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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축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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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인 Sep 08. 2016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가 실사판

해리 래드냅과 스티브 데이비스 이야기

1994년 어느 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의 수석코치였던 해리 레드냅은 3부 리그 클럽 옥스퍼드 유나이티드와의 친선경기를 벤치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리그 개막에 앞서 팀의 전력을 체크하고 주요선수들의 컨디션을 살피는 것이 이 경기의 목적. 허나 전반전이 치러지는 내내 레드냅은 계속해서 심기가 불편해졌다.


상대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웨스트햄 선수들이 부상을 입은데다가 관중석에는 계속해서 웨스트햄 코치진과 선수들을 향해 도가 지나친 응원을 퍼붓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어나 이 당나귀 같은 녀석아, 그것 밖에 못해?”

“니가 그러고도 프리미어리그 선수야? 쓸모라곤 없는 녀석”

“내가 뛰어도 그것보다는 더 잘 뛰겠다! 당장 나와 교체하자!”


거친 태클에 웨스트햄 공격수 리 채프먼이 나가 떨어지자 관중석에 있던 ‘문제의 훌리건’은 이처럼 욕설에 가까운 응원(!?)을 퍼부어댔다. 그것도 웨스트햄 수석코치 해리 레드냅의 바로 뒤에서!


레드냅의 분노가 폭발하기 바로 직전, 다행히도 전반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다.


가까스로 눈 앞의 화를 참아낸 레드냅이었지만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부상을 입은 리 채프먼이 더 이상 경기를 뛰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채프먼 이외에도 교체가 필요한 선수가 네 명이나 더 있었다.


부상이 덜 심각한 선수들을 급히 치료하고, 포지션에 상관없이 후보선수들을 집어 넣어 스쿼드를 짜보아도 한 명이 부족한 상황.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던 찰나 레드냅의 머리 속에 위험하고도, 재미 있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레드냅은 라커룸을 나와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욕설을 퍼붓던 관중석의 훌리건'에게 큰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봐, 자네 아까 *리보다 더 잘 뛸 수 있다고 했었지?"

(*리 채프먼)


한편 웨스트햄의 열혈 팬 스티브 데이비스(Steve Davies)는 오늘 *해머스의 경기 내용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의 거친 태클에 당황하는 모습은 물론, 투지라고는 살펴볼 수 없었던 프리미어리그 클럽의 태도까지도.(*웨스트햄의 애칭)


그는 웨스트햄이 아스널을 꺾고 우승을 차지한 1980년 FA컵 경기에 매료되어 팬이 된 인물인데, 한때는 아마추어 축구선수로도 활약을 했었다. 그는 웨스트햄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오늘 경기는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런 그에게 웨스트햄의 수석코치 해리 래드냅이 말을 건넸다.


"이봐, 아까 그 패기는 어디간거야? 더 잘 뛸 수 있다며?"


스티브는 레드냅의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그 당나귀 녀석보다는 내가 백배 나을 겁니다!"


"좋아. 그러면 그 말을 증명해보도록 하게. 나와 함께 라커룸으로 가서 후반전을 준비하도록 하지"


스티브는 그날의 놀라웠던 경험을 이렇게 회상한다.


"라커룸에 들어서자 채프먼이 상의를 벗은 채로 앉아 있는 걸 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는 제게 ‘발 사이즈가 어떻게 되지?’라고 물었습니다."


후반전이 시작되고 장내 아나운서가 스티브의 경기 투입을 알렸다. 옥스포드 선수들은 물론 경기장을 찾은 팬들 또한 술렁였다. 해리 래드냅만이 옅은 미소로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티브는 이후 벌어진 일들을 이렇게 설명한다.


"후반전 첫 5분은 숨조차 쉬기 힘들었어요. 경기의 속도는 제가 경험했던 선데이 리그와 너무나도 달랐고 옥스포드 선수들은 굶주린 짐승처럼 제게 달려들었습니다.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었고, 저는 제가 했던 말들을 후회하기 시작했어요."


"제 터치는 엉망이었고, 사실상 10:11로 뛰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경기는 옥스포드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93/94시즌 프리미어리그 준우승 팀이 3부 리그 클럽에게 쩔쩔 매는 꼴이라니..."


"그런데..."


"갑작스러운 웨스트햄의 역습이었습니다. 공은 윙어 매티 홈즈에게 있었고 그는 상대 측면을 노련하게 허물었습니다. 저는 두 명의 중앙 수비 사이에서 크로스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 상황에서 가장 적절한 위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매티가 올린 크로스가 이상했습니다. 상대 수비를 지나서 제 발 앞에 떨어진 거죠. 제 첫 터치는 페널티 에어리어를 벗어나지 않았고, 정신을 차려보니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들렸습니다. 골이었어요. 제가 득점을 한거죠!"


스티브의 골에 힘입어 웨스트햄은 옥스포드에게 승리를 거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식 경기는 물론 프리시즌 경기에서도 '선수등록법'이 생겨 더 이상 일반인이 프로 팀의 경기에서 뛰는 일은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스티브는 평생 ‘해머스’의 유니폼을 입고 골을 넣었던 경험을 자랑스럽게 간직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도 꿈만 같습니다. 해리는 그 후 감독으로 승승장구 하더군요. 그럴만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지도자가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어요!"


해리 레드냅 역시 훗날 토크쇼에 나와 이 일을 회상했다.


"저는 '새로운 선수를 영입한 것이냐'는 다른 코치의 물음에 '미국월드컵에서 활약한 티티셰프라고 아나? 우리가 그를 영입 했다네.'라 대답했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죠. 티티셰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제가 지어낸 이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날 스티비는 월드컵 MVP 못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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