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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Sep 13. 2023

16년 차 스트라이커의 비밀

나는 골키퍼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절대 키가 커서 골키퍼가 된 건 아니었다. 키가 큰 도움이 된 건 맞지만.


생각해 보면 겁도 없었다. 아니, 무모했다. 안경을 쓰고 골문에 서 있었으니. 다행히 지금껏 골키퍼를 하다가 축구공에 안경을 파괴당하는 일은 없었다. 호흡이 아주 잘 맞는 내 민첩한 발손도 얼굴에 공이 맞는 걸 허락하지 않았고. 그런데 엄마가 이 사실을 알면 화를 내려나?


6학년이던 2000년에는 경기도 초등학교 축구대회에 여주 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했다.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동두천에 패배하며 대회는 일찍 마감했지만 완공을 앞둔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고종수, 샤샤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과 만난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때 나의 꿈은 국가대표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었다. 월드컵에도 나가고.


중학교 3년은 농구 코트에서 보내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다시 축구부 골키퍼가 되었다. 키는 어느덧 1.9m 가까이 자라 있었다. 우리는 인문계 학교라 축구부 훈련은 대회 한 달 전부터, 그마저도 석식 전 한 시간뿐이었지만 밀도가 있었다. 감독님께서 현역 시절 골키퍼셨던 덕분에 특별 코칭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학교에는 샤워시설이 없어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채 석식을 먹고 야간자습을 했다. 이런 생활은 고3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운도 좋았다. 주전 골키퍼로 출전한 두 번의 지역대회 전 경기에서 무실점으로 우승한 것이다. 당연히 훌륭한 지도자와 팀원들 덕분이었다. 교내 축구대회에서도 축구부 후배들이 잔뜩 포진한 2학년 최강 반을 꺾고 우승했는데 승부차기를 무려 세 개나 막았다. 아, 하나는 슛이 떴지 참... 그날 이후 나는 헤밍웨이처럼 한동안 여학생 몇몇이 나를 주시하는 것 같다는 망상에 빠지게 되었다. 망상의 실체도 헤밍웨이와 같았고. 그렇게 나의 10대는 아름답게 마무리되었다.


대학에 가자마자 신분을 세탁했다. 학과 선배들에게 학창 시절 내내 축구부 스트라이커로 뛰었다고 날조한 것이다. 친구들끼리 공을 찰 때는 종종 공격수로 나서는 경우가 있었지만, 대회에 출전하는 팀에서 골게터로 뛴 것은 대학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운이 좋았다. 인문대에서는 보기 드문 실력과 열정을 가진 축구인들이 나와 비슷한 시기에 우리 학과에 입학한 것이다. 인문대 최강으로 군림한 우리 교육학과는 체대와 공대가 모두 출전하는 총장 배 축구대회에서 준결승에 진출하는 등 전무한 데다 후무할 역사를 썼다.


입대 후에도 세탁은 계속되었다. 자대배치 첫날 축구를 좋아하냐는 선임의 물음에 "잘합니다."라 대답했고, 포지션이 무어냐는 질문에는 "골을 넣습니다."라 말한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벌어진 군에서의 첫 경기에서 나는 여섯 골을 넣었다. 목숨을 걸고 뛰었다는 표현이 아주 잘 어울리는 경기였다. 아마 뱉은 말을 증명하지 못하면 탄광 같은 곳으로 보내지리라 상상했던 것 같다.


몇 달 뒤에는 행정보급관님 추천으로 연대 체육대회에 출전하는 대대 축구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 팀에는 세미프로 출신부터 현직 코치를 비롯해 훌륭한 축구용사들이 많았는데, 그 덕에 나는 대회에서 뛰지 않고도 준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서운하거나 자존심이 상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들과 나의 실력은 그 이상 차이가 났으므로. 대회를 마치고 자대에 돌아오니 일등병이 되어 있었다.


전역 후에는 사회인축구팀에 가입했다. 대학교 선배들과 친구들이 주축인 팀이었다. 이 팀과 함께 서울을 무대로 뛴 경험과 5년 동안 팀의 감독으로 쌓은 경험은 나의 첫 책인 '축구하자!'가 되었다.


서른 살에는 2017 오슬로 홈리스 월드컵에 출전하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코치가 되었다. 태극마크를 달고 월드컵에 나가고 싶다던 어린 시절 꿈을 이룬 것이다. 내가 이 팀의 코치가 된 건 '축구하자!' 출간기념회에 홈리스 월드컵 대표팀의 매니저님께서 찾아오신 것이 계기였는데, 이와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는 내 브런치북 축덕, 국가대표 코치 되다 에서 읽을 수 있다.


홈리스 월드컵 대표팀에서는 수석코치, 미디어 담당자, 그리고 두 명의 골키퍼 전담 코치를 겸했다. 고교 시절 축구부 감독님께 배운 것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홈리스 월드컵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 커뮤니티 공식 방송국의 해설자가 되어 한 시즌 동안 주제 무리뉴가 이끄는 맨유의 프리미어리그 경기와 유럽대항전을 중계했다. 홈리스 월드컵에 이어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완도에 닻을 내린 지금도 나는 사회인축구팀의 스트라이커로 뛰고 있다. 매주 일요일, 두어 시간씩. 여기서도 '운 좋게' 훌륭한 선수가 많은 팀에 가입하게 되었는데 이 팀과 함께 완도 사회인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적도 있다. 사회인이 되고는 첫 우승이었다.


한편 골키퍼와 스트라이커는 비슷한 점이 많다. 전형의 극단에 위치하고, 결과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으며, 큰 키가 장점으로 작용하고, 미남자들만 할 수 있다는 점 등...(당연히 진담이다.) 두 포지션의 차이점은 경기를 대하는 태도에 있는데 골키퍼가 실수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보수적인 태도를 갖춰야 한다면, 스트라이커는 실수를 무릅쓰고서라도 도전적인 태도를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스무 살이 되어 자력(?)으로 페널티 에어리어를 벗어나 스트라이커가 된 나는 그로 인해 내 인생의 궤도가 조금 달라졌음을 실감한다. 보다 더 진취적이고 보다 더 용감하게 삶에 맞서게 된 것이다. 안정적인 선택이 필요할 때조차 막을 수 없는 무회전 슈팅을 때리겠다며, 마음대로 휘두르는 건 심각한 문제지만.(알다시피 무회전 슈팅은 키커조차도 공의 궤적을 예측할 수 없다.)


골키퍼 글러브를 벗은 지도 어느덧 16년. 달인이 되고도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이지만 여전히 스트라이커는 내게 골키퍼만큼이나 어렵고 버거운 임무다. 내 발에 쥐어진 이 공이 골키퍼를 포함한 다른 모든 팀원들이 한 땀 한 땀 보내온 공이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고. 그러나 나는 내일도 무회전 슈팅을 시도할 것이다. 나는 스트라이커고, 스트라이커의 운명이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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