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
새파란 하늘에 손으로 찢어놓은 듯한 솜사탕 같은 새하얀 구름을 보며 생각한다.
‘저렇게 나를 매혹하지만 막상 저 속에 폭 안기면 나는 끝도 없는 나락으로 추락하겠지..’
비에 젖어 아직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축축한 벤치에 누워 마냥 하늘만 바라보다 드디어 결심이 선 듯 핸드폰을 꺼내 든다.
“예약 좀 하려구요.. 네.. 그 시간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오랫동안 미뤄왔던, 하지만 오랫동안 바래왔던 그것.
나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
언젠가 독립을 하면 내가 경제적 여유가 생기면 나도 나의 과거를 치유하리라. 남들이 꾸지 않는 이런 꿈이나 꾸고 있던 나는 드디어 꿈을 향해 한발을 내딛었다.
“안녕하세요..”
하얀 가운을 입고 살짝 헝크러진 매력적인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옅은 미소를 지며 나에게 손짓하는 그녀..
이제 나의 과거를 그녀에게 낱낱이 고백하고 나는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 훨훨 날 것만 같은 자유를 얻을 수 있겠지.이러한 기대를 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간다.
“제가 어릴 때 상처가 좀 많아요.. 외로웠고.. 항상 혼자였어요..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표현하지 못 했어요..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는 쇼파에 누워 혼자 동화책 테이프를 틀어 듣곤 했어요..
조금 더 크고 나선 집이 무서워졌어요.. 벨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쿵쾅거렸어요..
마음 속으로는 이 모든 걸 다 해결해 버리고 싶은데 현실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덩치 큰 어린아이였어요.. 바보 같이..”
나에게 보일듯 말듯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를 마주보고있자니 지난 세월을 다 토해내기라도 할 것처럼 나도 모르게 말문이 터져나왔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내 운명인 것일까. 그녀와 함께 있으면 지나간 세월도, 내가 겪었던 아픔들도 모두 오늘 그녀를 만나기 위해 거쳐야 했던 과정이었을까. 혼자 피식 웃어본다.
말수가 적지만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있는 헝크러진 머리칼의 수수한 그녀가 좋다. 그녀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고 내 마음을 바라본다.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내 내면의 세계로 더 깊이, 아주 더 깊이 빠져든다. 그녀는 나를 살게 한다. 이제 나는 그녀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녀를 알기 전에 나는 혼자였다. 나는 언제나 이런 사랑을 꿈꿨다. 둘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하나 같은 둘. 둘 같은 하나. 너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고 내가 너를 있게 한다. 나는 항상 너를 바라본다.
그녀가 가끔 우울해 보일 때 나는 사랑하는 그녀를 위로하려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그녀는 가끔 찡그리기도 또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나는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모든지 할 수 있다. 그녀는 이제 내 전부다.
그녀를 알게 된지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이제 외롭지 않다. 힘들었던 과거도 이제 어느 소설 속에서 본듯이 띄엄띄엄 내 기억의 저편을 조그맣게 차지할 뿐이다. 그녀와 나는 영혼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이제 하나다.
그녀를 또 만나고 싶다.
요즘엔 그녀가 나를 만나주지 않는다. 내가 무엇을 잘못하기라도 한걸까. 마음이 조급해진다. 나는 그녀 없이는 안 되는데..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다 결심이 선 듯 핸드폰을 꺼낸다.
“저기, 예약 좀 하려고요.. 네.. 그 시간 좋아요.. 네.. 알겠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오늘은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저기 xx 선생님 계시죠? 저는 xx인데요. 제가 왔다고 좀 알려주세요.”
건성으로 흘깃 나를 본체만체 하는,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한다.
“뭐라구요?”
“네.. xx선생님 지금 계시나요? xx가 찾아왔다고 말씀 드리면 아실 거예요..”
여자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자기가 무언가를 잘못 들은 것처럼 다시금 나에게 묻는다.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니, 방금 말씀 드렸잖아요.. xx선생님 찾는다구요.. 저 쭉 여기 다녔어요.. xx라고 말씀 드리면 아신다니까요..”
“… 그런 분 여기 없어요.”
“네?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제가 여기 다닌지 벌써 얼마나 됐는데..”
“여기 그런 분 없다니까요. 그리고 여긴 남자 선생님 한분밖에 진료 안 보세요. 그리고 뭔가 착각하신 것 같은데 지금 말씀하시는 분도 여기 오신 적 없어요. 진료 기록을 찾을 수가 없네요.”
머리가 멍해진다. 그럴리가 없다.
이 여자가 일 하기 싫어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사랑하는 그녀가 나를 피해 저 먼 곳으로 세상 끝으로 도망이라도 친 것일까..
저 쪽에서 배가 나온, 기름진 머리에 입꼬리를 한껏 올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흰 가운을 입은 한 남자가 보인다.
여자가 이제는 정말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신경질적으로 말한다.
“볼일 끝났으면 이제 가보세요. 저희도 점심시간 다 됐어요.”
갑자기 한기가 느껴진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나의 머릿속 모든 기억들이 제자리를 못 찾는 모양이다.
나의 모든 시간이 정지됐다.
불현듯 묻고 싶은 게 생겼다.
“저기 오늘 날짜가.. 오늘 몇월 몇일이죠?”
이제 저 여자의 눈엔 무언가 두려움이 서려 있다.
“x월 x일이요. 근데 왜 그러세요..?”
머리가 아득해져 온다.
새파란 하늘에 손으로 찢은 듯한 새하얀 구름..
나를 매혹하는 그것에 안기면 끝도 없이 추락하겠지..
모든 것이 거꾸로 보인다. 아득하게 들리는 사람들의 분주한 발소리. 새하얀 것이 내 눈을 덮고 내 몸은 새파란 하늘 위로, 새하얀 구름 위로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안긴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나락으로 추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