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결심> 해석. 감상문.
아주 오랜만에 로맨스 영화를 보았다.
어릴 땐 영화를 주말마다 보았고, 혼영도 매우 자주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영화관 가는 것 자체를 뜸하게 했다. 물론 여전히 텔레비전을 틀 때마다 제일 먼저 OCN 채널부터 쭉 영화 채널부터 훑기는 한다. 현재 시점 마지막으로 영화관에서 본 영화가 무려 스파이더맨3였다. 그런 내가, 아주 오랜만에 한 영화를 3번 보았다. 그리고 처음 봤을 때와 완전히 달라진 지금의 감상평을 적게나마 브런치에 적어보려고 한다.
<헤어진 결심>을 맨 처음 봤을 땐, 두 주인공의 서사에 몰입할 수 없었다.
박찬욱 감독이 의도했던 것인지 아닌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끝까지 둘의 사랑, 특히나 송서래의 사랑에 몰입하지 못했다. 마지막 해준이 서래를 찾아 바다를 뛰쳐들어가며 끝날 때조차 '글쎄'라는 마음이 먼저 들었었다.
결국 불륜을 한 주제에. 송서래는 자신의 사건을 덮기 위해 담당 형사를 사랑하는 척한 주제에. 뭐 그리 대단한 사랑이라고 저럴까- 라는 마음이 첫 번째 시청에서 느낀 내 강렬한 소감이었다. 박찬욱 감독이 이 소감을 보았다면 그게 아닌데, 하며 이마를 탁 쳤을 듯하다.
그러나 정말 신기하게도, 더욱 깊게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해 두 번째 시청을 VOD로 이어서 했을 때 나는 비로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었다. 영화를 3 번 보고 나서야 방구석에서 혼자 해석하기 시작했다.
우선 다른 사람들의 전문적인 해석이나 평론가들의 말을 보기도 전에, 내가 혼자 해석을 해야겠단 마음이 들었다. 사실 아직도 다른 분들의 해석이나 평론을 보지 않았지만, 왠지 이 영화는 이대로 소중히 나만의 해석과 감상으로만 둬서 깊은 여운과 함께하고 싶단 생각이 든다.
그녀의 사랑은 언제부터였을까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던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
기도수 사건 때, 서래가 단순히 제 죄를 덮기 위해 해준에게 다가간 것인지는 영화는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는다. 정말 그녀가 해준에게 진심으로 호감을 느껴 다가간 것인지, 오직 용의자임을 피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 것인지 명확한 답을 내주지 않는다. 나 역시 처음엔 그 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지만, 결국 초반부 그녀 역시 해준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라고 보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녀의 사랑이 진심인지 거짓인지가 아닌 듯하다.
제 사건을 덮기 '위해'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다 보니 제 사건이 '덮어진' 것 같음을 느꼈다.
심지어는 해준이 모든 것을 깨닫고 서래의 집에 찾아가 대화했을 때도, '그 폰은 바다에 버려요' 라는 말과 함께 떠났을 때도 서래는 눈물을 보였으니까. 처음부터 오로지 사건을 덮기 위해 작정하고 했던 연기였다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해준의 말에 눈물 지으며 붕괴라는 단어를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굳이 사랑한다는 말조차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문장이 있다. 해준은 형사인데도 언제나 슈트를 올곧게 입고 다니고, 방석이 흐트러진 것을 보면 바로 정돈하는 깔끔한 성격의 인물이다. 거기다 기도수가 떨어진 절벽을 '범인이 간 길'이라며 직접 타고 올라가는 것을 감행하는 그는 누가 보아도 경찰이라는 제 직업에 프라이드가 확실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사랑에 한눈 팔려 눈 앞의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놓아준 것이나 다름 없다는 사실은 마침내 그를 붕괴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해준은 끝끝내 증거가 담긴 폰을 버리라 한다. 경찰로서 올곧게 살아왔던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그녀에게 내던지는 것이나 다름 없는 말을 한다. 제 진심이 드러난 그 말 한마디가 결국엔 사랑의 말이라는 사실을, 해준은 그때 알지 못했다. 그녀의 사랑으로 인해 붕괴된 경찰인 자신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알아채지 못했다.
서래는 바로 그 순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의 사랑을 알아 들었지만 말이다.
안개와 인공누액
영화는 내내 푸른색의 색감과 안개가 가득 등장한다. 특히 서래의 포인트 컬러는 청록으로 보이는 블루, 블루로 보이는 청록색인데 이는 곧 서래 자체가 해준에게 있어 안개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한다.
해준은 몇 번이고 눈에 인공누액을 넣는다. 뻑뻑해서 순간 눈앞이 안개 싸인 것처럼 뿌예보일 때 인공누액을 넣으면 수분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눈앞이 매우 또렷해진다. 나는 영화를 보며 해준이 어디서 인공누액을 넣는지를 보았는데.
1. 기도수의 사건 당시, 절벽으로 직접 올라와 저 밑에 떨어진 그의 시신을 보면서.
2. 이포에 온 후 자라 도난 사건을 보면서. ("자라가 중년 남성 우울증에 좋대"라는 말과 함께)
3. 임호산의 사건 당시, 수영장에 널브러진 임호산의 시체를 들여다 보면서.
4. 서래가 해변으로 사라진 뒤 서래의 차 속 휴대폰을 보면서.
해준은 왜 이리 자주 인공누액을 넣었을까?
해준에게 있어 또렷한 시선은 곧 경찰로서 이 사건을 누구보다도 또렷하게 직시하겠다는 의지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신념과 가치관이 뚜렷한, 누가 보아도 올곧은 경찰이고 형사이다. 그런 그는 사건마다 인공누액을 보며 사건 현장 혹은 시신을 보았다. 눈앞이 흐릿해지면 인공누액을 넣어 선명하게 형상을 보는 것처럼, 해준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인공누액을 넣으며 경찰로서 이 사건을 직시하겠다는 또렷한 의지를 다진 듯 보였다.
심지어는 마지막, 서래를 뒤쫓아 갔던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인공누액을 넣은 것.
영화를 보며 '정신없이 쫓느라 바쁜데 왜 하필 저때도 인공누액을 넣고 있었던 걸까?'하는 의문이 제일 먼저 들었다. 생각해보면 해준은 그때까지도 서래가 말하는 사랑의 말을 전혀 알지 못했었다. 급하게 통화하며 그녀를 쫓지만, 해준은 서래의 말을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조차 "답답하네 정말!"이라며 소리친다. 게다가 서래에게 했던 자신의 고백조차 전혀 이해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했었다.
그 순간 그가 서래를 쫓은 것은 오직 단 한 가지의 이유였다. 사철성의 어머니를 죽인 것이 바로 그녀였다는 것. 한마디로 도망치는 용의자를 체포하는 것. 서래는 그때 사철성의 어머니를 죽인 선명한 범인으로 낙인 찍혔고, 해준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는 통화 내내 그녀가 하는 말들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해준은 '경찰'로서 '범인'을 쫓으며 말했었고, 서래는 '여자'로서 '사랑하는 남자'에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이때 해준의 정체는 뭐였을까.
자신을 피해 달아나는 범인을 쫓는 형사? 이유 없이 이끌렸던 여자를 기어코 안기 위해 달려가는 남자? 그녀를 쫓는 내내 아마 해준 자신도 또렷하게 제 정체를 정의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범인을 잡기 위해 이리 엑셀을 밟는 건지, 사랑하는 여자를 잡기 위해 하는 밟는 건지, 말이다.
그때까지도 서래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해준은 서래가 없는 그녀의 차 앞에서 마지막 인공누액을 넣는다.
서래의 알 수 없는 말들로 인해 안개로 휩싸인 그의 시야는 덕분에 다시 밝아지는데, 나는 여기서 그 이유를 알았다. 그는 그때까지도 서래의 진심을 몰랐기에 '형사'로서 그녀를 쫓은 것이었다. 해서 서래를 제대로 형사로서 다시 보기 위해, 경찰로서 흔들림 없는 또렷한 시선으로 그녀를 보기 위해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인공누액을 넣은 것이라 보았다. 해준은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인공누액을 넣으며 흐릿해진 시야를 바로잡고 경찰로서의 의지를 다져왔었으니까.
해준에게 틈틈히 넣는 인공누액이란 형사로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는 하나의 의지였다. 해서 그는 기어코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서래의 차 앞에서 인공누액을 넣으며 뒤늦게 자신의 의지를 다진다.
나는 여자가 아니라 범인을 잡으러 온 거야, 하며 스스로 합리화하는 것처럼. 자신을 내내 뒤흔들어 놓았던 서래가 확실한 범인이 되어 쫓아간 마지막에도, 이번엔 절대 흔들리지 않을 거라 다짐하는 마지막 이성인 것처럼.
영화 내내 서래의 옷과 집의 색은 안개 색인 푸른색일 뿐이다. 해준에게 있어 서래란 안개 그 자체이고 그러한 형사로서의 신념을 흐려놓는 먹구름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러한 그녀이기에 해준은 몇 번이고 또렷한 시선을 위해 인공누액을 넣는다. 결국 해준에게 서래란 경찰의 또렷한 의지를 연신 흐릿하게 뭉개트리는 안개였지만.
바로 이러한 복선은 영화 초반부에도 나타난다.
기도수의 시신을 보며 첫 번째 인공누액을 넣는 해준의 눈 뒤 바로 다음 장면이 뿌옇게 변해버려 개미가 꼬인 기도수의 눈인데, 기도수는 서래에 의해 죽은 인물이다. 기도수의 눈알이 뿌옇게 썩었고 그렇게 뿌옇게 변한 눈알이 자주 나왔던 것도 서래의 안개에 의해 그리 되었다는 것, 그리고 해준의 시야 역시 그리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 듯하다. 마침내 서래=안개=사랑이라는 감정 때문에 해준도 기도수의 눈알처럼 눈앞이 뿌예져갔던 것처럼.
우리도 서래처럼, 누군가의 눈앞에선 안개일 것이다. 해서 누군가의 눈앞을 뿌옇게 망가트릴 것이다. 사랑이란 그런 감정인 거니까.
또한 그러한 안개라는 표현은 곰팡이로도 알 수 있다.
초반, 서래를 처음 만난 뒤 아내와의 잠자리 장면에서 해준은 집중하지 못하고 구석에 핀 곰팡이를 주시한다. 또한 후반, 이포에서 서래의 사건을 접한 뒤 혼란스러운 마음에 잠 들지 못해 수면장애를 도와주는 기구를 코에 낀 뒤 천장을 볼 때도 곰팡이를 주시한다.
푸른색과 녹색으로 점칠된 곰팡이가 나는 마치 흐릿한 안개처럼 보였다. 이는 마치 해준의 시선에 또렷이 박혀버린 안개, 즉 서래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아무리 보지 않으려 해도 보일 수밖에 없는 것. 집 안에는 곰팡이, 집 밖에는 안개, 해서 해준은 몇 번이고 인공누액으로 자신의 흐릿한 시선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서래가 나타나 다시 그의 눈앞을 헤집어 놓는다.
계속하여 서래를 생각한다는 것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해준이 마지막까지도 잠 못 이루고 곰팡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던 것은 즉, 계속 그녀 생각이 났다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해준이 그녀의 진심을 끝까지 몰랐던 것은 바로 이 물건을 설명하는 장면에서도 나온다.
< 초록색인가, 파랑색인가 하는 원피스 >
해준은 영화 내내 마지막 그녀의 원피스의 색깔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반면 옆에 있는 여연수 형사는 그럴 때마다 또렷하게 원피스의 색을 정정해주었었다. 영화를 몇 번 보았던 사람들은 알겠지만, 임호산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해준은 끝까지 그녀의 원피스를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옆의 여연수 형사는 계속 '파랑색 맞네 이거!'라며 색을 말해주었었다.
그때 그는 이미 이포에 나타난 그녀의 안개에 휩싸여 제대로 된 사건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나 파랑색으로 보는 그녀의 원피스조차 초록색인지 파랑색인지 분간하지 못하고, 임호산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다. 그것은 서래의 사랑까지 마찬가지였다.
서래는 진심으로 그를 보기 위해 이포에 온 것이 맞았다. 하지만 해준은 그런 그녀의 진심을 모르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그녀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사건을 흐릿하게 보며, 서래의 사랑을 거짓으로 단정 짓는다.
바로 그것이 원피스의 색으로 직결되어 표현된 것이다.
해준이 그녀의 마음을 전혀 모른다는 것. 해준답지 않게 사건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은 것. 영화에서 바로 그러한 해준의 시선을, 누구나 파랑색 원피스라고 표현하는 원피스의 색조차 헷갈려하는 것으로 상징했다. 옷의 색을 똑바로 분간하지 못했던 것은 곧 해준의 흐트러진 시선에 대한 복선이었다. 또한 그것은 바로 영화 내의 연출에서도 표현이 되는데.
"서래 씨. 당신은 지금 살인 사건의 증거를 태웠다고 했습니다."
서래는 임호산의 사건을 덤덤하게 말한다. 오자마자 피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자마자 당신 생각이 났다. 피로 붉게 물든 물을 빼내고, 그 남자의 시체를 닦고, 수영장 바닥에 가득한 피 자국을 닦았다. 피로 범벅된 파랑색 원피스는 그 자리에서 태웠다.
서래의 이 진술은 곧 그를 향한 고백이다.
피를 보니 피냄새를 싫어한단 당신이 생각났고, 그래서 힘 써가며 당신을 위해 피를 모두 없앴다고. 간절히 그에게 고백하지만, 해준이 하는 말이라고는 ‘살인 사건의 증거를 태웠다’는 말이었다. 그녀는 사랑에 빠진 여자로서 말했으나 해준은 유력한 용의자를 보는 경찰로서 대화했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지는 대사였다. 원피스의 색깔조차 분간하지 못했던 것처럼 해준은 서래의 고백조차 듣지 못했다.
“내가 만만합니까?”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
서래가 이포에 온 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다시 만난 둘의 대사. 이 대사에서조차 간극이 벌어진다. 해준은 형사로서 물었지만, 서래는 반면 사랑으로서 답한다.
오로지 당신을 보기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내가 그리 나쁜 건가요-.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나 역시 당연히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처음부터 그녀를 의심했던 해준처럼. 그는 이미 기도수를 죽였었고, 영화조차 연출을 그런 식으로 진행, 심지어는 해준까지 그녀를 임호산을 죽인 범인이라 단정짓는다.
영화는 내내 서래를 임호산을 죽인 범인으로 몰아간다. 해서 관객인 나마저 서래를 범인으로 내세우게 만든다. 마치 해준처럼. '송서래가 또 사건을 덮으려고 거짓말 하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관객인 내가, 마지막 결말에서 해준과 같이 똑같이 뒤통수 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것처럼.
스쳐 지나가는 사랑한다는 말들
"난 완전히 붕괴됐어요."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영화 내내 사랑한다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는다. 둘의 스킨십마저 짧은 키스신이 다이다. 불륜이라고는 하지만 둘은 잠자리조차 하지 않는다. 서래는 저 위의 해준의 말들을 모두 고백으로 들었다.
너무도 선명하게 '당신을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듯한 저 문장들은 사실, 해준의 삶을 의미 없게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해준은 그 누구보다 꼿꼿한 경찰이었다.
살인 사건의 범인인 홍산오가 자살했을 때도 범인을 체포하지 못하고 자살하게 만들었다는 것 때문에 우울증을 앓았을 만큼, 피해자가 떨어진 절벽을 직접 오를 만큼, 서래가 확실한 범인임을 확인하기 위해 절벽을 직접 손으로 힘겹게 오를 만큼 해준은 형사라는 단어가 완벽히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또한 이지구를 제압할 때의 체력과 싸움 실력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삶은 곧 경찰이라는 정체성 그 자체였다.
그랬기에 자신이 고작 여자 때문에 수사를 망쳤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그에게 붕괴였다. 경찰로서 자부심 있게 살아온 자신의 삶이 의미없어지는 것. 그 누구보다 또렷하게 지켜왔던 신념이 고작 감정 때문에 뭉개져버린 것.
그러나 그런 자신의 신념보다도 먼저였던 것은 그녀를 향한 감정이었다.
결국, 그는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말과 함께 사라진다. 서래는 그 장면에서 경찰로서 자부심 있게 살아온 해준의 삶을 그제야 느꼈을지 모른다. 자신으로 인해 붕괴되었다는 그의 말엔 경찰로서 올곧게 살아온 해준의 삶이 짙게 담겨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그 말 하나로 해준이 경찰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보였으니까.
그런데도, 그렇게 제 삶과 신념이 붕괴된 와중에도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해준의 말 때문에, 서래는 비로소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깨우쳤을 것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사랑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장면, 그는 서래가 바로 발 밑에 있는데도 찾지 못한다.
뒤늦게야 그는 서래의 말 뜻을 알게 된다.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이런 녹음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일까- 하며 서래를 찾는 내내 그 의미를 몰랐던 해준은 마지막에 가서야 그녀가 말한 사랑의 말을 깨우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폰을 바다에 버리라는 자신의 말 한마디였다. 해준에게 있어 그 말 한마디는 경찰로서 살아온 제 삶 자체를 내던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러한 신념과 가치관을 버릴 만큼 당신을 사랑한다고. 그러한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당신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서래에게 그렇게 고백했다는 것을 해준은 마지막에 가서야 깨닫는다.
서래는 해준이 자신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갈수록 알아간다. 해준이 끝까지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사랑을 믿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것. 원피스 색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정말 그를 보기 위해 이포를 온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문득 그의 '미결 사건'들이 떠올린다. 집 한 편에 붙여놓은 채 심심할 때마다 몇 번이고 미결 사건 사진들을 들여다본다는 그의 말.
"난 해준 씨의 미결 사건이 되고 싶어서 이포에 갔나 봐요. 벽에 내 사진 붙여 놓고, 잠도 못 자고 오로지 내 생각만 해요."
내가 그에게 미결 사건이 된다면 그는 내 마음을 깨달을 수 있지 않을까. 그제야 내 얼굴을 몇 번이고 사무치게 들여다보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는 그녀 자신이 해준에게 미결 사건이 되기로 결정한다. 정말 그를 보기 위해 이포에 왔는데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해준이었기에, 내가 미결 사건이 되어야 나를 알아보겠구나, 하는 마음에. 자신의 사진을 벽에 걸고 몇 번이고 볼 수 있도록.
끝끝내 해준은 바로 발 밑의 그녀를 찾지 못한다.
뒤늦게 그녀가 정말 자신을 보기 위해 이포에 왔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가 자신과 '헤어질 결심'을 하기 위해 사랑하지 않는 임호산과 결혼했다는 것을, 그녀가 임호산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결국 그녀를 코앞에서 찾지 못한다. 뒤늦게 깨달은 사랑의 감정은 그녀가 그녀 자체로 미결 사건이 되어서야 그를 후려친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고 이러한 말들을 스칠까.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할 말들. 그저 일상 속 한마디로 생각할 말들. 그러나 뒤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소중한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생각해보면 '그게 사랑이었구나' 하는 말들 말이다. 우리는 아마 분명 몇 번이고 그러한 소중한 사람의 사랑한다는 말을 지나치고 못알아들을 것이다. 해준이 서래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 '내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던가?'하며 제 말을 기억하지 못했던 것, 그러다, 그녀가 사라진 뒤에야 뒤늦게 그녀의 사랑과 제 고백을 깨달은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해준은 곧 살면서 몇 번이고 보고 경험할 우리 중 하나였다. 누군가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못한 채 그 사람이 사라진 뒤에야 사랑을 깨닫는 것 말이다. 사라진 사람이 결국 미결 사건이 되어서야 가슴에 사무치게 남는 것.
우리는 해준처럼 몇 번이고 이러한 사랑의 말들을 알아듣지 못하고 뒤늦게 깨달아 후회할 수 있다. 사랑에 대한 방관, 진솔하지 못한 시선을 영화는 덤덤하게 풀었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말들에 집중해야 한다. 깨달아야 한다. 누군가의 사랑 표현을 알아채지 못하고 사랑에 대한 감정을 거부하다가, 뒤늦게 해준처럼 ‘아. 그게 사랑이었구나.’하며 발 밑의 그 사람을 못 찾는 일이 없도록. 눈앞의 그 사람을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그땐 이미 늦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매일매일 누군가의 사랑한단 속삭임을 듣고 있으니까 말이다.
* 영화 속 연출들 *
나는 박찬욱 감독이 만든 모-든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봐야할 작품들은 모두 보았다. <올드보이> <박쥐> <친절한 금자씨> <아가씨> 등등. 특히나 <아가씨>는 10번 가까이 보고 대본집도 샀을 만큼 아주 좋아하는 톱3 영화 중 하나이다. <박쥐> 역시 자주 보고 OST도 아껴 들었을 만큼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였다. 특히 글 쓸 때 조영욱 감독의 음악을 매우 많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답다! 조영욱 감독답다! 라는 연출과 음악이 선명히 보이긴 했지만, 내가 앞서 보았던 다른 영화들에 비해선 아주 무덤덤하고 잔잔하게 스토리 텔링하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나는 영화를 자주 보지도 영화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박찬욱 감독의 영화 작품을 좋아했던 평범한 관객 중 하나로서 느낀 바를 말하자면, '이 분이 이런 분위기도 만드실 줄 아나?' 싶었다. 스토리 자체만 보면 <박쥐>와 비슷하다고 했지만 영화가 표현하는 연출이나 스토리 텔링적인 기술들이결이 다른 것을 느꼈다. 해서, 좋았다. 매우매우.
또한 박찬욱 감독 특유의 연출이 정말 너무너무 환상적으로... 황홀할 만큼 좋았다.
초반부 해준이 서래의 집을 망원경으로 잠복 관찰할 때 일순간 그녀의 집으로 순간이동하여 가까이서 보는 것, 바로 그때부터 '역시...' 싶었다. 소설에서도 그러한 묘사와 표현이 매우 자주 나온다. 내가 소설을 자주 읽고 소설을 쓰는 것이 직업이라 그런지 바로 그러한 연출들이 그 무엇보다도 황홀하게 와닿았었다.
후반부, 서래가 스마트 워치에 해준을 관찰하며 중국어로 속삭인 말들의 번역본, 그것을 해준이 볼 때의 연출도 환상적이었다. 잔잔하게 들리는 서래의 중국어와 강렬하게 클로즈업되는 한국말. 그리고 스쳐 지나가는 해준의 얼굴. 한글로 번역된 서래의 문장이 그 누구보다도 가슴에 와닿을 해준의 감정이 너무도 잘 드러나던 장면이었다.
또, 연출과는 별개로 내가 <헤어질 결심>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으면, 좋아하는 것을 중단합니까?"
서래는 똑바로 카메라를 보며 그렇게 말한다. 카메라 역시 그녀를 정 중앙에 담고 바스트샷으로 클로즈업한다. 이 말과 동시에 바이올린 선율이 쨍! 하고 등장하고 흔들리는 해준의 얼굴이 보인다. 이 장면을 처음 보았을 때 정말 너무 좋아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저 바이올린 선율을 듣자마자 '역시 조영욱' 했었다.
영화 내내 이어지는 선율이나 분위기가 <아가씨>의 OST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더더욱 좋았다.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화면 가득 찼던 해준의 혼란스러운 얼굴과 서래의 얼굴. 영화 통틀어서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쨍! 하고 울리는 바이올린 선율은 해준의 심정 그대로였다. 그를 향한 사랑에 대한 직구 그 자체인 서래의 말 한마디에 심장이 곤두박질쳤을 해준의 심정. 영화관에서 꽉 찬 화면으로 보았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았더라는.
또한 하나 인상 남은 것은 바로 영화 내의 스킨십이었다.
결국 해준의 사랑이 불륜이었던 만큼 만약 서래와 해준의 베드신이 들어갔다면 거부감이 들었을 듯하다. 박 감독 역시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인지는 몰라도, 둘은 영화 내내 짧은 키스와 손 잡는 것, 포옹 빼고는 그 어떠한 짙은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
만약 둘의 베드신이 들어갔다면 아마 둘의 감정이 '숭고한 사랑'보다는 '불륜 욕정'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을 듯하다. 둘의 사랑보다는 불륜에 더 초점 맞춰져 관객으로서 거부감이 들었을 터인데, 둘이 짙은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짙은 여운을 남기게 한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강렬한 스킨십을 하지 않았기에 더욱 애절하고 그래서 더더욱 와닿는다. 둘이 키스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후반부, 이포에서 서래와 해준이 수갑을 차고 경찰차 속에서 불면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에서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잘 때 코를 곤다는 건 아닙니다" 라는 대사에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황홀한 박해일의 연기.
아직도 그 장면에서 느꼈던 감정을 잊지 못하겠다.
초반부에 서래가 기도수의 아내라며 부검실에 등장하여 해준과 처음 만났을 때. 해준 얼굴이 영화관에 꽉 차서 클로즈업되는데, 해준은 몇 초간 서래를 그저 말없이 물끄러미 보기만 하다 겨우 "패턴을 좀... 풀어주셔야겠는데요."라고 간신히 말한다.
바로 이때 박해일의 표정을 잊지 못하겠다.
사랑에 빠지는 찰나의 인간은 이리도 아름다운가.
* 그 외에 기억나는 대사들 *
"우는 구나. 마침내."
"참... 불쌍한 여자네."
"당신 만날 방법이 오로지 이것밖에 없는데 어떡해요."
"이걸로 재수사해요.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아주 오랜만에 진한 여운이 남는 영화를 보았다. 며칠 내내 이 영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명대사와 장면들을 읊어보고 오늘 3회차까지 보고 난 후에야 제대로 감상평을 적을 수 있었다. 그래서... 조영욱 감독님이 OST를 내주기만을 아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쨍하게 울려퍼지던 바이올린 선율과 막판, 해준이 서래를 찾아 돌아다닐 때, 거친 파도에 몸 맞아가면서 서래를 부를 때 들리던 바로 그 음악을.
결국 미결이 되어버린 둘의 사랑에 대한 흔적을 집에서나마 느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