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0일
지금의 내가 직장 생활에서 지키는 소신, 가치관, 처세 이런 것들은 전부 이사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전 직장에서의 상처로 매사 비관적이던 천둥벌거숭이를 이사님은 아무렇지 않게 먼지를 툭툭 털고 신발을 신겨서 사람답게 만들어주셨다. 언젠가 단단한 땅을 밟고 서는 어른이 되라는 듯이.
“나는 우리 팀이 최고의 수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강하게 몰아붙이는 편입니다.”
처음 면접장에서 본 이사님은 무척 깐깐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꽤 무서운 선전포고였지만 왠지 ‘우리’가 되어 나도 최고의 수준이 되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자기 확신이 없어 성장에 목마른 주니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팀에 합류하여 첫 주간 미팅에 들어갔을 때 회의실 분위기는 냉골이 된 겨울철 내 방바닥보다 차가웠다. 이사님은 인격모독을 하거나 언성을 높이는 분은 아니었지만, 차분하고 냉철하게 팀원들의 문제를 지적했다. 나는 바짝 긴장해서 진짜 잘 해내고 싶었다.
하지만 왜인지 그 뒤로 오래도록 이사님은 나를 한 번도 나무라지 않았다. 이사님은 내가 좋은 말 양파라도 되듯이 긍정적인 말만 했다. 처음에 그 말의 대부분은 곱게 들어가지 못하고 머리 위로 튕겨 나갔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다시 돌아가 주워 담았다. 누가 뭐라 할 틈도 없이 먼저 자학하는 성격, 인정받고 싶어 무리하는 버릇, 자신을 끝없이 의심하고 검열하는 애. 이사님은 나를 일찍이 간파하신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옳은 말을 듣는 게 아니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거야.”
나는 이사님의 이 말을 영영 잊지 못한다. 차갑고 뼈아픈 피드백에도, 회사 사람들은 전부 이사님을 존경하고 좋아했다. 피드백을 피드백으로서만 들을 수 있도록, 이사님이 평소에 신뢰와 안정감을 콩나무처럼 하늘 높이 쌓았기 때문이다. 진심은 통한다. 이는 모든 인간을 대하는 내 원칙이 되었다.
어른이 된 나는 팀원들에게 이사님이 내게 해준 것처럼 해주기 위해 노력한다. 호랑 말코 같은 팀장은 나에게 ‘착한 리더 콤플렉스’라고,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지만 그건 틀렸다. 그녀가 뭐라 하든 내가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것이 그 증거다. 제아무리 애정결핍이라지만 나이 차가 열 살은 훌쩍 넘는 어린 팀원들에겐, 사랑받고 싶은 마음보다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크다. 쉽지 않은 인생 위에서 다들 저마다의 전쟁 중인데, 귀에 들어가지도 않을 말로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팀원의 성향에 맞게 내가 그들의 성장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계속 고민하고 궁금해한다. 이사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상상하면서.
서른두 살의 나는 내가 호불호가 강한 모난 돌 같아서 싫었다. 누군가는 나를 정말 좋아했지만, 누군가는 나를 정말 미워했다. 미워하는 쪽이 소수더라도 나는 자꾸 나를 돌아봤다. ‘왜 싫지? 역시 내가 좀 끔찍한 사람인가?’
“나는 나를 포기하면 안 돼. 나는 내 편이 되어야 해.”
땅굴을 파고 있던 내게 이사님은 늘 내가 틀리지 않다고 말했다. 네가 옳다고 믿어. 꼭 믿어. 성취한 게 별로 없었던 그때의 나는 나를 믿기 꺼림칙했지만, 이사님을 믿었다.
“넌 눈에 띄어. 어쩔 수 없어. 그건 받아들여야 해. 근데 네가 그런 성격이라서 마케팅을 잘하는 거야.”
무던하지 못하고 사서 고생하는 성격. 여전히 그런 생각이 옅게 들 때면 나는 이사님의 말을 되새긴다. 싫어도 이게 나야. 내가 좋아하는 점들도 이런 나라서 있는 거야.
“C 회사는 좋은 조건이고 좋은 선택이지만, 그래도 이왕 하고 싶은 일이 생겼으니까 좀 더 도전해 보는 건 어때?”
이사님의 말이면 전적으로 새겨들었던 나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이사님이 해주신 말만큼은 지키지 못했다. 결국 안정성을 포기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이사님은 지금의 나를 두고도 틀리지 않았다고, 나를 믿으라고 말하시겠지. 그러니까 이사님은 저의 은인이에요. 제가 이사님의 말을 얼마나 세게 붙들고 살았는지 모르실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