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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가가일 Jan 26. 2024

출산 예정일을 7주 앞두고 끊은 항우울제

출산 직후 다시 복용해야 하지만 일단은 좋다


지난해 10월 말에 반년 간의 한시적 단축근무가 끝이 났다.


결과는 대성공. 순전히 내 기준에서의 결과지만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단축근무 기간 동안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고 임신 초중기도 잘 보내고 일을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일을 적당히 함으로써 내 자존감도 컨디션도 우상향 곡선을 그리며 좋아질 수 있었다.


11월에 다시 시작된 100프로 풀타임. 딱 이주 동안 열심히 일하고 보여주기식 프로젝트도 잘 보여주고 2주간의 휴가로 튀었다.


춥고 내리 비가 오고 무엇보다 해가 없는 독일의 우울증을 부르는 겨울을 뒤로하고 따듯한 스페인 섬 마요르카로 가서 태교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휴가에서 돌아와서 다시 삼주 동안 보여주기식 프로젝트를 잘 보여주고 크리스마스 연말 휴가 일주일에 들어갔다. 독일 모든 회사들이 그런 것은 아니고 일부 제조사들은 고객사가 크리스마스이브부터 신년까지 공장가동을 중단하는 경우 자체 공장도 문을 닫는다. 내가 다니는 회사 또한 제조업에 속해서 운 좋게 강제 연말 휴가 일주일을 또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1월. 다시 보여주기식 업무와 인수인계를 잘 마무리하고 딱 열흘 일한 뒤에 두 달간의 산전 휴가에 들어갔다. 산전휴가는 원래 출산 6주 전인데 올해 휴가를 산전휴가 전에 바로 써서 다행히 예정일까지 두 달을 쉴 수 있다. 그리고 출산 후 일 년에서 일 년 반 정도 100프로 육아휴직을 한 후 반년에서 일 년 정도 육아휴직 중 파트타임 (50~80프로)을 할 계획이다. 다행히 대기업이라 HR이 육아휴직에 매우 우호적이고 복귀예정일 3개월 전에 육아휴직 기간을 줄이거나 늘이거나 유동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육아휴직 자체는 독일 노동법상 보장된 것이나 휴직기간 조정에 대한 부분은 회사마다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의 육아휴직에 대한 유동적이고 직원 우호적인 내규에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커리어에 대한 욕심을 좀 내려놓으니 몸도 마음도 미래에 대한 비전도 매우 건강해지고 긍정적으로 변한 것을 하루하루 느끼고 있다.


매일 매 순간을 계획하고 또 계획하며 살아온 지난 날들 속에서 나는 병들어 갔다. 노력 끝에 성취를 해 내면 그 성취는 당연한 것이고 또다시 다음 목표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스스로 그 어떤 것에도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세 번의 번아웃과 우울증을 겪고 무엇보다 지난봄 롱코비드가 촉발제가 된 것으로 의심되는 가장 최근의 우울증을 경험한 후로 내 인생은 많은 것이 바뀌었다. 아직 항우울제를 계속 복용해야 하고 공식적으로 완치판정은 받지 않았지만 체감상 지난여름 이후로 나는 전혀 우울하지 않다. 그저 에너지가 살짝 떨어지는 정도일 뿐 임신한 후로 나의 멘탈은 그 어느 때보다 좋다. 어쩌면 태어난 이후로 가장 좋은 멘탈과 함께 가장 행복한 것 같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의 처방에 따라 산전휴가 6-7 동안은 항우울제 복용은 중단하기로 했다. 복용 중인 Escitalopram 한국에서는 렉사프로로 알려진 이 항우울제는 임신 중에도 출산 후에도 안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적어도 독일에서는 대부분의 의사가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나의 정신과 주치의도 산부인과 주치의도 임신 중에도 출산 후 수유 중에도 복용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안심시켜 주었는데 내가 계속 임신 중 약 복용을 찝찝해하니 그럼 출산 전 6-7주만 잠깐 약 복용을 중단하라는 처방을 받았다. 아주 희박한 확률로 이 항우울제를 복용한 산모의 경우 신생아가 출생 후 심리적으로 불안정해서 많이 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단 약 복용을 한시적으로 중단하고 출산 직후부터 다시 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출산 직후 호르몬의 변화로 산후우울증의 위험도가 이전에 우울증을 경험한 산모의 경우 배로 높다고 한다. 현대의학을 신뢰하는 나로서는 (무한 신뢰는 아니지만 다른 대안을 생각하기엔 그나마 검증된 현대의학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에) 전문의의 말을 일단 듣기로 했다.


오늘부로 당분간 약을 안 먹어도 된다. 임신의 과정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이 너무 행복하고 독일에서의 임신이라 수많은 복지혜택에 그저 감사한 임신기간을 보내고 있다.


열심히 살아서 걸린 번아웃 우울증,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열심히 살아서 독일에 그리고 현재회사에 자리를 잡은 덕에 우울증도 빨리 호전되고 있다.


앞으로 계속 열심히 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일단 육아휴직 이년 동안은 성과에서 자유다. 굳이 너무 애쓰며 열심히 살지 않고 그저 순간순간 행복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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