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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토미さん에게

20년이 지나도 그리운 이름, 내 인생의 키다리할머니

by 미그레이

야스토미 さん


오겡끼데스까.

레이코데쓰.

오히사시브리데스네..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선명해져 가는 추억 사이,

가을을 재촉하는 비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오늘

문득 야스토미상에게 이 편지를 써야겠다고 아니,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야스토미 상과의 수개월 남짓에 불과한 짧았던 인연이 제 인생에서 얼마나 긴 여운을 남기게 될는지를요..


야스토미상과 마지막으로 손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로부터도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 일본어가 어눌했던 한국인 유학생 '레이코'는 20대 학생에서 30대 사회인이 되었고,

느지막이 인연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정도 일구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불혹마저 넘긴 기성세대가 되었습니다.


야스토미상은 어떻게 지내셨나요?

건강은 어떠신가요?

한국어를 배워서 한국 방문을 꼭 하고 싶다던 꿈은 이루셨나요?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안부를 여쭤보고 싶은 마음에 머리가 핑 돌 지경이지만,

미숙하고 미숙했던 제가 그 편지들을 끝까지 간직하지 못했고,

그렇게 야스토미상과의 소중한 인연의 끈을 허망하게 놓치고 말았습니다.

혼또우니 모우시와케아리마센..고맨나사이..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강산이 두 번 바뀔 그 시간 동안 제 머릿속은 수시로 야스토미상을 떠올렸습니다.

오늘도 그런 날 중의 하루입니다.


처음에는 일본 유학시절에 대한 막연한 향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비로소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야스토미'라고 하는 어림잡아 60~70대의 일본인 어른이

타국에서 공부 중인 눈빛이 불안한 낯선 한국인 청년에게 보여줬던 진심 어린 애정이

어찌나 감사하고, 특별한 일이었는지를요..



기억나시나요?

저희가 처음 만난 장소를요.

'미스타-도-나츠' 히가시나카노 지점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어학원 1단계를 갓 수료한 어눌한 일본어의 외국인 아르바이트생이었습니다.

매장에서는 주로 서빙, 청소, 커피 리필 제공 등을 담당했었죠.

'그날'도 어김없이 갓 내린 커피포트를 두 손으로 감싸 안고,

2층 홀을 돌아다니며 손님들께 커피 리필을 권하고 있었습니다.


"코-희, 오카와리와 이카가데쇼우까?"

(커피, 리필해드릴까요?)


그렇게 마침내 야스토미상이 혼자 앉아계시던 창가석까지 발걸음이 다다르게 되었지요.

그때 제 눈에 먼저 보였던 것은 다름 아닌 테이블 위에 펼쳐진 모눈 공책이었습니다.

그 위의 심이 잘 깎여있던 연필은 혼신의 힘을 다하듯 한글 단어의 모음과 자음을 정성스레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필을 쥐고 있던 손을 보았는데, 핏줄이 투명하게 비칠 만큼 창백했고, 당장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여리했습니다.


저는 비로소 시선을 올려 야스토미상의 얼굴을 봤습니다.

얼굴의 반 이상을 덮고 있는 커다란 사각 돋보기안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렌즈 굴절로 실제보다 족히 두 배는 커 보이는 눈과 그 속의 나이를 가늠하기 힘든 순진한 눈망울을 보았습니다. 옅은 갈색의 커트 헤어는 단정하게 정리된 채 윤기가 흐르고 있었고, 옷차림마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정갈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때까지도 야스토미상은 저의 인기척을 알아채지 못한 채 한글 연습에 열중하고 계셨지요.


놀랍게도 2025년인 지금은,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이 참 많아졌습니다. 알고 계신가요?

하지만 일본에 국한하던 '욘사마 열풍'이 전부였던 당시만 해도 한국인 유학생의 눈에 비친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의 모습은 저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아노.. 시쯔레이데스가.. 한그루 오죠우쥬데스네~"

(저.. 실례합니다만.. 한글 잘 쓰시네요~)


그저 말을 걸고 싶었습니다.

사실 조마조마한 마음도 한편에는 있었습니다.

무시당해도 어쩔 수 없다고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다행히도 야스토미상은 입가에 옅은 미소와 함께 더 동그래진 눈동자로 화답해 주셨습니다.

귓속말하듯 작고 끊어질듯한 목소리였죠.


"이~에.. 이~에.. 마다마다데쓰.."

(아니오.. 아니오... 아직 한참 멀었어요..)

"아노... 모시카시떼.. '한국크사람' 이무니까?"

(저.. 혹시.. 한국사람인가요?)


"하이, 쏘우데쓰!!"

(네, 맞아요~)




그때 제가 먼저 말을 걸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그때 야스토미상이 그곳에서 한글 연습을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제가 이렇게 누군가를 오랜 기간 그리워하는 일도 없었겠지요?


그날 이후, 야스토미상과 저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야스토미상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카페에 와서 한글 공부를 하셨고,

저는 아르바이트 도중에 짬을 내어 야스토미상의 궁금증에 답해드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스토미상이 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셨지요.


"저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모찌론데쓰!!"


고민 없이 저는 대답했습니다.

저로써도 일본어 실력을 향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야스토미상과의 시간이 무척이나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아노.. 시급은 얼마를 드리면 될까요?"


저는 냅다 손사래부터 쳤습니다.


"이에~이에~

저도 일본어 연습을 해야 하기 때문에 돈은 필요 없어요.

저한테도 분명 도움이 되는 시간일 것 같아요!"


그렇게 매주 2회,

신오쿠보의 한 카페에서 만날 약속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카페 이름을 떠올리려고 구글 지도까지 봤지만 도무지 매칭이 되는 상호가 없더군요)


야스토미상은 학교수업과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헐레벌떡 들어오는 저를,

출입구에서 가장 먼 자리에서 출입구 쪽을 향해 앉아, 환한 미소로 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먹고 싶은 걸 다 시켜주세요'라는 멘트를 몇 번이고 말씀하셨지요.




야스토미상과의 첫 수업은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먼저 했습니다.

'늦은 연세에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야스토미상은 저를 위해 가장 쉬운 일본어 표현을 골라, 한 문장씩 눌러담듯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야스토미상의 아버지는 한국 해방 이전, 한국에 있던 일본인 학교의 교장이었다고 하셨습니다.

야스토미상은 그 시절 한국에서 태어나 약 6~7년간 생활하셨다고 했고요.

그래서인지 일본인이면서도, 자신이 태어난 한국에 대해 고향과 다름없는 깊은 애정을 가지고 계셨고,
생전에 한국어를 배워 꼭 한 번 다시 그곳을 방문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자신 있게 끼어들며 말했었습니다.


"그때, 제가 꼭 동행해 드릴게요"


아, 이런 질문도 했었습니다.

한국어를 몰라도 고향 방문은 언제든지 가능하지 않겠냐고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야스토미상의 대답이 뭐였는지는 끝끝내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모우시와케아리마센. (송구합니다..)


야스토미상의 온화한 표정과 다정한 어투가 어제 일처럼 선연합니다.


그때 처음 알게된 것도 있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이유가 단순히 역량을 쌓거나, 지적 흥미를 채우 것

둘 중의 하나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야스토미상의 경우처럼 '생의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한 고귀한 목적도 존재한다는 것을요..


또 다른 기억도 있습니다.

수업 말미에 늘 반복되는 의식(?)이었습니다.

바로 야스토미상의 '선물 타임'이었죠.

수업료를 받지 않는 "대신"이라며, 야스토미상은 매번 저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 오셨습니다.

주로 머플러, 화장품, 액세서리 따위로 20대인 저의 관심사를 고려한 사려 깊은 선물들이었습니다.


물론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저에게 주신 선물들이 값어치로만 따지면 시급 900엔을 몇 배나 뛰어넘는 값비싼 물품들이었다는 것을요.

죄송합니다. 세상 물정 모르던 시절이라 넙죽넙죽 받기만 했습니다.

제가 너무 어리석고 무지했습니다.

혼또우니 스미마센데시다.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수업 횟수가 거듭될수록 야스토미상의 한국어 실력은 늘어갔습니다.

더듬 더듬이기는 해도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고, 저의 한국어도 차츰 알아듣기 시작하셨습니다.


"안녀하세요-.

저,는 야-스-토-미 이무니다.

저,는 일-본 사-라-미에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났스무니다"


수업은 제가 일본어로 한국어 단어와 표현을 가르쳐드리면,

그 과정에서 미흡한 저의 일본어를 야스토미상이 일본어로 교정해 주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시간이 쏜살같이 흘렀습니다.


저의 일본어도 야스토미상 덕분에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어학교 레벨테스트를 하던 어느 날, 선생님들도 놀라움을 표현할 정도였습니다.

오카게사마데쓰. (덕분입니다)

아리가또우고자이마스. (감사합니다)


야스토미상과의 만남은 늘 신오쿠보의 지정 카페였기 때문에 헤어짐의 장소도 늘 카페 앞이었습니다.

저는 야스토미상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본 적도 있습니다.

제 눈에 비친 야스토미상의 모습은 한 줄기 햇살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비추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기울어져 사라지고 마는

그런 빛 말입니다. 야스토미상의 존재가 저에게는 딱 그런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사회인이 된 이후에는 일본과의 인연이 더 빈번해졌습니다.

특정 기간 동안은 일본 고객을 전담하기도 하고, 또 특정 시기에는 아예 일본 기업으로 이직해서 근무를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야스토미상과 끊어진 인연에 미련이 깊어지곤 했습니다.

'어엿한 사회인으로 일본으로 출장까지 오는 제 모습을 보셨다면 야스토미상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를

생각하니 먹먹해진 순간도 더러 있습니다.






그 애틋한 인연도 마지막 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저는 불가피한 가정사로 유학 도중에 급하게 귀국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속상하고 아쉬운 마음이 컸습니다.

무엇보다 야스토미상이 한국어 공부를 이어나가길 소망했기에,

제 후임으로 어학교 동기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1~2년 간은 야스토미상과 손 편지를 주고받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저는 일본어로, 야스토미상은 나날이 발전하는 한글로 편지를 보내주셨지요.

그리고 크리스마스 즈음의 어느 날에는 편지뿐 아니라 눈이 휘둥그레지는 커다란 선물 박스를 보내주기도 하셨습니다.

상자 안에는 저를 포함한 저의 가족의 나이와 취향을 고려한 맞춤형 선물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마치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이때가 제가 기억하는 야스토미상과의 마지막 기억입니다.


아, 다행히 그때 주셨던 '세이코 손목시계'는 여전히 저의 보물 1호입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 위상에는 변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이 시계는 야스토미상과의 인연을 증명하는 유일한 실물이기에 아끼는 마음이 더 큽니다.


제 예상이 맞다면 야스토미상은 현재 90세 전후의 연세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즘에는 한국인 평균 수명도 100세로 크게 높아졌습니다.

얼마 전 뵙고 온 저의 시할머님께서도 99세에 여전히 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한 삶을 영위 중이십니다.

특히 일본인은 한국보다 훨씬 먼저 '장수국가'로서 명성이 높았기에,

야스토미상도 분명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그 때의 '레이코'를 떠올려 주실는지요..




안타깝게도 이 편지는 수신인 주소가 없습니다.

야스토미상의 집주소가 적힌 소중한 편지들을 무심히 대했던 저 자신을 두고두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이 더 희미해지기 전에 반드시 남겨두고싶은 진심이었습니다.


야스토미상은 외로움 많고 결핍으로 가득했던 청년의 저를

가장 처음으로 따뜻하게 안아 준 어른이셨습니다.


하루하루가 위태롭기만 했던 낯선 한국인 청년에게

야스토미상이 보내주신 순금 같은 사랑과 관심..

가슴깊이 감사하고 감사드립니다.


그 온기는 지금 이 순간도 제 가슴속에 살아있습니다.

그리고 저또한 야스토미상처럼 청년들에게 좋은 어른이 되기 위해 조금씩 애쓰며 지내고 있습니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그들 중 다만 몇 명에게라도

제가 그들 마음속의 '작은 야스토미상'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어른의 작은 친절함과 상냥함은 한 청년의 미래에 큰 동력이 되기도 하니까요.


야스토미상..

야스토미상..

도떼모오아이시따이데쓰.

(정말 보고싶습니다)

그리고..

혼또우니, 혼또우니, 아리가또우 고자이마시타!!!

(정말로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2025년의 레이코 よ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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