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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Feb 06. 2022

사랑 속, 탄생과 충돌과 파멸의 순간.

서울 전시회 후기 <오용석, 사랑의 형상>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17>





 아트맵 앱에서 눈에 띄는 작품이 보였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작품을 눌렀고, 그 작품은 해당 전시회의 공간과 설명 창으로 나를 안내했다. 원체부터 나는 잔잔한 수채화 풍의 그림보단 강렬한 원색, 유화의 질감을 더욱 좋아했기 때문에 강렬한 푸른색과 노란빛을 띠는 해당 작품에 눈길이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데, 전시회의 이름인 <사랑의 형상> 때문에 작품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광채가 더욱 강렬히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해당 전시회를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래 그림 단 하나 때문이었다.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11> 오용석




 이유는 모르겠는데, 이 그림을 보고 이유 없이 눈물이 고였다. 정말 이유는 모르겠다. 만개한 꽃의 꽃가루처럼 화려해 캔버스 위를 수놓은 노란 별들 때문인 건지, 푸른 새벽처럼 혹은 깊은 바다처럼 배경을 수놓은 강렬한 파란 물감 때문인 건지, 아무튼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이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직접 눈으로 보고픈 욕망에 휩싸여 '가고픈 전시회'로 입력해놓고 오랜만에 서점을 가는 김에 해당 화랑을 들렀다.


 전시회엔 아직 문외한인 나였기에 내가 가본 전시회라고는 커다란 아트홀 혹은 DDP가 다였다. 그런 나에게 자그마한 화랑이라는 공간은 꽤 색달랐고 신기했다. 10평 남짓 되는 조그마한 공간에 내가 들어섰고, 10점 정도 되는 그림들이 나를 반겼다. 해당 전시회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모두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연작의 일부로, 제목에서처럼 충돌과 즉시 상태가 변화하는 순간의 열기로 뒤덮인 회화들이다. 신체의 부분 부분을 확대하여 포착한 듯한 화면은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주황색과 파란색, 산란하는 듯이 흩뿌려진 짙은 노란빛의 물감으로 인해 폭발적인 광휘를 보여준다. 한 올 한 올 드러난 근섬유, 화려한 공작 깃털, 거꾸로 흘러내리는 물감과 같은 요소들은 이러한 광휘에 이질적인 생경함을 더해준다. 그리고 이렇게도 찬란한 광휘로부터 오용석이 제시하는 사랑의 형상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 1892-1957)의 『피구라(Figura)』(1938)에서 논해졌듯 형상(figure)은 본래적으로 재현 불가능성을 가시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즉 금기이다. 더 나아가 언어가 표현해내지 못하는 것들까지도 형상은 표현해낼 수 있다. 그렇기에 형상은 그 자체로 금지된 것 너머를 상상할 수 있게 하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의 신체 형상이 광휘를 내뿜는 근원에는 이와 같은 힘이 존재한다. “내 작업은 표현의 불가능성 혹은 어려움을 인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어떤 것들에 대한 서사시이다.”라는 작가 스스로의 말처럼,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는 사랑에 대한 감각, 욕망, 환상의 경계에서 꿈틀거리는 수많은 금기, 그리고 그 너머를 상상하게끔 우리를 이끈다.





 10점 정도 되는 그림들은 모두 제목이 똑같았다.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나는 그림을 그려낸 오용석 작가 본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제목의 제대로 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지만, 본래 예술이란 정답이 없다. 100인이 한 작품을 보면 100개의 해석과 감상평이 나온다. 예술이란 그러한 다양한 해설이 나오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예술의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런 것처럼 나는 작가 당사자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의 '정답'을 말하진 못하겠으나, 홀로 느낀 충실한 감수성의 결과물을 이곳에 적어 내리고자 한다.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라는 제목은 내가 감히 예상컨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존재가 뜨겁게 상봉하는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방울과 바위. 둘은 모양도 크기도 질감도 다르며 심지어는 단어에서 오는 질감조차 다르다. 물방울은 바위 위에 떨어지면 파괴되고 사라져 '물방울'이라는 단어를 잃고 '물'이 되어 바위 위로 흐른다. 그런데도 물방울은 바위 위로 떨어지고, 뜨거운 바위는 제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을 온전히 안고 '물'이 되어 흐르게 한다. 떨어지고, 또 흐른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존재가 만나는 탄생의 순간, 파멸의 순간, 충돌의 순간, 모든 것이 이 작품에 담겨 있었다. 사랑을 향한 욕망, 감각, 환상, 금기,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그림들을 보며 나는 '파격적이다'라고 느꼈다.


 하나같이 색채가 강렬하고, 화려하며, 개중엔 어두운 것도 있다. 특히 노란색과 파란색이 주로 나오는데, 노란색은 흩뿌려지는 빛으로 표현되어 어둑한 푸른색의 배경 위로 떨어진다. 위 사진의 왼쪽 작품에서 내가 제일 먼저 느꼈던 것은 꽃이다. 아름답게 피어오른 꽃에서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자욱한 꽃가루, 그것은 강렬한 노란 색채로 흩뿌려져 푸른 배경에서 더욱더 강조되어 산화된다. '사랑의 형상'이라는 전시 제목에 제일 어울리는 작품이라 생각했다. 단순히 1차원적인 시선으로 보면 나는 위 작품에서 꽃을 보았는데, 특히 이 작품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노란빛의 물방울 때문이었다.


 사랑에 빠진 이의 눈엔 꽃이 이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도 없을 꽃가루가 이리저리 흩날리는 것이 보이고, 만개한 꽃의 주름 하나하나가 보이고, 푸른 배경을 지배한 은밀한 향기까지 느끼는 것. 플라톤의 '향연'에서 말하길 에로스 즉 사랑은 모든 인간들을 시인으로 만든다고 했다. 사랑에 빠진 이의 눈에서 보는 꽃과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노란빛 꽃가루, 아니 꽃 가루라는 1차원적인 뜻을 넘어선, 그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파생되는 수많은 노란색의 빛깔, 하여 나는 이 작품을 해당 전시회에서 베스트로 뽑았다.


 그러나 또 다른 시선으로 볼 때엔 작품명에 충실하게 바위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로 보이기도 했다. 뜨거운 열로 일렁이는 바위 위로 그것을 부술 것처럼 강하게 떨어지는 물방울, 그 하나의 방울에서 터져 나오는 여러 방울의 과즙과, 물'방울'이 사라지는 순간, 물'줄기'가 탄생하는 순간, '물방울'과 '바위'가 충돌하는 순간, 이 모든 것이 한순간 보이는 아주 강렬한 찰나가 보였다. 그 역동적인 움직임이 무의식적으로 보였기 때문에 내가 눈물 지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13>

 


 특히 인상 깊었던 작품은 이것이다. 위 작품을 보고 내가 제일 먼저 느꼈던 건 '왜 굳이 저런 모양일까?' 싶은 것이었다.


 내 눈이 조금 이상했겠지만, 희한하게 작품 정중앙에 위치한 저것을 보면 볼수록 나는 그것이 꼭 여성의 중앙을 비집고 들어간 남성의 성기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보기 시작하니 제대로 여성과 남성의 꼭짓점이 보이게 되어 이 작품이 내 눈엔 가장 파격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그냥 내 눈이 이상해서 이렇게 보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사랑의 순간에서 남녀의 중앙이란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다. 비좁은 중앙으로 향하는 또 다른 중앙, 강렬히 눈을 사로잡는 노란빛 광채. 만남과 만남은 비로소 결합하고 두 중앙은 뒤섞인다. 가장 뜨거운 사랑의 한 순간이 노란빛 강휘로 하나 되어 이리저리 아름다운 부산물의 물방울을 만들어 흩뿌린다. 실물로 보니 노란 물방울이 더욱 선명히 그리고 많이 보였다. 중앙과 중앙이 겹치는 순간, 원초적인 본능의 순간이기에 그만큼 드러나는 광채가 한가득이다. 눈이 부셨다.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7>



 또 이 작품에선, 여성의 성기가 보이기도 했다. 위 작품에선 다른 작품들의 노란색보단 더 짙고 깊어 거의 주황빛에 가까운 노란색이 보인다. 그러나 그만큼 그 중앙의 깊이와 품을 수 있는 무언가의 그릇이 보이기도 한다. 가까이, 넋을 놓고 보고 있으면 그 중앙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농염한 보라색과 주황색, 대비되는 차가운 파란색, 그리고 검은색. 다양한 색의 조합이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황빛 중앙으로 따라가면, 무엇이 나올까. 모든 생명의 고향이고 나의 집이었던 자궁이 눈앞에 보일 것만 같다. 자궁은 모든 생명의 탄생지이다. 생명이기에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자궁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이다. 여성의 성기  존재하는 자궁,  자연이라는 존재가 주는 포근함과 그림 자체에서 오는 왠지 모를 강렬함에  느낌이 선명히 대비되어 기분이 묘했다. 섬찟하면서도 포근하고 야릇하면서도 따뜻했다.





 오른쪽 그림은 대부분의 작품에서 사용되었던 푸른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강렬한 푸른색, 노란색의 대비는 사라지고 오로지 붉은색이 시선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데, 사랑에 있어 가질 수 없는 환상과 금기의 영역이 바로 이 그림에서 표현되었다고 생각했다. 닿을 수 없는 저 끝의 무엇, 금기라는 단어가 주는 야릇함과 자극, 그 모든 것이 붉은색에서 드러난 것 같았다. 붉은색은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색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위 작품에서 원초적인 오르가슴을 엿보았고, 보면 볼수록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 위 그림이 왠지 모르게 민망해 오래 시선을 두지 못했다. 참 바보 같게도...



<물방울이 타오르는 바위 위로 떨어진다 #17>



 모든 그림이 그러한 대비 감을 주고 있었다. 모든 그림에선 기쁨과 환호의 찰나도 보였고, 파멸과 빅뱅의 찰나도 보였다. 너무나도 대비되는 극과 극의 감정선이 거의 대부분의 그림에서 보였다. 특히 강렬한 노란색과 파란색의 색채가 강요된 작품들에서 더욱 느꼈고, 나는 그것이야말로 이 전시회의 제목인 '사랑'의 '형상'에 너무나도 어울린다고 보았다.


 '형상'이라는 단어 자체에서 오는 신비스러움과 왠지 모를 야릇함 그리고 '사랑'이라는 커다란 감정에서 갈라져 나오는 감각, 욕망, 환상, 모든 것이 작품에 담겨 있었다. 욕망과 감각이라는 단어가 이 작품들에게 나는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중앙과 중앙이 충돌하면 무엇은 파괴되고, 또 무엇은 탄생된다. 물방울이 바위 위로 떨어질 때 물'방울'은 사라지고, '물'줄기는 탄생한다. 이 작품들은 그 모든 과정의 비극과 환희를 담은 것 같았다. 무언가 부딪혀 탄생되는 순간, 무언가가 존재함으로써 그저 경이로운 순간, 무언가를 욕망하고픈 순간, 그 모든 것이 말이다.


 사랑은 기쁨을 안겨주기도 하다가 파국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달콤하기에 그러한 양면성은 더더욱 비극적이고 처절한데, 작가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모든 작품에서 그러한 처절한 사랑의 파멸 또한 보았다.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색채와 화풍에서 오는 강렬함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하나 아쉬웠던 건 화랑의 공간이 많이 협소하여 작품과 작품 사이 간격이 좁았던 것이다. 나는 옆과 위로 공백이 많으면 많을수록 작품에 몰입을 더욱 깊이 하는 편이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한 작품에 대한 생각이나 여운이 가시기도 전 바로 다음 작품이 눈에 보이니 깊은 집중은 되지 못했다. 조금 더 넓었다면 작품들을 더 진득하고 깊이, 멀리서 그리고 가까이서, 다양한 방식으로 음미하고 시선으로 핥았을 터인데 그러지 못한 점이 유일하게 아쉬웠던 점이다.


 해당 전시회는 2/15 까지라고 한다. 무료 전시회이기 때문에 별도의 예약도 필요하지 않으니, 파격적이고 강렬한 사랑의 어떤 찰나를 엿보고 싶으신 분들이라면 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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