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희 Aug 21. 2022

다가올 사랑에 대한 고찰.

지난 사랑을 되짚으며.


 가끔 넋 놓고 재즈 음악을 듣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감정이 부풀어 오르듯 뜨겁게 상기하는 때가 있다.


 멈출 수 없이, 어찌 막을 새도 없이 차오르는 감정의 무기물은 내 손으로 욱여넣고 밀어 넣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 예민해서 어찌할 도리가 없다.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을 흘리고, 조금만 밀쳐도 흥분하여 신음을 지른다. 그럴 땐 그저 한계 없이 부푸는 내 자아의 일부인 그것을 구경하는 편이다. 어디까지 부푸는지 계산하고 예상할 것도 없이, 그 거대한 덩치의 감정이 내뿜는 온갖 향기와 악취를 즐기는 편이다.


 나의 감정이 한계 없이 부푸는 때엔 두 가지의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 재즈 음악, 두 번째, 야심한 밤. 지금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그렇다. 얼마 전에 큰맘 먹고 산 몇 백만 원어치 스피커로 엘라 피츠제럴드와 쳇 베이커의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그 어떤 소음도 없이 고요한 밤. 두 거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믿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다가올 나의 '사랑'이란 낯선 감정을 위해 나의 대비책을 살펴보려 한다.






 어릴 때부터 나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외로움이 많은 편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성에 빨리 눈을 떴다고 볼 수 있겠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아이에게 눈도 마주칠 수 없을 만큼 크나큰 호감을 느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해보면 더없이 순진하고 순수하다. 조금만 다가와도 얼굴이 붉어지고, 그 아이 빼고는 모든 것이 모자이크 되듯 뿌예지고, 흰 자위로도 그 아이를 찾고, 그 아이가 말을 걸면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고 제대로 답도 하지 못했다. 물론 그 후엔 친구들의 조언으로 어찌어찌 어설픈 고백을 하긴 했지만, 첫사랑의 법칙처럼(?) 당연히 그 아이는 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때부터 2차 성징이 시작되면서 되지도 않는 발라드 음악을 들으며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짜려 노력하곤 했었다.


 그런 나였으나 무슨 일인지 첫 연애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했었다. 아주 우연히 운명처럼 어떤 사람과 만나 순수한 연애를 했었다. 연애를 하지 않아도 전혀 개의치 않는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유난히 난 어릴 때부터 연애를 하고 싶어 안달 나 있었다. 그랬기에 처음 했던 연애가 그리도 달콤하고 운명적일 수가 없었다. 첫 키스 순간 '다리 풀린다'라는 표현이 절대 과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었고.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내 사랑은 운명이라 절대 믿었었고. 물론 그 뒤엔 순수했던 내 연애 역시 흔한 다른 이들의 그것과 다름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랫동안 씁쓸했지만.


 나는 여전히 외로움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애정결핍 수준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랑받는 것을 좋아하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좋아한다. 낭만과 로맨틱한 무언가를 좋아하는 만큼 사랑에 대한 갈증은 다른 어느 사람들보다 진득하다. 그러나 긴 시간 동안 나의 외로움과 대면하며 나는 어느샌가부터 마음먹었다.


 그렇다고 아무나 만나지 말자.


 외로움이 극에 치닫으면 눈앞에 베일이 씌어 제대로 된 것도 보지 못한다. 지나치게 친절한 사람은 의심해야 하지만, 그럴 틈도 없이 덩치를 부풀린 외로움에 잠식되어버려 그 사람의 어두운 본심까지는 끝내 보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에 외로우면 외로울수록 나는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난 과거의 나를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런 사람과 만났을까, 하며 웃게 된 것이 지금의 나지만, 끝까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외롭다고 아무나 만나지 말자. 물론 시간은 걸릴 것이다. 지나치게 신중하고 고민하는 바람에 지금 역시 혼자이지만, 그만큼 정말 '사랑'을 만난다면 망설임 없이 다가가겠지.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진정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 그것이 내 가치관이고 신념이다.


 가벼운 만남. 신중하지 않은 만남. 그것은 내게 사랑이 될 수 없으니까.






 내 지난 연애들은 지나치게 흔하고 또 서글펐다.

 24살이라는 나이에 알맞은 연애 경력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여태 두 번의 연애를 했다. 19살 때 한 번, 21살 때 한 번. 애석하게도 그 두 번 모두 내가 차였더랬다. 그때 참 많이 울기도 울었다. 그때는 세상 모든 욕들로 그 사람을 저주하며 원망했었다. 당연히 어렸기에 어쩔 수 없는 어린 처사였겠지만, 세상 무너진 것처럼 그리도 슬프고 혐오스러울 수가 없었다.


 특히나 두 번째 연애는 더더욱 그랬다. 여전히 두 번째 연애의 그 사람은 행복한 미래를 소원해줄 수 없다. 예전엔 그 사람을 저주했지만, 지금은 저주까진 아니고, '어디에선가 알아서 잘 살겠지.' 정도. 지금 생각해보면 두 번의 연애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무자비한 사랑을 원했다. 계산 없고 우울과 다툼이란 전혀 없는 한마디로 '불가능한 사랑'을 말이다. 어렸던 나는 유독 연애와 사랑에 대한 환상이 컸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주지 않으니 그게 그리도 서글프고 무서울 수가 없었다. 그땐 그것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 넓은 세상엔 나를 그 정도로만 사랑하는 남자도 있다는 것을 왜 납득하지 못했을까.


 그러나 지난 두 번의 연애로 나는 그래도 성숙할 수 있었다. 사람을 제대로 보는 법을 파악했고 또 어떤 사람이 내게 맞는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결과를 보고 생각해보자면 결국 내게 있어 '부족한 사랑'의 연애는 내게 아주 좋은 인생 교과서가 돼준 셈이다. 사실, 삶의 모든 고통은 그러한 교과서적인 가르침을 주는 법 아니겠는가. 성공으로 향하는 길에서 넘어지는 것도. 완벽한 연애와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며 몸부림치다 나가떨어지는 것도. 누군가에게 패대기 쳐져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 보면 자연스레 내가 보지 못했던 사랑의 밑바닥을 아는 법이다. 아, 이 밑엔 이런 고통도 있었군. 이런 돌멩이도 이런 똥덩어리도 있었군. 내가 미처 보지 못했군. 이제야 보게 됐군... 하며.






 이제 생각해보면 나 역시도 과실이 있었다.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이 아주 큰 죄라고 생각했던 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더 이상 사랑을 주지 못한다는 것, 그로 인해 따르는 상실감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를 향한 그 사람의 마음이 원인 없이 식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었다. 그 사람의 실수도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어쩔 수 없는 무언가였다. 그뿐이다.


 그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내 잘못은 0이고, 그 사람의 잘못이 10이라 생각했다. 이제와 다시 돌이켜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결국 연애의 실패란 다른 누군가와 몰래 만나는 게 아닌 이상 두 사람 모두의 사정이 있다는 것을 늦게 알 수 있었다.






 사랑이 식는 것은 그 사람의 죄가 아니라고-

 이것을 깨우치는 것, 그리고 받아들이는 것이 매우 힘들었다. 그러나 나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그러한 상처를 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똑바로 직시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면 사랑에 대한 부담감이 아주 덜어지는 것 같다. 이별 후 누가 누가 더 잘못했는지 재는 것에 대한 무지함을 조금은 덜 수 있는 것 같다. 사랑했고 사랑했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을.


 차마 용서하지 못할 사랑은 그냥 지나치고, 그로 인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배우고, 성숙할 건 성숙하는 것에 멈추자. 그뿐이면 된다.


 어쩌다 연애를 3년간 하지 못하면서 많이 다짐했던 것 같다. 다가올 사랑에 후회할 행동은 하지 말자고. 물론 그 언젠가 이별을 한다면 아주 사소한 것도 후회로, 원망으로 남겠지만 결코 나의 감정에 있어 후회할 건더기는 남겨두지 말자는 것을 다짐했다. 3년 간 연애는 하지 못했더라도 많은 만남이 있었고, 그로 인해 또 성숙해졌고, 다음 사랑에 대한 스스로의 준비를 마칠 수 있었으니까.




 지난 두 번의 연애에서 나는 '그 사람을 더 사랑할 걸. 더 표현할 걸.'이라는 후회는 없었다. 나는 언제나 그 순간에 충실하며 표현했으니까. 그러나 야심한 밤 지난 사랑을 되짚어보면서, 다시 한번 다가올 누군가에 대한 준비를 하게 되는 것 같다.


 후회 없이 사랑하는 것. 아낌없이, 계산 없이 온 힘 다해, 내 몸 부서질 만큼.


 그리고 언젠가 그 사람이 나에 대한 마음이 식었다고 해도 저주는 하지 말 것. 그건 그 사람의 죄가 아니니까. 물론 매우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결국 그게 나에 대한 그 사람의 한계였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된다. 이 세상엔 나를 그 정도로만 사랑할 남자가 아주 많을 것이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수도 없이 만날 것이다.


 너무도 쉽게 이별을 말하는 사람.

 너무도 쉽게 상처되는 말을 하는 사람.

 그러나 그런 사람    명에게 상처받으며 저주를 퍼붓기엔  인생은 너무도 짧고 좁다. 아무리  마음의 그릇이 넓을지라도 그러한 저주와 혐오는 지나치고 나를 성숙하게   것들만 속속 골라 현명하게 사랑하자.



 삶은 사랑이 있기에 아름답고, 상처가 있기에 행복하니까.

 나는 사랑이 있기에 빛나고, 상처가 있기에 성숙하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당신을 위로할 필요가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