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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줄수록 멀어지는 사람들

나만 노력하는 관계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by 미그레이

돌이켜보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누군가에게 "잘해주려고" 하면 할수록

상대와 조금씩 멀어져 왔던 것 같다.


물론 그 멀어짐의 주체는 항상 '나'였고,

그 이유는 '상처받았기 때문'이었다.


상처의 이유는 대개 한결같았다.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친밀함을 표현하는 방식에 기준선은 없었다.

내 마음이 내키는 대로, 내키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대하는 일이 잦았다.

그저 그렇게 함으로써 '상대가 좋아할 것이다'라는 확고한 믿음만 있었다.


20년도 넘은 일이다.

공강일, 여름 장맛비가 억수같이 내리는 날이었다.

그날은 다이어리에 '00 생일'이라고 별표를 쳐둔 날이기도 했다.


'00 생일인데, 비가 이렇게 와서 속상하겠다..'


라는 생각이 스치자 "친구를 위해" 가만히 있지만은 말자는 다짐이 뒤따랐다.


그 길로 장대비를 뚫고 나는 무작정 그 친구의 집 앞으로 찾아갔다.

왼손에는 우산, 오른손에는 비에 흠뻑 젖어 모서리가 뭉개진 케이크 상자가 들려있었다.

단독 주택의 벨을 누르고 친구를 기다리는 나는 생각했다. 아니, 기대했다.


'얼마나 좋아할까?'


잠시 뒤 친구가 나왔다.

예상과 달리 친구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생일 축하해'라는 말과 케이크상자를 건네자 '고마워..'라고 했다.

그리고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 그럼, 나는 가볼게.."


".. 어... 조심히 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 마음은 축축이 젖고 말았다.




이런 일은 마흔이 넘어서도 반복되었다.


엄마에게, 동생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심지어 결혼 후에 시부모님에게도..

각별히 신경을 써서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피투성이가 돼서 너덜거리는 쪽은 나였다.


난 그저 잘하고 싶었다.

누군가 내게 그랬다면, 나는 정말 기뻤을 테니까.

그런데 그 마음이 항상 좋은 결과를 만들진 않았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노력한 만큼 관계가 단단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슬펐다.

마음에 바람구멍이 숭숭 뚫린 기분이었다.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유명인들의 남다른 가족애와 우정을 동경했다.

서로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서로의 일을 자기 일처럼 앞장서 도와주고

변함없이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관계를 나도 가지고 싶었다.


남편은 말했다.


"저런 관계 잘 없어.. 너무 이상적이야"

"남들에게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 그렇게까지 기대하는 사람도 없어"


그럼에도 남편은 나를 말리지 않았다.

남편은 애초부터 결론을 알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상처를 입은 후에야 비로소 내가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같은 일이 반복될수록 나를 돌아보는 일이 잦아졌다.

나는 왜 자꾸 같은 상처를 받는 걸까?

혹시 내가 잘해줄 것이라는 상대의 (있지도 않은) 기대에 나 혼자 부응하려고 애쓰고 있는 걸까?


대체 왜?


고민 끝에 다다른 결론이 있었다.

그것은 내 마음을 후벼 팔만큼 아프고, 슬픈 것이었다.


'사랑받고 싶어서'


맞다.

사랑받아야 할 시기에 누구에도 사랑받지 못했던 기나긴 시절의 아픔은

내 인생의 전반에 걸쳐 끈적이는 영향을 끼쳐왔다.


사랑받고 싶지만 사랑받은 적은 없는 사람이 쉽게 빠질법한 오류.

사랑받는 "방법"이 따로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사랑, 그것은 내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잘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성과물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해

공부를 했고, 역할과 책임을 다했던 삶이 나를 평범한 삶의 궤도에 올려놓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의 존재가치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고민이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기대하지도 말자..

그랬는데 혹시 내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감사해하자.

그거면 됐다..


고 되뇌어봐도 내 마음은 크게 열렸다 크게 닫히기를 반복했다.




어느 날 남편이 남편과 자신의 동생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정의했다.

나는 남편의 말을 듣고 그동안 내가 동생에게 '언니로서' 증명하려 했던 관심과 사랑이

사실은 집착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랑 내 남동생 관계 알지?"

"우린 거의 연락하지 않고, 여태 둘이서 술 한 번도 마신 적이 없어"

"동생이 중요한 일로 나에게 상의한 적도 없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고"


"너무 안 친한 거 아니야?"

라고 반문하는 내게


"그런데, 만약 그런 동생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기잖아?

그러면 끝까지 동생을 지켜줄 마음은 있어.

그게 가족이고, 나는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남편의 말은 나를 멈춰 세웠다.

‘관계를 바라보는 방식’이 완전히 뒤집히는 순간이었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해주고 싶다면,

잘하려 애쓰기보다 그 사람을 그냥 ‘있게’ 두는 것.

어쩌면 사랑은 거기서 시작되는 건지 모른다.


잘해주는 것으로 사랑을 얻으려 애쓰던 나는,

이제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너’를 인정하는 사랑을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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