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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by 앵그리 애나 Oct 09. 2017

29. "저는 이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인가요?"

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29

"13년 동안이나 쉬었던 당신한테 기회를 준 건 루이스 캐닝이 아니에요"

"제가 받은 제안서예요. 이것보단 높아야 남을 수 있어요"


미드 굿와이프의 한 대목이다. 주인공 얼리샤가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된 건 13년 후였다. 그녀는 검사장이었던 남편이 감옥에 가게 되자 생계를 위해 법대 동기가 대표로 있는 로펌에 입사하게 되었다. 분명 그 후 얼리샤의 활약은 훌륭했지만 애초에 젊고 유능한 다른 후보들을 제치고 그녀가 시카고 유명 로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친구 덕분이다. 원래라면 변호사 일을 다시 시작조차 할 수 없었을지 모른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가 가장 위기였던 순간, 그녀는 경쟁사에서 제안을 받았다며 사측에 연봉협상을 요구한다. 불과 며칠 전 연봉 상승이 있었다. 공동대표의 일침에도 그녀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나에겐 이런 배짱이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P사의 CCO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생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직 은혜도 못 갚은 까치인데 경쟁사에 어떻게 가. 주변에서 오히려 난리가 났다.

P사 완전 핫하잖아. 왜 그랬어


 바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번 만나는 볼 걸 그랬나? 당시 날이 갈수록 나를 공포에 떨게 했던 본부장님도 한몫했다. 게다가 제안받은 포지션이 굉장히 끌렸다. P사는 다양한 방송사들과 정식 제휴를 맺어 2차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으며 협업을 통해 합작 드라마를 계획하고 있다고 했다. 또한, 자체적으로 모바일 드라마를 만들고 있다고도 했다. P사의 CCO는 내가 그 분야를 전담해줄 수 있었으면 한다고 했다.

"제가 원하는 커리어나 비전과 일치해서 한 번 만나 뵙고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언제가 좋으신지요?"

결국 나는 경력자 언니가 불러준 멘트를 찍어 보냈다.


평범한 월요일 저녁이었다. 나는 적진에 몰래 발을 들이는 병사처럼 비장하게 P사가 운영 중인 사내 카페에 도착했다. 나에게 직접 연락을 준 CCO와 한 사람이 더 나와 있었다. 그는 P사의 COO라 했다. 줄곧 호의적인 CCO와 달리 COO는 매의 눈으로 나를 뜯어보는 느낌이었다. 그는 능수능란하게 우리 회사를 치켜세우다가도 무시했다. 그러면서 정보를 얻으려 하기도 했다.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막상 인터뷰를 보니 P사가 몹시 마음에 들었고, 옮기고 싶어졌지만 작은 정보 하나라도 말하기 힘들었다. 그냥 목구멍에 걸렸다. (컨피덴셜 교육이 이래서 중요합니다. 대표님 여러분?) 물론 우리 팀 일이 아니라 잘 모르겠다고 갸우뚱 해봤자 이런 면접이 숱했을 COO 눈에 내 거짓말이 안 보일 리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지금 회사 좋아하는데 P사 올 수 있겠어요?"

네, 갈 수 있어요. 가고 싶어요. 의심스러운 눈을 하고 COO가 던진 물음에 나는 꾸욱 힘주어 답했다.

여담인데 그때 면접관이었던 COO는 1년 뒤 우리 회사의 COO로 이직하게 된다.

면접이 끝나고 나는 우습게도 야근을 하겠다고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텅 빈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따뜻하고 소중한 우리의, 나의 공간. 문득 아까 우리 회사를 묘하게 깎아내리던 말들이 생각났다.

"안녕하세요, 애나님. 만나 뵈어서 참 좋았어요. P사와 참 잘 맞는 분이셔요."

그리고 메시지가 왔다. COO가 나를 마음에 안 들어 할 줄 알았는데 통과였다. 대표와의 마지막 만남만 남아 있었다. P사 HR팀이 제안한 날짜는 마침 내가 인턴십 세션이 있는 날이었다. 연차를 쓸 수가 없었다. 그 날이 지나면 P사 대표는 미국 출장을 가야 한다고 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종 면접이 일주일 뒤로 미뤄졌다. 생각할 시간도 많아졌다. 이미 가는 쪽으로 마음은 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날의 기억이 자꾸 떠올랐다. 울고 있는 나에게 함께 일하게 되어 기쁘다며 손 내밀어 준 그 날의 기억이.


아직 이 회사에서 하고 싶은 일이, 해주고 싶은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래도 가야 했다.


내가 P사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건 입사일이 비슷한 동료들뿐이었다. 당연히 초기 멤버나 리더들한테 말할 순 없었다. 해서 아무도 내가 P사에 가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잘된 일이라고 모두가 응원했다. 그런데 내 마음은 왜 그리 허했을까?


평범 월요일 오후였다. 나는 복잡한 마음으로 유리방에 혼자 들어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때 초기 멤버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의문이 든다. 왜 생전 안 하던 행동을 한 걸까. 왜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를 잡고 말을 걸었을까. 그는 슈퍼스타K처럼 내 앞에서 최종합격 소식을 알린 HR 매니저이자 UA팀 리더였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하며 도통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에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로 말할 것 같으면 굉장한 회피형 성격에, 논란이 될 발언은 결코 하지 않고, 남의 인생을 책임질만한 단언도 절대 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야기하기 더 편했다. 도 닦는 것 같은 그의 무표정과 몹시 미지근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고 나면 미련 없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P사에 가야 한다. 어차피 HR 매니저라 곧 그에게 말해야 하기도 했다.


역시나 그는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끝으로 나는 물었다.  

"저는 이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인가요?"

내가 아는 한 그의 예상 답변은 '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뭐가 중요하겠어요. 애나님이 스스로 필요하면 회사에 남는 거죠'다. 헌데 돌아오는 답변의외로 구구절절했다. 그는 내가 왜 필요한지 주절주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내 마음을 흔든 건 그다음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우리가 P사 이길 수 있나요?"

나는 이번 질문만큼은 그가 뭐라 대답할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고리타분하게 'P사와 우리는 아예 다른 서비스를 하고 있는 회사이기 때문에 누가 이긴다 진다 말할 수 없고'로 시작할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의외의 대답을 했다.


이길 수 있어요


바깥세상 누가 들어도 웃었을 소리다. 나 역시 정말 P사를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의 말을 들어준 것은 아니다. 말이 라이벌이지 그때 P사는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골리앗처럼 커 보였다. 그럼에도 저 성격에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내가 필요하긴 한가 보다 싶었다. 저희 같이 노력하면 이길 수 있어요. 그는 애꿎은 흰 테이블에 손가락을 자꾸 끄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완전히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었다.

"좋아요. 알았어요."

언론고시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대던 나를 선택해준 것은 지금의 회사였다. 하지만 이제 선택한 것은 내가 되었다.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기로, 힘닿는 데까지 모든 것을 쏟기로, 언젠가 올 마지막 순간까지 마음껏 사랑하기로 그 날 나는 정했다.


그러니까 이건 나의 첫사랑 같은 사를

내가 진짜 사랑하기 시작한 순간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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