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해”

2026년 2월 12일

by 지금을

신년에 팀원과 철학관에 다녀왔다. 내가 궁금한 건 휴직이 끝나기 전에 이직할 수 있는지, 두 번째 가사 픽스가 언제쯤 되는지 딱 두 개였다. 하지만 이 간단한 질문을 하기 위해 아저씨의 대학원 시절 무용담과 부인분 얘기를 얼마나 오래 들어야 했는지. 영겁처럼 느껴지는 한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나에게도 입을 떼볼 기회가 생겼다. (그마저도 ‘질문을 잘하는 법’, ‘절대 하지 말아야 할 질문 리스트’ 등을 받아 적은 후에야 질문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돈에 불만이 많아서, 돈을 많이 벌고 싶어서 이직하려고 하네.”

“저는 돈은 불만이 없..”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해”


이 시점에서 나는 더 내려갈 것도 없던 아저씨를 향한 신뢰도가 바닥났다. 난 회사의 처우에 만족했고 이직하려는 이유는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내 말을 끊으며 계속 돈 얘기를 했다. 자포자기한 나는 아저씨가 불러준 이직할 수 있는 달과 가사를 열심히 써야 하는 달을 대충 메모하고서야 그곳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특별 선물이라며 주신 복주머니 안에 필기한 종이를 넣었지만, 열어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몇 주 뒤 뜬 인센티브 결과 창을 보고 나는 처음으로 돈 때문에 회사를 떠나고 싶어진다. 내 인생 가장 낮은 등급. 휴직하겠다고 했을 때 평가를 낮게 주겠다는 협박을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설상가상 이번에 우리 법인은 성과급 재원 자체가 적어서 내 통장에 찍힌 돈은 예상보다 너무 적었다. 이대로라면 3월까지 버틸 휴직 자금도 없잖아! 알고 보면 철학관 아저씨 좀 용할지도? 헛웃음이 나오는 차에 또 돈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우리 가족은 25년째 같은 구축 아파트에 살고 있다. 몇 년 전부터 재건축을 진행 중인데, 워낙 오래 걸리는 사업이다 보니 새 아파트를 들어갈 날은 요원해 보인다. 오로지 엄마만이 무조건 금방 재건축 될 거라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러다 해가 바뀌자, 갑자기 불안해진 모양이다. 사무소에 전화를 돌리더니 빨라야 10년이라는 직원의 대답에 엄마는 내 방문을 열고 말했다.


여기 재건축 보고 이사 오는 신혼부부들은 다들 삼십 대잖아. 근데 난 아니잖아. 돈 손해 보더라도 그냥 팔고 신축 갈까?


이 아파트는 엄마 것이므로 동생과 나는 전적으로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란다. 물론 이 지역의 가장 좋은 입지라 버티면 무조건 집값이 오르겠지만, 난 시간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60대 후반인 엄마에겐 특히 더 앞으로의 10년이 중요하다. 그래서 덩달아 초조해졌다. 이사 가자, 엄마. 나는 슬쩍 철학관 아저씨의 복주머니를 열어보았다.


하필 집값이 올라 난리인 요즘. 휴직 중이라 끌어올 돈도 없는 지금. 엄마가 원하는 조건의 10년 차 이하의 신축을 전부 리스트업 하고 임장을 다니면서 난 돈이 더 있었으면 하고 후회했다. 어떻게 얻은 휴직인데, 조기 복직을 고려할 정도로 그랬다. 그래도 탁 트인 전망에 깔끔한 새집들을 보면서 엄마가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런 집에 살아봐야지 싶어서 마음을 다잡았다. 다만 우당탕탕 진행되던 이사 프로젝트는 며칠 전 3년 반 뒤면 이주라는 총회의 발표에 바로 종료되었다.


새 아파트 입주는 8년이 걸린다지만 어차피 3년 반 뒤면 여길 떠나야 한대. 어차피 곧 이사 갈 건데 파는 건 아까워. 그때 새 아파트에서 월세로 살든가 하면 되지.

엄마는 여러 합리화 끝에 결국 노른자 아파트를 버리지 못했다. 웃돈을 주고 손해 보는 선택을 해야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3년 반 뒤면 대출금을 다 갚고 엄마에게 보태줄 만큼 돈을 좀 모았겠지 싶어서 나도 내심 여유가 생겼다. 반면 자신은 영역 동물이라며 이사를 울적해하던 동생은 이사 취소 소식에 기뻐하는 대신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럼 엄마 너무 늙는 거 아니야?

엄마한테 비타민C 많이 먹고 건강 관리하라고 하자며 그는 진지했다. 사실 나도 그래. 사람 일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아. 우리가 1년을 더 살지, 10년을 더 살지, 50년을 더 살지...


그래서 지금 가장 갖고 싶은 걸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돈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100억이 있으면 좋겠다. (50억이어도 충분할 것 같기도 하지만 그냥 질러본다.) 그럼 엄마가 좋아할 만한 살기 좋은 신축 아파트를 고민 없이 고를 수 있고, 아빠한테도 쓰라고 돈을 보내주고, 동생한테 가게도 차려주고, 난 회사를 안 가고 가사랑 글만 쓰면서도 가족들이 돈을 펑펑 쓰게 할 수 있고.


그런데 이 욕망 깊숙한 곳을 들여다보면 내가 정말 갖고 싶은 건 어쩌면 시간인 것 같다. 빨간딱지가 붙은 집에서 알바만 수십 개 한 대학생, 그 와중에 PD가 되겠다고 4년을 붙들고 있던 가난한 나는 지난 10년 간 몸과 마음에 병이 들 정도로 노력해서 나름 많은 돈을 벌게 됐다. 그런데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수중에 떨어지는 건 별로 없다. 평생 고생한 엄마는 아직도 아깝다고 내가 쓰다 남은 화장품만 쓰려고 한다. 해외여행을 데려가려 해도 싫다고만 한다. 빨리 돈을 더 벌어서 호강 한 번 못 해 본 가족들에게 좋은 걸 주고 싶은데 내 돈은 턱 없이 부족하고, 세월은 야속하다. 부모님 나이를 세보면 다급해져서 나에게 이 모든 걸 다 해낼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원 없이 다 해주고 행복한 얼굴을 보고 나면 그때는 나도 죄책감에서 벗어나 내 생각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돈을 벌지 않는 6개월의 휴직 생활. 나에게는 정말 어려운 선택이었다. 하루가 아쉬운데 6개월이 늦어지는 것 같은 기분, 자린고비 가족에게 비싼 걸 해주고 싶은데 텅 빈 통장 잔고, 써지지 않는 가사, 서류 탈락 소식. 초능력자도 뱀파이어도 아니라 시간이 유한한 우리. 하지만 잔잔한 두려움과 막막함을 누르고 오늘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정확히 10년 전 오늘, 나는 전신마취한 채로 수술을 받고 있었다. 몸을 돌보지 않고, 스스로를 의심하던 너를 가여워하지 않겠다. 용맹한 너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10년 뒤의 걔도 오늘의 나를 한심해하지 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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