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서로 만난 적이 없어 정 같은 건 없겠지만,

2026년 2월 5일

by 지금을

‘시간, 공간, 비용 등 무엇에도 방해받지 않고 무엇이든 음미할 수 있는 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당신은 무엇을 음미하고 싶은가?’


질문을 받고 여러 가지를 떠올렸다. 올랜도 디즈니 월드는 한 시간으로는 부족하니까 패스. 오래전 당일치기로 노이슈반슈타인성을 보러 가다 지나친 알프제 호수? 미드 ‘기묘한 이야기’ 촬영지? 직장 동료에게 입양 보낸 아기 고양이 레오? 전부 좋아하는 것들이라 상상만 해도 행복해진다. 하지만 나는 결국 퍽 유쾌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외할머니와의 만남에 손을 들지 않을까.


나는 외할머니를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그렇게 “죽고 싶다” 하더니 진짜 연탄 가스 사고가 났다고 했다. 말에는 정말 힘이 있나 봐. 그래서 어린 나는 엄마가 자주 “죽고 싶다”라고 말할 때마다 귀가 밝은 신이 엿듣고 이뤄줄까 봐 불안했다.


물론 어른이 된 지금은 잘 알고 있다. 우리 엄마는 지구 종말에도 절대 살고 싶은 사람이고, 어떤 위기에서도 지지 않고 악착같이 살아온 인류이다. 그래서 외할머니도 실은 살고 싶었을 거라 생각한다. 나도 그러니까.


나는 외할머니의 외모를 닮았다. 우리 집 사람들은 입이 다 쏙 들어가 있는데 나만 다소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겉 쌍커풀이 있는 눈이 특히 닮았다. 흑백 사진 속 얼굴 말고 실제로도 우리가 그렇게 닮았을지 보고 싶다. 목소리는 어떻고 말투는 어떨까? 웃을 땐 어떻게 웃을까? 하고 싶은 게 많은 독립적인 성격도 닮지 않았을까? 한 시간이나 같이 있으면 좀 짜증도 나겠지?


외할머니에 대해서 아는 건 엄마에게 들은 얘기뿐이다.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강제로 한 결혼을 평생 불행하게 여겼다는 말, 아주 멋쟁이였다는 말, 엄청 극성이라 명문대에 간 큰아들을 닦달해 동생들을 전부 취직시키게 했다는 말. 나는 그 말들로는 다 그려지지 않는 외할머니의 꿈 같은 것이 궁금하다. 그 시대가 아니었다면, 결혼 대신 외할머니가 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듣고 싶다. 그러고 보니 요새는 외할머니의 어원이 별로라 할머니 앞에 ‘외’를 붙이는 대신 지역명만 붙인다는데, 나는 외할머니도 친할머니도 부산 사람이다. 게다가 두 분 다 이름은 모르잖아? 원수 같은 상사 이름은 맨날 부르면서 이건 아니지. 엄마에게 물어보고 오겠다.


문순. 엄마의 엄마이자 나의 할머니인 그녀의 이름은 문순이라고 한다. 나는 가끔 문순 씨가 저 위에서 손녀들의 혼삿길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는 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한다. 적령기가 꽤 지났는데도 언니들이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 사촌 언니 한 명이 40대에 결혼하면서 기록이 깨졌다.) 애를 여섯이나 낳았으면 할아버지랑 돈독한 것도 같은데, 문순 씨는 무엇이 후회되어 결혼을 불행하다고 여겼을까. 한 시간만 준다면 “그런 얘긴 뭐 하러 해”라고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 문순 씨를 살살 달래서 물어볼 텐데. 어쩌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래고래 “결혼 같은 건 하지 마!“ 라고 소리 지를 지도.


우리는 서로 만난 적이 없어 정 같은 건 없겠지만, 혹시 하늘에서 나를 보고 있었냐고, 문순 씨는 자식이 많아 손자 손녀도 줄줄이라 헷갈리겠지만, 그래도 한 번쯤 당신을 제일 닮은 나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냐고도 물어볼래. 그리고는 대답을 고민하는 문순 씨의 냄새, 표정, 눈빛, 영영 본 적 없는 그런 것들을 찬찬히 기억에 새길 것이다.

존경하는 전 직장 부사장님이 인스타에 올리신 사진을 저장한 것이라 진짜 출처는 모르지만 이 말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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