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끼 다 챙겨 드세요?”
새로 등록한 요가원의 원장이 내게 던진 말이었다.
경영난으로 문을 닫은 단골 요가원을 뒤로하고, 겨우 정착할 곳을 찾아온 두 번째 날이었다.
“10kg만 빼세요. 그럼 아사나(요가 동작)의 질이 달라질 거예요.”
나는 갑상선 항진증이 있어 약을 먹고 있고, 살이 잘 안 빠진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자,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건강 지식’을 쏟아냈다.
식초를 물에 타서 마셔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용융 소금을 먹어라.
버터를 먹어라.
언제 무엇을 먹고 어느 식당에 가야 하는지까지, 나의 하루는 순식간에 그녀의 설계도 위로 올라갔다.
그녀는 돕고 싶은 마음이라도, 기분이 나빠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평소라면 불쾌해하며 흘려보냈을 말들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이상했다. “아사나를 더 잘할 수 있다”는 말이 나를 붙잡았다. 홀린 듯 버터와 소금을 주문했다. 그것이 내 몸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는 일인 줄도 모르고.
다음 날 아침, 내 심장은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불안이나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몸이 보내는 비명이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요즘 이 증상이 반복되고 있었다는 걸. 챗GPT는 심계항진일 가능성을 말했다. 항진증 환자에게 장시간 공복은 독이라고 덧붙이면서.
그제야 기억이 났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너지를 빠르게 연소하는 내 몸에 공복은 사치라는 것을. 식초도, 버터도 내 몸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불과 몇 달 전 경험으로 배웠으면서, 나는 왜 다시 '살 빼면 좋아진다'는 말에 속절없이 휘둘렸던 걸까.
작년 6월, 처음 항진증 진단을 받던 날 의사에게 물었다.
“항진증은 살이 빠지는 병이라는데, 저는 왜 자꾸 살이 찔까요?”
의사는 나를 바라보더니 대답했다.
“그러게요. 도대체 얼마나 드시는 거예요? 탄수화물을 끊다시피 해야 해요.”
의사의 말을 믿고 식단을 조였다가 나는 병원에 실려갈 뻔했다.
나중에야 알았다. 항진증 환자 중에도 체중이 느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걸. 그것은 '덜 먹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고장난 대사를 복구해야 하는 '순환'의 문제였다는 것을. 서양의학 의사에게 받은 서운함을 이끌고 찾아간 한의원에서 순환을 돕는 약을 먹은 지 이틀 만에 체중이 2kg 줄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 몸은 게으른 것이 아니라, 간절히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내 인생에서 '살 빼라'는 요구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있었나?
유일하게 평온했던 시절은 미국과 스위스에 머물 때였다. 그곳에서 타인의 몸을 평가하는 것은 무례함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달랐다. 살 빼라는 말을 듣지 않았던 유일한 시기는 키 160cm에 몸무게 45kg을 유지하던 대학교 3학년 때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날씬해서 보기 좋다고, 예뻐졌다고. 그때 나는 그 찬사만을 먹고사는 좀비였다. 서 있을 힘조차 없었고, 매 순간 피로의 늪에 빠져 있었다.
50kg일 때도,
그보다 더 나갈 때도,
사회는 늘 내게 ‘자기 관리’라는 채찍을 휘둘렀다.
최근 영화 <어글리 시스터 (원제: The Ugly Stepsister)>를 보았다. 극 중 주인공의 나체가 두 번 등장한다. 초반의 나체는 풍만하고 아름답다. 정작 주인공은 그 몸을 견디지 못한다.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 나체는 다르다. 살을 깎아낸 몸은 어딘가 위태롭고, 공허하다. 그 대비를 보고서 나는 이해했다. 살이 빠진 몸이 언제나 더 아름다운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쉽게 “살을 빼라”는 말을 타인에게 건넬 수 있을까.
“다 너를 위해서야.”
잠깐, 정말 그 말은 상대를 위한 말일까,
아니면
우리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일까.
심리학자 알버트 반두라는 이런 현상을 ‘대리 통제(Proxy Control)’로 설명한다. 자신의 삶에서 통제감과 효능감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타인의 선택과 행동을 교정함으로써 “나는 여전히 영향력을 가진 존재다”라는 감각을 회복하려 한다.
여기에 사회학자 어빙 고프먼이 말한 ‘낙인(Stigma)’의 메커니즘이 겹쳐진다. 마른 몸은 성실함의 증거가 되고, 그 기준에서 벗어난 몸은 관리 실패로 분류된다.
결국 “살 빼면 건강해져”라는 말은 다정한 조언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정상 범주’에 속해 있음을 확인하려는 통제의 언어가 되기 쉽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이 언어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에게 “살 빼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건강해지려면 이걸 먹어봐.”
“이건 몸에 안 좋아.”
“이 방법이 훨씬 좋아.”
그 말들이 정말 상대를 위한 조언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안심하기 위해, 상대를 관리 가능한 상태로 두고 싶었던 것일까. 상대의 몸을 걱정한다는 명분 아래, 그 사람의 선택과 속도를 존중하기보다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이끌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제야 깨닫는다. 통제는 언제나 명령의 얼굴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을.
때로는 배려의 언어로,
때로는 전문가의 조언으로,
때로는 선의라는 가면을 쓰고,
조용히 나타난다는 것을.
“지금 제 최우선 순위는 날씬해 '보이는' 게 아니라 건강해지는 겁니다.”
그럼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다.
“살 빼면 건강해져요.”
내 입에서 “알겠어요, 빼볼게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이제는 조금 더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말이 진짜 나를 위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기에. 그리고 이것은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 내 건강을 지키는 문제라는 걸 알기에.
나는 더 이상 내 몸을 설명하지 않기로 했다.
건강은 증명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영역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