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21
미국팀 리더는 왠지 친해지기 힘든 사람이었다. 일단 미국인이니까 영어를 써야 해서 그랬고, 일단 외국인이니까 문화 차이로 그에게 무례한 행동을 할까 봐 조심스러워 그랬고, 일단 그는 썩소를 짓지 않아도 썩소를 짓는 듯한 디폴트 표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랬다. 나는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방에 있던 그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너 입사한 지 한 달 넘었어?"
"응 한 달 조금 넘었어"
영어다! 영어의 사람이 말을 걸었어!!!
당황했지만 주방에 둘 뿐이라 피할 수도 없었다.
"너 Google Analytics에 대해서 알아? 어드민 기능에 대해서는 어디까지 알지? 온보딩은 어디까지 했어?"
그는 날이라도 잡은 양 본격적으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문장이 어려워지는 느낌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는 이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몰라. 그냥 3일 지나고 나서는 계속 그냥 일하는데? 왜?"
Why? 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나는 팀 매니지먼트에 관심이 많거든.
좋은 팀을 만들고 싶고,
곧 실행에 옮길 계획이야.
그래서 새로운 팀원들이
회사에 적응할 때 필요한 게 뭔지
너랑 대화하면서 미리 알아보려고."
기대치 않게 그의 대답은 감동적이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는 뉴욕 여름 인턴십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었다. 미래 팀원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몇달 전부터 노력하는 그의 정성이 갸륵했다. 해서 나는 기꺼이 미국팀 리더의 실험체(?)가 되었다.
"음 나는 올드 멤버들하고 섞이기가 힘든 것 같아. 나랑 동기 빼고 너희들은 3년 동안 같이 팀이었잖아. 우리는 너희가 나눴을 추억도 없고 회사 히스토리도 몰라. 그러다 보니 아무리 너희가 친절하게 잘해줘도 소외감이 들 때가 많아. 근데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지"
비록 영어는 못하지만 진실을 말하는 항아리인 나는 좋은 실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가 외국인이어서였을까? 오히려 한국인 멤버들에게는 하기 어려운 말도 그에겐 술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후에도 그는 종종 나의 상태가 어떤지 쿡쿡 찔러보곤 했다. 그리고 여름이 되자 역대급 팀을 빌딩 하겠다는 빅픽쳐를 이루러 뉴욕으로 날아갔다. 그사이 나는 한국 오피스에서 진행되는 인턴십 프로그램에 멘토로 참여하게 되었다. 나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 인턴들을 관리하기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웠다. 나의 부족한 카리스마를 개탄하고 있을 때면 저 먼 뉴욕에서 그가 미국인 인턴들을 아주 능숙하게 콘트롤 중이란 소식이 들려왔다. 그의 리더십이 부러우면서도 실험체로서 그의 성공에 일조한 것 같아 뿌듯했다.
"나 곧 한국 가. 우리 커피 타임 가져야지. 조각 케이크도 먹게 해줄게"
그렇게 두 달여 간의 폭풍 같은 여름이 지나자 미국에 있던 그가 슬랙을 보냈다. 그는 뉴욕 인턴십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멤버들을 데리고 한국 오피스에 온다고 했다. 새로운 미국팀원들은 회사 문화를 익히기 위해 3개월간 서울 오피스에서 함께 지낸 뒤 실리콘밸리의 팔로알토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제 입사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나는 곧 그의 팀원들이 보일 미래 그 자체였기 때문에 그는 또 실험체 인터뷰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내가 왜 그들은 뽑은 줄 알아? 전부 다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어.
각자 서로에게 없는 장점들이 있지. 그리핀도르 같은 팀이야!"
좋은 팀을 만든 그는 들떠 있었다. 나에게 너희 팀은 '래번클로'라고 말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쳇 나도 그리핀도르 하고 싶은데. 하지만 행복해 보이는 그를 보니 천상 리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축하해!
신데렐라와 백설 공주의 끝이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았대요'면 좋았겠지만 삶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필히 그녀들 앞에 출산, 육아, 고부갈등, 대출이자, 경력단절이 펼쳐졌을 것이다. 미국팀 리더의 끝도 '그리핀도르 팀을 만들어서 행복하게 살았대요'였던 것은 아니다. 연고 없는 먼 나라까지 날아온 팀원들이 자신만 바라보고 있으니 숨이 막혔을 법하다. 나도 더 이상 생기발랄하게 진실만을 말하는 뉴비는 아니었다. 스타트업이 주는 많은 책임과 자유는 때때로 사람을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몰입하게 하고 종국에는 지치게 한다.
하지만 지친 순간에도 피식 웃게 해주는 건 순수한 마음으로 꿈에 부풀었던 과거의 기억이다. 오늘도 나는 그 기억들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