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_속도보다 중요한 것
글쓰기에는 리듬이 있습니다. 글을 읽을 때도 리듬을 고려해야 합니다. 어떤 책은 한 번도 쉬지 않고 단숨에 읽어 내려갈 수 있는데 비해 또 어떤 책은 한 페이지를 읽는데도 두 시간이 걸리는 것은 글의 리듬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곱씹을만한 것이 많은 책일수록 읽는 시간이 좀 더 걸리죠. 예전에는 책을 빨리 읽고 싶어서, 일곱 달 동안 속독법速讀法을 배운 적도 있습니다. 속독법이 익숙해진 다음에는 소설책 한 권을 다 읽는 데는 5분 정도면 충분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속독법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속독으로 읽으면 글의 작은 부분에서 느껴지는 감동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다른 사람보다는 책을 좀 빠르게 읽는 편이지만, 이것은 속독법 덕택이 아니라 글을 덩어리chunk로 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한 사람은 중학교 수준의 과학책은 슥슥 읽으면서 지나갈 수 있습니다. 책 읽는 기술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문장의 내용을 덩어리로 파악하면서 빠른 독서가 가능해진 것이죠. 아는 것이 많으면 빠르게 읽겠지만, 알아야 할 것이 많으면 천천히 읽어야 합니다. 곱씹는 것도 독서의 과정이니까 책을 읽는 속도가 느리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독서량이 늘고, 생각이 많아질 수록 속도도 빨라집니다.
책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고 해서 걱정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마다, 책에 따라 읽는 속도가 다르다. 내 경우, 어떤 책은 반나절이면 한 권을 다 읽습니다. 과학 에세이가 그렇습니다. 일반인을 위한 과학책은 과학 전공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쉬운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인문학에 대한 내용은 읽는 속도가 느립니다. 행간을 파악하고, 글쓴이의 생각을 유추하면서 읽어야 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이런 책에서 저자의 의견이 내 생각과 다른 부분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읽기를 멈추고 책에 내 생각에 써 넣습니다. 책이 주장하는 생각에 내 생각을 맡기고 싶지 않기 때문인데, 고전을 읽을 때는 특히 속도가 많이 느려집니다. 나는 매 년 한두 권 정도를 느리게 읽을 책으로 선택합니다. 대부분 원문이 한자나 영어로 된 고전입니다. 이런 책을 읽을 때는 노트에 원문을 옮기고 작가의 생각을 풀이한 다음 내 생각을 덧붙입니다. 읽는 양보다는 쓰는 양이 더 많아질 때도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읽기 위해 노트 한 권을 필기로 채운 적도 있습니다. 전에는 일 년에 책을 몇 권 읽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에, 밤의 새워가며 책을 읽기도 했는데, 이제 그것이 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책은 그 책을 쓴 저자와 깊이 대화하는 것입니다. 단편적으로 기억해야 할 ‘지식’을 주워 담은 책이라면 오히려 읽기 편하지만 생각이 많아져야 읽을 수 있는 책이라면 한 권을 읽는데 일 년이 걸리든 이 년이 걸리든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2019년까지는 제자백가를 이런 방법으로 읽었는데, 2020년 들어서는 중국 반체제 지식인 유재복(류짜이푸)의 『면벽침사록面壁沈思錄』과 방송통신대학교 김성곤 교수의 『리더의 옥편』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읽는 책은 네 종류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빠르게 읽으면서 좋은 문장과 표현을 찾기 위한 책입니다. 잘 써 놓은 소설 종류가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는 지식이 가득한 책입니다. 자연과학책이나 학습서 종류가 바로 그런 책이죠. 세 번째는 밑줄을 그어 놓고 옮겨 적기 위한 책입니다. 명상록이나 수필류의 책이 여기 속합니다. 마지막은 느린 속도로 읽으면서 대화하고 논쟁할 수 있는 책입니다. 전통적인 고전이 바로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전古典에 들어 있는 내용은 대부분 사람의 속성과 세상의 흐름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작자의 주장이 강하게 배어 있고, 그 속에는 새겨들을 말이 많지만, 내 생각과 달라서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도 적지 않습니다. 책의 내용과 내 생각이 다른 경우에는 논쟁의 소재가 만들어집니다. 이미 세상에 없는 저자와의 행복하고도 깊은 논쟁이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죠.
내가 읽는 네 종류의 책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두 나름의 재미가 있고 각각 다른 유익을 안겨줍니다. 독자가 어떤 책을 선택해서 읽든 한 가지 명심할 것은, 책을 빠르게 읽든 느리게 읽든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으며, 책의 종류와 읽는 상황에 따라 읽는 속도와 리듬이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사계절 가운데 여름이 좋다, 또는 겨울이 좋다고 한 마디로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