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서른일기

버드박스

2019년 4월 7일

by 제인

시각이 차단된 종말의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작은 아이들과 발버둥 치는 한 여자, 그리고 미지의 존재를 감지하는 버드 박스(bird box). 본다는 것 그리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실 내겐 그 어느 것보다 잃기 두려운 감각이 시각이다. 볼 수 없다면, 게다가 죽을힘을 다해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면 더더욱 말이다.


-세상의 끝에 내몰린 약자

임산부, 노인, 게이, 불안한 젊은이 둘, 흑인

결국 가장 위험한 순간이 오면 그 끝에 간절하게 매달려있는 사람은 사회의 약자들이다. 영화가 시작되고 제일 처음 시작되는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전부 약자에 속한다. 가장 먼저 게이이자 아시아인인 집주인이 죽는다. 다음으로는 임산부, 다음은 두 남녀 노인들. 그리고 끝에는 건장한 흑인 남자가 죽고 주인공과 아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이 순서까지 의도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비약일 것이다.


-볼 수 있는 미친 자들

정신병원을 탈출한 인간들과 이미 미쳤던 인간들에게는 이 미지의 존재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을 봐도 무언가에 각성되지 않으며 자살하지도 않는다. 결국 이 미친 자들만 살아남아 생존하려는 눈을 감은 자들을 쫓고 죽인다. 왜 이 자들은 외부 세상을 보아도 아무 영향이 없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점이 아쉬웠다. 아마, 이미 미쳐 돌아버린 인간에게는 딱히 지켜내야 할 것도 두려울 것도 없는 점이 미지의 존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이유일 수도 있다. 그들에겐 이 세상의 종말이 무섭지 않을 테니. 또는 미친 사람들만 남은 세상은 진정한 인류종말의 의미와 맞닿아 있어서 미친 자들은 이미 인간이 아닌 게 되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볼 수 없는 순수한 자들

영화의 결말엔 감각 중 시각 잃어버린 자들만이 살아남는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볼 수 없을 뿐, 누구보다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오히려 단편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복합적인 '시선'을 가졌다. 극 중 시각은 누가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보느냐의 중요성을 상징한다.


-자유의 새와 인간

미지의 존재를 가장 빨리 감지하는 새를 상자에 넣고 늘 지니고 다닌다. 새는 자유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새는 가고 싶은 곳 그 어디든 날아갈 수 있는 자유 그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 새가 어두운 새장에 갇혀 그 작은 날개는 고이 접혀 있다. 눈을 감고 생존하는 사람들과 겹쳐 보인다. 말로리와 아이들이 은신처에 도착했을 때야 비로소 새는 상자에서 벗어나 훨훨 난다. 그곳이 온 세상이 아닐지언정, 적어도 살 수 있고 날 수 있는 공간에서나마 자유를 펼친다.


인간이란 새와 같은 존재다. 버드(bird)는 인간을 의미하고 박스(box)는 사람들이 사는 우물 같은 세상을 의미한다. 인간은 어디로든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존재다.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고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다양한 상황을 마주하고 자신이 배워온 것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 선천적으로 우리의 세계는 온 세상이지만 후천적으로 나의 세상은 우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버드박스처럼. 그곳에 있어야 살아남아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은 외로우며 때론 가혹하다. 날개가 있다고 펼쳤다가 그 날개가 부러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을 향해 날 수 있는 마음을 여전히 품고 있다. 그렇게 빛나길 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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