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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Apr 13. 2021

이 글을 쓸지 수천 번은 더 고민한 것 같다.

2021년 2월 14일

이십 대 마지막 봄, 이십 대 마지막 생일, 이십 대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십 대 마지막 월요일, 이십 대 마지막 화요일. 틈만 나면 이십 대 마지막을 갖다 붙이며 요란하게 일 년을 지내던 나는 천지가 개벽하고 인생의 빛나는 변곡점이 될 줄 알았던 스물아홉 살의 마지막 날 야근을 했다. 회사에 남아있던 동료들과 소주를 마시는 새에 자정이 지났다. 같이 술 마시던 넷 중 나만 서른이 되었다. ‘뭔가 억울하다. 정말 별거 없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내 위에 떠 있던 운명의 별자리들이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나는 몇 주 뒤 크게 앓았다. 서른 통이라는 게 있다더니 괜히 나온 말은 아닌가 싶어 초음파를 찍어보니 자궁에 혹이 두 개 있었다. 피검사 결과가 좋지 않아서 대학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괜찮아, 그냥 집 가까운 데로 가면 돼요. 어디 살아요? 보자, 거기면 K 대학병원이 제일 가깝네. 내가 선생님도 추천해줄게. 전공을 보면 알 수 있어. 배를 열었는데 그게 암이다 하면 이 선생님이 좋아. 자궁을 들어내서라도 살려야 되잖아. 근데 암이 아니다 하면 요 선생님이 좋을 거야. 요런 선생님들은 자궁을 최대한 보호하면서 예쁘게 수술하는 전문이거든?”


 회사 아래층에 있던 산부인과 선생님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는 것처럼 굴었다. 그 점이 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나는 그 길로 반차를 내고 엄마와 집 근처 대학병원에 갔다.


“내막 세포가 이미 골반까지 다 퍼져있는 것 같아요. 수술은 해야 되고요. 혹시 열어보면 암일 수도 있는데… 아이고 어머니 괜찮습니다. 아기 낳을 수 있어요.”


 엄마의 다리를 풀리게 한 나의 병은 자궁 내막증 4기였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체중을 쟀더니 한겨울이라 옷을 두껍게 입었는데도 39킬로밖에 나가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살이 빠졌는지, 뭐하다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는지 나는 조금 벙쪘던 것 같다. 그새 마음을 회복한 엄마의 활약으로 나의 수술 날짜가 아주 빠르게 잡혔다. 많이 먹고 최대한 살을 찌워 오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설날에 열심히 먹은 나는 한참 부족한 43킬로가 되어 수술대에 올랐다.


“축하드립니다. 수술은 깔끔하게 잘 되었고요. 골반에 있는 것까지 다 긁어냈어요.”


 몸에서 떼어낸 커다란 혹 사진을 보여주며 담당의 선생님이 미소를 지었다. 전신마취 수술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아프고, 소변 주머니와 피 주머니를 달고 있는게 고생스러웠지만 6일 만에 이 모든 위기는 끝났다. 사실 예상했다. 수술은 잘 될 거고, 열었는데 더 큰 병에 걸려 있을 리는 없었다. 내 인생은 한 번도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없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최악으로 가지 않으니까.


나는 퇴사하는 팀 막내를 배웅해준답시고 실밥을 꿰맨 상태로 출근도 했다. 뭔가 밑으로 빠지는 듯한 통증이 있었지만 막내에게 웃으며 사진을 찍자고 졸랐다. ‘무리하지 말고 아프지 마세요.’ 그날 밤 막내가 내게 보낸 굿바이 메일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돌이켜보면 부끄럽다. 회사가 아니면 나란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 청승을 떤 것이. 그건 고작 이십 대 초반이었던 막내 눈에도 보였을 것이다.


 나는 별 거 아닌 이 병의 영향력이 단 6일로 끝일 줄 알았지만, 진정한 위력은 그다음부터 시작되었다. 먼저 체력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더는 밤을 새우며 일할 수 없었다. 주말이면 회사에서 유일하게 영상 편집이 가능한 대형 노트북을 싸들고 집에 갔는데 이제 무거워서 들기도 힘들었다. 재발을 막기 위해 매일같이 약도 먹어야 했다. 일 년만 먹으면 될 줄 알았던 약은 끝도 없이 처방되었다. 내가 약을 던져버릴까 고민할 때면 의사 선생님은 귀신같이 눈치채고 겁을 줬다. 요는 마지막 단계인 4기에 수술했기 때문에 약을 끊는 순간 재발해서 다시 수술을 해야 한다는 것이고, 약을 먹기 싫으면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빠는 혹시 나에게 흠이 될까 봐 무슨 이유로 수술을 했는지 친척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멋대로인 나는 아빠의 입단속을 따를 생각은 없었지만, 당당한 척하면서도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할 때면 목에 뭔가 걸리는 기분이 들었다.


“수술 후에 추적 치료를 하고 있어서 약을 드시는 거잖아요. 그런 경우에는 헌혈이 안되세요.”


 나는 헌혈도 할 수 없었다. 코에 찬 바람을 쐬면 바로 감기에 걸린다. 약이 뼈를 약하게 해서 일 년에 한 번 뼈 검사를 받는다. 소수점 차이로 좋아졌다 나빠졌다 하는 뼈 소식을 들으면 나는 조바심이 나서 필라테스를 하다가 사망의 골짜기를 건너기도 하고, 수영을 하다가 락스 물로 배를 채우기도 했다. 나는 내 몸이 예전보다 약해졌다는 것을 차근차근 인정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왜 나는 2년 뒤 공황장애가 찾아왔을 때, 잠깐의 치료로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이 글을 쓸지 수천 번은 더 고민한 것 같다. 나는 직장인이다. 코인은 한 차례 망했고, 주식은 그래서 하지 않고, 집값 대란 전에 사 둔 집도 없기 때문에 달마다 나오는 월급이 소중한 사람. 그래서 나는 늘 내가 일 8시간의 노동을 건강하게 해낼 수 있는 사회인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다. 살면서 신체나 정신이 한 번은 삐끗할 수 있지만, 그런 경험은 덕분에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근거 정도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제 다시 약해져 생산성에 차질이 있을지 모르는 위험군으로 보이고 싶지 않다. ‘너 이러는 건 약점으로 돌아올 수 있어.’


 그렇지만 나는 기록을 해보기로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나를 원망하는 날이 늘어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좋아해 주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도록 응원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나는 서른에 자궁내막증 수술을 했고, 서른둘에 우울증과 공황장애 치료를 받았다. 이 짧은 한 줄을 제대로 쓰기 위해 몇 번을 지웠다 썼다를 반복했는지 모른다.


이것은 한 번 열린 상처와 두려움을 안고 함께 살아가는 삼십 대 직장인의 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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