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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Sep 24. 2021

산책에 진심인 부부

우리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는방법

우리 부부는 '산책'에 진심이다. 


때마다 여행은 가지 않아도 저녁 식사 후 산책은 불가항력을 제외하고 거르는 법이 없다. 

결혼 후 지난 4년간 1박 이상 떠난 국내외 여행은 총 2~3번이 될까 말까 하지만 산책은 1년 365일 중에 300일 정도는 한다.  특별한 사정만 없으면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3~4시간도 걷는다. 


사는 동네가 유달리 걷기 좋은 환경을 제공하고 있어서는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다. 

우선 지리적 특성상 어디를 향하든 '경사지'를 피할 수 없다. 아무리 짧은 코스라도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해야 하기에 가끔은 산책이 훈련처럼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집 일대가 재개발 촉진 또는 정비 구역으로 지정된 것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부동산 투자적 관점에서는 '호재 '로 평가되겠지만 불행히도 그만큼 동네가 낙후되어 산책 인프라가 훌륭하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도로변 인도는 '사람이 걷는 도로'라는 속 뜻이 무색할 만큼 노점상이 빼곡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덕(?)에 남편과 나는 한쪽 어깨를 포개 한 덩어리로 지나가야만 겨우 통과할 수 있는 데다, 끝도 없는 도로 소음 때문에 집중하지 않으면 서로의 말소리를 단번에 알아듣기도 어렵다. 


피로감에 황급히 피신해 들어간 주택가는 오래된 다세대 가구가 흡사 밀푀유 나베처럼 켜켜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그곳을 걷고 있노라면 설거지, 잡담, tv, 개 짖는 소리까지 집 안의 각종 소음이 여과 없이 새어 나오는 터라 의도치 않게 남의 사생활을 엿듣는 듯한 불편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부터 주변의 아파트 대 단지나 백화점을 산책 코스로 잡기 시작했다 

최신축 아파트일수록 펜스를 둘러 외부인의 진입 자체를 엄격히 제한하는 곳이 많지만 오래된 단지는 완전히 개방되어 다행히 단지 내 조경을 감상하며 조용하게 거니는 것이 가능하다.   

대형몰이나 백화점은 산책과 눈요기를 동시에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우리 부부가 가장 애정 하는 장소다. 특히 눈비가 오거나, 날이 굳은 때에는 쇼핑 몰의 지하층부터 최고층까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마감 임박 세일 식재료를 득템 해서 귀가하기도 한다. 


동네 산책이 조금 물린다 싶을 때는 아주 가끔 공유 카를 타고 도심 외곽의 한적한  곳으로 드라이브를 나가기도 하는데 역시나 최종 목적지에서 우리는 어김없이 산책을 한다. 






그러고 보면 우리 부부는 연애 시절에도 주로 걷는 데이트를 했다. 

 

나는 미리 약속하지 않았어도 데이트 준비를 할 때부터 '걷기 편한 신발'을 찾아신었다.  왜? 우리는 어차피 또 걷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푹푹 찌는 한 여름, 남편은 땀 때문에 콧잔등으로 미끄러지는 안경을 반복적으로 추켜올리는 수고스러움을 감수하면서도, 깍지 낀 손이 끈적해져 차라리 손을 놓는 것이 피차 더 상쾌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시원한 카페를 바로 찾아 들어가기보다는 주저 없이 걷는 쪽을 택했다.

"조금만 더 걷다가 카페 가요"에 누구도 먼저 토를 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걸으면서 나누는 우리 둘의 대화가 참 맘에 들었다. 

걷다 보면 대화거리는 사방에 널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데이트랍시고 말쑥한 차림으로 카페에 마주 앉아 대화 주제를 억지로 찾지 않아도 됐다.  


오래된 거리를 거닐 때는 같은 세대만 공감할 수 있는 추억 속의 에피소드를 나누며 깔깔댔고,  새로 오픈한 가게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하고 들어가 이것저것 구경하며 이건 어떻고, 저건 어떻고 하며 떠오르는 순서대로 서로의 생각을 마구잡이로 주고받았다. 그렇게 또 걷다가 배가 고파지면 가장 처음 눈에 띄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때보다 빠르거나 늦은 식사를 하곤 했는데 운 좋게 음식 맛이 기대 이상일 경우에는 마치 둘 만의 대단한 비밀 맛집을 찾기라도 한 것 마냥 좋아했다.   


그런 과정에서 나는 남편이 '영화와 맥주와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단순한 캐릭터에서  

'스토리보다 연출력이 뛰어난 영화를 매우 사랑하고,  맛있는 술과 음식을 좋아하지만 단순히 배를 채우기보다 풍미를 즐기며, 한 가지에 몰두하면 스스로 만족할 때까지 깊이 파고드는 사람'이라는 다채로운 색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임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소개팅이라는 부자연스러운 계기로 만나게 되었지만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만큼은 자만추였던 것이다.

우리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유명 레스토랑을 광 클릭해서 예약하고,  평소에 즐겨 입지 않는 스타일을 하고 어색하게 마주하거나, 데이트 명소를 리스트업 해서 도장깨기 하듯 찾아가 인증사진을 찍지도, 기념일에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값비싼 선물을 주고받는 일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길지 않은 연애 기간 동안 서로를 인생 반려자라고 느낄 만큼의 남다른 교감을 할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산책으로 연결된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서로에 대한 꾸밈없는 모습을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 하루 일과 중 남편과의 산책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종일 한 공간에 같이 있다 해도 서로에게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산책 시간이 유일하기 때문이다.  


가끔은 '만약에 남편이 걷는 걸 싫어했다면?' 혹은 '남편이 대화를 즐겨하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을 해 보는데 그럴 때면 남편과 걷는 시간이 더욱 특별하고 소중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분기마다 해외여행을 가고, 계절별 레저 스포츠를 만끽하고, 전국 명소를 돌아다니며 유명 펜션이나 맛집 후기를 올리거나, 캠핑, 사진, 자전거, 테니스 등 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기는 지인 부부들과 비교해보면 우리 부부의 일상은 그저 걷고 대화하는 게 전부인 단조로움 그 자체다. 영화 장르로 따지면 상업성 제로의 독립영화에 가까운 셈이다. 


그럼에도 내가 자신하는 한 가지는 분명하다. 

우리 부부가 매일 나누는 대화가 남들에게 자랑할 만큼 그럴듯한 추억거리가 아닐 수는 있어도

앞으로 서로 신뢰하며 살아가는 데 있어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라는 점이다.  


누군가 내게, 부부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지를 꼽으라면 '대화'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얼만큼 다양한 주제로, 자주, 서로의 생각을 가감 없이 공유했는가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부부의 삶도 꽤 다채롭다고 자부한다. 

나는 오늘도 산책을 하면서 남편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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