나는 로맨스 소설에 관한 약간의 편견이 있다. 필자가 비록 로맨스 웹소설을 쓰며 이걸로 돈을 벌어 살고는 있지만, 왠지 모르게 웹소설이 아닌 소설, 그러니까 책으로 펴낸 로맨스 소설에 관한 잣대는 쓸데없이 높아서 큰 뜻이나 대단한 무언가는 없겠거니 하며 읽어오곤 했었다. 웹소설은 가볍게 읽어도 좋고 유치해도 좋지만, 책 소설은 어딘가 큰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읽은 '책' 로맨스 소설은 고등학생 때였다. 그때 읽었던 책이 예상했던 것보다 유치했어서, 그때 이후로 편견이 생겼고 로맨스 소설은 웬만하면 피해왔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읽은 로맨스 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달랐다. 나는 하루 만에 홀린 듯 6시간 동안 집중하여 책을 모두 읽어버렸고, 너무나도 여운이 남는 결말에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그리스 신화 속 유명한 영웅 아킬레우스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책은 트로이 전쟁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과의 불화로 인해 전쟁을 불참한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이자 연인 파트로 클로스가 자신의 갑옷을 입고 헥토르에게 죽었다는 것을 깨닫자, 엄청난 분노에 바로 전쟁에 참여하여 친구의 죽음을 복수했다.


 <일리아스>에서 파트로클로스의 분량은 적다고 한다. 파트로클로스가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 아니라서, 호메로스가 둘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묘사한 것도 아니라서, 책의 저자는 그런 둘의 사이에 호기심이 생겼다고 한다.


 도대체 무슨 사이이고 얼마나 애틋한 관계이기에 그리 뚝심 있는 영웅이 이성을 잃고 심지어 시신까지 훼손해가며 친구의 복수를 감행한 건지. 친구의 시신을 보고 땅바닥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던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이 소설은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우스의 어릴 적 모습부터 함께한 모습들을 상상하여 소설로 각색한 책이다.


<일리아스>에선 둘이 그저 둘도 없는 친구 관계였다고 했지만, 후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로는 친구 그 이상의 관계였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둘의 사랑을 다룬다.




 


1.


 필자는 어쩌면 둘의 관계가 동성애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의 호기심을 샀고 이 책까지 탄생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보자.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내 00가 헥토르에게 죽임 당했다는 것을 듣고 분개하여 전쟁에 참여했다.' 보다는,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친구이자 연인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임 당했다는 것을 듣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라는 말이 더욱 호기심 가지 않는가. 여성과 남성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이미 여태 많은 희곡과 신화 속에서 다루고 다뤄왔으나, 두 남성의 사랑 이야기는 이토록 애틋하게 다루어진 적 없다. 이 책의 저자는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고 이 책을 산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 책을 단순히 동성애라는 선입견에 휩싸인 눈으로 보지는 말길 바란다. 자신의 왕국에서 추방당한 파트로클로스는 아버지로부터 제대로 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 시대 남성들처럼 거칠고 싸움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왕자 파트로클로스는 한없이 선했고 거짓말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런 아들을 한심하게 보았던 왕은 심지어 제 아들이 실수로 누군가를 죽였을 때조차 거짓말하지 못하고 '내가 죽였어요'라며 실토하는 왕자를 보며 '그것을 기어코 말하고 마는구나'하는 한심한 얼굴로 보았다고 서술한다. 그렇게 비운의 왕자이자 아들 파트로클로스는 쫓겨났고, 친척의 왕국으로 보내진다. 바로 그곳에 어린 왕자 아킬레우스가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신화에서처럼 아주 완벽한 존재로 그려졌다. 흔치 않은 눈부신 금발과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 거기다 반인반수답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창술. 어린 파트로클로스는 처음엔 그런 그에게 질투하며 '왕자는 저래야지'라고 자신에게 속삭이는 듯한 아버지의 말까지 들었다. 처음엔 그랬으나 늘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인기 많은 왕자님 아킬레우스가 먼저 늘 혼자 있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다가갔고, 둘은 그때부터 빠르게 친해지며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둘이 친구 사이 그 이상의 감정을 느낀 것은 2차 성징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는 사실이다.


약 열두 살부터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고, 그것을 아킬레우스 역시 느낀다. 단순히 둘의 사랑이 '2차 성징으로부터 파생되는 끓어오르는 성욕'으로 인한 착각이 아니라는 뜻이다.




2.


 후에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인 테티스, 어머니로부터 예언을 듣게 된다. 그리고 두 운명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보잘것없는 삶이지만 연명할 것인가, 명예로운 이름이 되어 단명할 것인가.


아킬레우스는 별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하고 그로 인해 그는 트로이 전쟁에서 죽을 것이란 예언을 듣는다. 특히 인상 깊었던 또 다른 예언이 있었는데, 트로이의 왕자이자 총사령관 헥토르가 죽으면 얼마 못가 자신도 죽을 것이란 것이다. 그 말은 즉 헥토르가 살아있는 동안은 아킬레우스 역시 살아있을 것이란 뜻이 된다. 그래서 파트로클로스는 헥토르가 10여 년 간의 긴 전쟁 속 살아있다는 것에 늘 안도했고 언제 다가올지 모를 연인 아킬레우스의 죽음을 곧 헥토르의 죽음에 연결하여 보기도 했다.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과의 불화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강제로 데려간 것은 곧 자신을 욕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간청하여 말한다. 그리스 군이 연패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테티스는 그것을 제우스에게 간청하고, 그 탓에 트로이 군은 연승하며 그리스 군의 진영 코앞까지 다다른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킬레우스는 전쟁에 불참하겠단 뜻을 밝힌다. 아가멤논이 자신의 앞에 빌며 사과하기 전까지는 전혀 나갈 생각이 없다고 말이다. 이 대목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제 연인을 걱정한다. 이 상황을 끝까지 거부하고 모르는 척한다면, 아킬레우스의 명예는 곤두박질 칠 거라고. 사람들은 뒤늦게 아킬레우스가 참여한다 해도, '왜 이제야'라는 생각에 오히려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욕할 것이라 생각한다.


 아군의 전함은 헥토르로 인해 불타올랐고 그때까지도 사람들은 나서지 않는, 세기의 영웅 아킬레우스를 보며 울부짖을 것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연인으로서 그런 그에게 무릎 꿇고 빈다.


네가 나서야 네 명예가 회복될 것이라고. 그리고, 너와 아가멤논의 자존심 싸움으로 도대체 몇 명이 목숨을 잃는 것이냐고.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그때까지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많은 독자들은 이 대목에서 아킬레우스를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3.


 아킬레우스는 제 손으로 단명의 운명을 택했다. 그 대신 자신의 이름이 명예스럽게 역사에 남는다는 것을 알았고, 오직 그것을 위해 단명의 삶을 택한다. 그런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연인 파트로클로스와 점점 다가오는 죽음, 빛나는 명예 그뿐이다. 그런 아킬레우스에게 명예란 기필코 가져야 하는 것이고 가져야만 하는 자신의 운명이다.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 자신을 대놓고 욕보인 아가멤논 왕. 그로 인해 떨어진 자신의 명예. 아킬레우스는 그에 집착하며, 제 명예를 훼손한 아가멤논의 군인들이 죽는 것을 모른 척한다. 이것은 그에게 남은 것이 명예와 연인 파트로클로스밖에 없어서일 것이다. 그는 제 손으로 단명의 삶을, 그 대신 보장되는 명예로운 이름값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유독 명예에 집착하는 것은 크나큰 충격이 아니다. 나는 그런 아킬레우스가 이해되었다.


 제 죽음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남은 것은 얼마 남지 않은 죽음 직전까지 제 명예를 올리는 것뿐인데, 그것을 바로 아가멤논이 욕보였으니 얼마나 분개했겠는가. 끝까지 전장에 나서기를 거부했던 그가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티를 내진 않았으나 세기의 영웅조차 다가오는 죽음 앞에서 혼란스러워했을진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4.


 파트로클로스는 보다 못해 결국 자신이 직접 전장에 나가겠다고 아킬레우스에게 말한다. 파트로클로스는 더 이상 그의 명예가 떨어지는 것을,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받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당신의 갑옷을 입고 당신인 척을 해서라도 자신이 나가겠다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너무 위험하다며 그를 걱정하는 마음에 반대했지만, 애절한 파트로클로스의 부탁에 결국 마지못해 제 갑옷을 손수 입혔다.


 그러나 한 가지 당부를 한다.

절대 적을 쫓아가지 말라. 후퇴하는 적을 쫓아가지 말라.


 그렇게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입맞춤을 끝으로 전장에 나선다. 트로이 군은 끝내 나타난 아킬레우스의 모습에 기겁하며 도망가고, 아군은 '아킬레우스가 왔다!'며 환호하여 사기를 되찾는다. 그렇게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된다.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인 척 그의 갑옷을 입은 채 어설피 창을 던지고 트로이 군을 쫓아낸다.


 그러나 이 책에서 파트로클로스는 싸움엔 전혀 소질이 없다고 나온다. 피나 시신을 보면 구역질을 했고 창술에도 큰 소질이 없었으며 겁도 많은 편이었다. 그랬기에 늘 진영에서 전쟁을 마치고 온 아킬레우스를 맞이하며 대신 켄타우로스 스승 케이론으로부터 배운 의술로 수많은 병사들을 치료해주었다. 그런 그가, 오직 아킬레우스를 위해 직접 전장에 나가겠다고 말했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싸움엔 소질도 없고 잘하지도 못한다. 겁도 많다. 그런 그가, 무릎 꿇은 채 내가 직접 나가겠다고 말하는 그때의 심정 말이다.


 파트로클로스는 제 갑옷을 보고 줄행랑치는 트로이 군을 보고 그만 아킬레우스의 조언을 잊는다. 그들을 쫓아가고 쫓아간다. 그러다 마침내 헥토르의 창에 맞는다. 그가 죽기 전 떠올렸던 것은 아킬레우스다.



창끝이 깊숙이 꽂히자 불에 덴 듯한 엄청난 고통에 숨이 멎고 단말마의 여울이 온몸으로 폭발한다. 내 머리가 바닥으로 다시 떨어지고 내가 마지막으로 목격하는 것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냄비를 젓듯 내 몸에 꽂힌 창을 돌리는 헥토르다.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킬레우스다.



 5.


나는 이 대목에서 궁금했다. 책에선 처음부터 쭉 1인칭 파트로클로스의 시점이었는데, 그가 죽었으니 이제는 어떻게 시점을 변경할까, 라는 것 말이다.


웹소설을 쓰는 나라면 당연히 3인칭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예상했다. 그러나 그것을 뒤엎듯 저자는 끝까지 1인칭 파트로클로스의 시점을 끌고 간다. 그가 시체가 되어도, 그를 혼령 상태로 표현하며 꾸준히 '나'라는 표현을 썼다.


덕분에 3인칭으로는 전할 수 없는, 죽은 이후 파트로클로스의 심정과 자신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울부짖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마음이 절절히 닿을 수 있었다. 필자 역시 작가로서 이 부분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 혼령이 된 파트로클로스는 자신의 시신에 대한 묘사를 덤덤히 한다. 그것을 보며 흐느끼는 제 연인에 대한 묘사도.




그는 칼을 와락 꺼내서 자기 목을 그으려고 한다. 하지만 빈손을 보고 그제야 기억한다. 그는 칼을 나에게 주었다. …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피로 물든 천뿐이다.



그는 고함을 지르며 안틸로코스를 뿌리치고 메넬라오스를 때려눕힌다. 그리고는 시신 위로 쓰러진다. 밀물처럼 밀려온 깨달음이 그의 숨통을 조른다. 비명이 터져 나온다. 한 번, 또 한 번. 그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피투성이 시신 위로 금색 머리카락이 떨어진다. 파트로클로스. 그가 읊조린다. 파트로클로스. 파트로클로스. 그 이름이 의미를 잃고 소리만 남을 때까지 몇 번이고 읊조린다.


 아킬레우스는 흐느낀다. 나를 끌어안고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내 이름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내 눈에는 그의 얼굴이 물속에서 건너편을 바라보는 것처럼, 물고기가 태양을 쳐다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눈물이 떨어지지만 나는 닦을 수 없다. 나는 이제 본바탕만 남아서 아직 땅에 묻히지 못한 혼령의 반쪽짜리 삶을 살고 있다.



그는 흐느끼며 나를 들어서 우리 침대로 옮긴다. 내 시신은 축 늘어진다. 막사 안이 따뜻해서 조만간 냄새가 나기 시작할 것이다. 그는 상관하지 않는 눈치다. 밤새도록 내 차가운 손을 자기 입에 대고 있다.



 저자는 파트로클로스가 죽었음에도 1인칭인 '나'를 놓치지 않는다. 덤덤하게 '나의 시신'이라 하며 아킬레우스를 묘사하는 것에서, 3인칭으론 절대 와닿지 못했을 절절함이 느껴졌다. 이 대목에서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창을 맞아 죽은 후, 아가멤논과의 자존심 싸움으로 눈앞까지 트로이 군이 쳐들어와도 꿈쩍하지 않던 아킬레우스가 마침내 움직인다. 친구의 복수만을 위한 심정으로 갑옷을 입고 오로지 헥토르만을 죽이기 위해 앞장선다. 헥토르를 죽이기 전까진 파트로클로스의 장례조차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그의 시신을 제 침대에 모신다.




< 그는 내가 죽은 이래 처음으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선잠을 잔다.

아킬레우스. 네가 괴로워하는 걸 더 이상 못 보겠어.

그는 팔다리를 씰룩이고 진저리를 친다.

우리 둘 다 이제 편히 쉬자. 나를 태워서 묻어줘. 저승에서 너를 기다릴게. 내가

 하지만 그는 이미 깨어났다. "파트로클로스! 기다려! 나 여기 있어!"

 그는 자기 옆에 누워 있는 시신을 흔든다.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그는 흐느껴 운다. >


< 다음날 그는 나를 안아서 장작더미로 옮긴다. 브리세이스와 미르미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를 그 위에 내려놓고 부싯돌을 친다. 화염이 나를 감싸고 나는 공기 중의 아주 희미한 떨림으로 남을 때까지 생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둡고 적막한 저승으로 어서 빨리 건너가서 쉬고 싶다.


 유골 수습은 여자들이 하는 일인데도 그가 맡는다. 내 유골을 우리 진영에서 가장 고급스러운 황금색 단지에 넣고 돌아서서 지켜보던 그리스 군을 마주한다.


 "내가 죽으면 우리 유골을 한데 모아서 같이 묻어주기 바란다." >



 헥토르를 죽인 후에야 아킬레우스는 잠을 청하고, 여전히 답 없는 제 연인을 보며 흐느끼고 그제야 장례를 준비한다.



6.


 아킬레우스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헥토르만을 쫓고 마침내 그를 향해 창을 던진다. 자신의 목숨을 던진다. 오직 파트로클로스의 복수 때문이다. 그는 이미 어머니의 예언을 들었다. 헥토르가 죽는다면 얼마 못가 아킬레우스 자신 역시 죽을 것이라는 걸. 그러니 살고 싶다면 헥토르를 반대로 절대 죽여선 안된다는 뜻이 되었다.


 그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이 곧 나를 내 손으로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아킬레우스는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필자는 이 대목에서 파트로클로스를 향한 그의 사랑을 보았다. 책은 3인칭이 아닌 파트로클로스 1인칭의 시점이다. 그랬기에 오직 아킬레우스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 그를 향한 파트로클로스의 사랑만 묘사되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필자는 제대로 파트로클로스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사랑을 보았다.


 자신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망설임 없이 죽이는 것. 그 이유는 오직, 헥토르가 제 연인을 죽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조금의 후회도 하지 않는다. 전혀.


 여기서 그가 헥토르에게 던지는 창은 단순 창이 아니다. 자신의 목숨과도 같다. 아킬레우스는 이미 예언을 들었었기 때문이다. 헥토르가 죽으면 얼마 못가 자신 역시 죽을 것이라는 예언을.




7.


 헥토르를 죽임으로써 친구의 복수를 끝낸 아킬레우스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죽은 헥토르의 발 뒤꿈치에 구멍을 뚫어 마차에 묶었고, 헥토르의 시신을 질질 끌며 보란 듯이 트로이 성을 3바퀴 돌았다. 그 모습을 보는 프라이모스 왕과 아내 안드로마케, 동생 파리스의 심정을 생각해보라.

 위대한 영웅 아킬레우스는 제 연인을 떠올리며 헥토르의 시신을 능욕했고 그 짓은 하루로 끝나지 않는다. 13일간 그는 헥토르의 시신을 마차에 묶어 이리저리 끌며 능욕한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앞까지 돌았다고 한다.


 이런 짓은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을 죽인 원수라 해도 상상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친구라면 더더욱.

 그랬기에 그를 향한 아킬레우스의 사랑의 마음이 느껴진다. 사랑을 맹세한 연인을 죽인 원수. 그 원수를 죽인 것도 모자라, 더욱 잔인한 방식으로 시신을 훼손했을 때의 심정. 파트로클로스의 무덤 앞에서 헥토르를 끄는 아킬레우스의 얼굴이 상상 간다. 뜨거운 눈물로 흠뻑 젖은 얼굴로, 비통하게 네 원수를 죽였다며 헥토르를 보이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이 상상된다.


 그 후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동생인 파리스에게 화살을 맞아 죽는다. 정확히 예언대로 헥토르를 죽인지 며칠 흐르지 않은 시점이다. 그러나 아킬레우스는 웃으며 쓰러졌고 그토록 기다렸던 죽음을 맞이한다. 그가 죽기 전 했던 생각은 살고 싶다는 본능적 욕구가 아닌, 오로지 파트로클로스를 다시 볼 수 있다는 희망이 이었을 것이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자살하려 했던 자신이었으니 얼마나 간절하게 죽음을 기다렸는지, 죽음으로서 연인 파트로클로스를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그 심정을 우리는 알기 때문이다.




8.


 아킬레우스가 죽고, 파트로클로스가 죽었다. 두 젊은 청년이 죽었다. 아름다운 금발의 영웅 아킬레우스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졌다.


 아킬레우스는 유언을 남겼다. 파트로클로스와 자신을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이다. 그러나 후에 찾아온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러나 제 아비의 명예를 위해 감히 몸종과 함께 묻을 수 없다며 반대하고 비석에 파트로클로스의 이름이 새겨지는 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하지만 이미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유골은 한데 모여진 뒤였고, 되돌릴 수 없다. 그런데도 네오프톨레모스는 끝까지 비석에 아킬레우스의 이름만을 적고 파트로클로스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파트로클로스는 저승에 가지 못하고 혼이 되어 이승을 떠돌며 제 무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자리에 아킬레우스는 없다. 이미 저승의 부름으로 이승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파트로클로스는 보고픈 아킬레우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승에 남아 외로움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것은, 파트로클로스를 그토록 혐오하던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바다의 여신 테티스였다.


 테티스는 어릴 때부터 제 아들과 늘 함께했던 파트로클로스를 혐오했다. 내 아들은 장차 위대한 영웅이 될 것이고 내가 신으로 만들 것인데 감히 인간이 내 아들의 동무라고 한다니. 신들의 강요로 억지로 인간과 결혼했던 테티스. 인간 자체를 싫어하는 그녀로서는 당연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파트로클로스를 볼 때마다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테티스는 그러나 후반부 다른 태도를 보인다.



< 나는 여기 묻혀 있습니다. 당신 아들의 무덤에. … 신들 사이에서는 그런 것들이 미덕으로 간주될 수 있겠죠. 하지만 남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어떻게 영광스러운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들은 워낙 쉽게 목숨을 잃는 것을요. 그를 또 한 명의 피로스로 만들 작정입니까? 그의 이야기는 그보다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세요.>



 아킬레우스의 비석에, 다른 말 없이 그저 그가 죽인 영웅들의 이름만 열거되어있는 것을 보며 혼이 된 파트로클로스는 테티스에게 간청한다. 그리고는 자신이 보았던 아름다운 아킬레우스의 모습들을 말한다.



< 리라를 연주하는 솜씨가 훌륭했죠. 목소리가 듣기 좋았고요.


이런 게 있다고 나는 말한다. 이런 것도 있고 이런 것도 있다고. 여름 햇볕을 받으면 그의 머리칼이 어떻게 보였는지. 달릴 때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수업을 받을 때면 올빼미처럼 진지했던 그의 눈빛. 이것, 이것 그리고 이것. 행복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쏟아져 나온다.


 나는 내가 알았던 소년을 소환한다. 씩 웃으며 무화과를 손으로 으깨는 아킬레우스. 내 눈을 보며 웃음을 짓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 받아, 그가 말한다. 하늘을 등지고 강가의 나뭇가지에 매달린 아킬레우스. 잠결에 내 귀에 와닿던 진하고 따뜻한 그의 숨결. 네가 꼭 나가야 한다면 나도 따라갈 거야. 그의 품 안이라는 특별한 항구 안에서 잊히던 나의 두려움.


 추억들이 떠오르고 또 떠오른다. 그녀는 묘석의 결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내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 모두 거기에 모여 있다. 신과 인간 양쪽 모두였던 소년이. >



 단순히 누구누구를 죽인 영웅 아킬레우스라는 것을 떠나 사랑스러운 소년, 연인 아킬레우스가 어땠는지 제 어머니에게 말하는 파트로클로스. 그의 말에 테티스 역시 눈을 감고 그를 품었던 자신을 회상한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다 말한다.



< "내가 써두었다." 그녀가 말한다. 처음에 나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가 비석 위에 새긴 이름이 내 눈에 들어온다. 아킬레우스라고 적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파트로클로스가 있다.

"가거라." 그녀가 말한다. "그 아이가 널 기다리고 있다." >



 끝까지 파트로클로스를 혐오했던 테티스는 그제야 그를 인정하고 그의 혼을 풀어준다. 그로 인해 이승에 묶여있던 파트로클로스는 마침내 저승으로 향한다.


 한편으로는 누구보다 아들의 안위를 걱정했고 사랑했지만, 죽어서야 아들이 진정 원하는 것을 이루는 그녀의 모성애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진정한 모성애는 그것인 걸까 하는 의문이다. 아들을 지키고 온전한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아들이 사랑하는 이까지 혐오하는 것. 그게 아니라, 진정 아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고 그가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모성애이다.


 그러나 테티스는 아들이 죽어서야 그의 바람을 들어주고 파트로클로스를 받아들인다. 그녀는 후회했을까. 저자는 구체적으로 테티스의 심정을 묘사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분명 후회했을 것 같다.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로 인한 갈등을 늘 제 어미와 겪어왔으니 말이다.



9.


 필자는 이 대목에서 저자가 조금이라도 하데스(저승)에서 상봉한 연인의 모습을 그려줄 줄 알았다. 죽은 줄 알았던 두 사람이 하데스에서 다시 만나 눈물 흘리며 얼싸안는 모습을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서술하지 않는다. 단 세 줄의 문장으로 은유적으로 압축할 뿐이다.



< 어둠 속에서 두 개의 그림자가 가망이 없는 묵직한 어스름을 뚫고 서로에게 다가간다.

 그들의 손과 손이 만나자 빛이 홍수처럼 쏟아진다.

 태양 밖으로 금 항아리가 백 개가 퍼붓듯 쏟아진다. >



<아킬레우스의 노래>는 이 세 문장을 끝으로 마무리된다.


 오히려 저승에서 만난 둘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지 않는다. 독자로서 그 둘의 모습이 너무나도 궁금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을 모두 독자의 몫으로 상상하게 맡긴 저자 덕분에 결말의 여운은 쉽게 가시지 않는다.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웃는 모습을 너무나 오랜만에 마주친 아킬레우스, 으스러질 듯 끌어안고 울부짖는 그의 모습. 비록 저승이지만 이곳이기에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는 둘의 안도감. 테티스가 그를 인정했다는 기쁨. 그 모든 것이 상상되었다.


 그들의 아름다운 상봉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기에 감정의 여운이 더욱 깊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 아이가 널 기다리고 있다."는 테티스의 말 한마디로 아킬레우스의 심정이 아주 간단히, 그러나 아주 절절히 전해진다. 아킬레우스는 저승에서 파트로클로스를, 제 연인을 기다리고 있다.



< He is half of my soul, as the poets say. >

-원문 발췌




 


 소설을 읽고 거의 통곡하듯 눈물 흘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여태 많은 소설을 보며 흐느끼는 것 정도야 흔했지만, 비극적인 것 같으면서도 행복한 둘의 결말과 쉽게 가시지 않는 여운 탓에 거의 온몸으로 울었던 것 같다. <일리아스>에서 등장하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가 궁금했고 그 덕분에 이 책을 산 것이었지만, 500페이지의 분량의 책을 이토록 엄청난 흡입력으로 하루 만에 읽게 한 저자의 필력이 놀랍다.


 책도 미디어와 똑같이 재미가 없다면 사람들 눈에 잘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하루 만에 읽어해 치웠고, 나도 모르게 둘의 사랑에 목메어하고 있었다. 신화인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둘의 서사를 절절하게 써 내린 저자의 상상력이 대단하다.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이고 각색을 했다고는 하지만, 읽어본 결과 <일리아스>에 나온 내용과 별반 다를 게 없다.  


 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보고 몸부림치며 울부짖은 것.

 헥토르를 죽일 때까지 파트로클로스의 장례도 치르지 않은 것.

 친구의 복수를 위해 헥토르를 마차에 끌고 13일간 시신에 능욕한 것.


 그 모든 것이 신화 그대로였고, 저자는 그 둘의 관계에 약간의 상상력을 추가한 것뿐이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이 있고 인간이 있다. 이 책은 그에 대해서 써 내려갔다. 아름다웠던 둘의 관계, 제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용기 내어 홀몸으로 찾아온 트로이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 그를 인간 대 인간으로 보며 눈물 지었던 아킬레우스. 모든 것이 이 책에 녹아내려 있다. 헬레네로 인해 벌어진 오래된 전쟁은 의미 없고 한심하기 짝이 없으나 그것은 모두 인간이 저질렀다는 것을 증명하듯 소설 곳곳에, 전쟁 곳곳에 인간의 흔적이 묻어난다. 그중 하나가 바로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이다.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몇 세기에 걸쳐 전해져 내려왔고, 애틋하고도 영원한 사랑 역시 그렇다. 그러나 내가 읽은 것 중 이보다 더 아름답고 절절했던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다.


 전쟁 속에서도 제 영혼의 반인 연인을 위해 기꺼이 용기 내어 전장에 나갔던 파트로클로스. 제 목숨을 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이, 연인을 죽인 헥토르를 망설임 없이 죽인 아킬레우스.


 우리는 둘의 모습에서 전쟁 속에서조차 만개하는 헌신적인 사랑의 진 면모를 볼 수 있다.

사랑에 목마른 자, 꼭 읽어보길 바란다.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사랑의 초상이 이 책에 담겨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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