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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lan Gyeong Jul 23. 2022

죽음 그리고 남은 이들의 몫

실죽실죽 웃으며 혼자 몰래 쪽지를 적어서 접어다가 수업 시간 끝나고 내 책상에 사랑고백쪽지를 매번 툭

 놓고 가는 예쁜 4학년 여학생이 있었다.



'주말에도 보고싶어요. 메건샘'

종알종알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이 외동 딸아,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이 아이는 책상 앞에 엎드려 있기도하고 백지처럼 하얀얼굴로 말없이 앉았다 힘없이

하원하는 날들도 있었다. 머지않아 그 아이의 엄마가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입원이 길어져서 아이케어가 어려워 당분간 영어를 쉬게 되셨다고 소식이 왔었다. 그리곤 7개월 쯤 지났을까?

지난 6월 초 다시 연락을 주시며 아이를 다시 수업에 보내고 싶다고 하셨다. 이제 잘 회복하셨나보다 속으로 다행이다 생각만하고 더 말씀해주시기 전에 괜히 이것저것 여쭈어 캐묻지 않고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는 엊그제, 일하다가 카톡으로 부고메세지가 날라왔다.

들어보니 코로나 1차 백신을 맞고 나서 한달도 안되어 백혈병진단을 받고 투병을 하다 골수이식수술을

차마 다 견디지 못하고 돌아셨다고 한다.

껌딱지 같은 5학년 외동 딸을 이 세상에 남겨두고.




'영어선생님 오셨네 나와봐라'

밤늦게 도착한 장례식장에서 어린 아이는 상복도 입지 않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다리를 흐느적거리며 뛰나와, 창백하고 멀건 얼굴로 어깨를 털썩이는 어른들을 맞아주고 있었다. 아이는 멍해보일 뿐 울지 않았다.




나도 중1때 상복을 입고 손님을 맞은 기억이 있다. 내가 입은 검정저고리가 바스락 바스락거렸고

쭈볏쭈볏 낯설게 서 있다가 손님을 맞고 같이 왕하고 울었다.



아, 이 사람 이렇게 슬퍼하시는구나.

내가 가엾어서 이렇게 울어주시는구나.

그때 알았다. 장례식은 죽은 자를 위로하는 자리가 아니라 남은 자들이 서로를 위로하는 잔치이구나.


그러다 손님이 가시고 한동안 없으면 무료해져

가만히 있다가 영정사진을 가만 들여다 보고있으면 사진이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죽음이 무엇인가

오래오래 걷고 먹고 말하다가 이제 다시 저 말 없는 사진 속으로 들어가 앉아 침묵하는 것이 죽음일까.






장례식은 단 며칠만에 자리가 걷히지만 남은 가족들의 슬픔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아이, 이제 일년이고 이 년이고 눈물 흘러 밤마다 배게며 이불을 다 적시겠지. 잠이들면 꿈에서 말없는

아픈 엄마를 만나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부질없는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꿈은 마치 똑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는 것처럼 아주 오랫동안 반복될 것 이다.





목숨보다 소중한 아기를 사고로 잃었던 내 친구가 했던 뼈아픈 말을 기억한다.

울어주고 슬퍼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너희들은 내일이면 직장으로 돌아가고 잡담을 하고 커피를 마시겠지.

하지만 난 내일 집으로 돌아가면 이 슬픔과 중단없이 마주해야해.

너희가 나 대신 하루라도 대신 살아줄 수 있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일은 아주 길고 어두운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다.

그 속에서 사무치게 아파하며 소리도 안나는 울음을 몇 번이고 거듭해서 거듭해서 토해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남은이들이여,

그 어렵고 아픈 시간을

그 어두운 터널을 반드시 잘 견디고

다시 세상으로 꼭 걸어나오기를 바란다.


비로소 그 때 마음의 상복을 벗고

깊고 깊은 마음으로

새롭게 사랑하며 살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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