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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Oct 11. 2017

에필로그 : 원피스 해적단이 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언론고시생의 스타트업 적응기 #30

오늘은 정말 중요한 선택을 한 날이다. 여름 햇살이 참 밝았어. 울고 있는 나를 앞에 두고 우리와 함께하자던 그 날의 힘은 생각보다 막강해서ㅋㅋㅋ루피가 해적왕이 되는 그날까지 행복하게 살아야지.

- 2015년 7월 6일의 일기


지독한 꿈에서 깨어났더니

불면증을 앓았다.


에릭이 결혼했다. 40대가 되어서도 결혼을 못 하면 신화를 원망하게 될 것 같았다는 그의 글 때문에 인터넷이 요란했다. 정말 그렇게 말한 걸까?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모습이 너무 예뻤던 소녀시대는 다섯 명만 재계약이 성사되었다고 한다. 올해 초 나도 남은 동료들을 두고 사랑하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영원한 팀은 없구나.

좋아했던 시대가 저문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할 때 나의 첫사랑 나의 스타트업을 증오하고 있었다. 울화통이 터져 보통은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어쩌다 잠이 들었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날 정도로 마음이 뾰족해져 있었다. 결국 나는 상한 마음을 돌리려 입사 첫날부터 6개월간의 이야기를 남기기로 한 것이다. 마법처럼 이 회사에 마음을 열게 된 날들이자, 마법처럼 돌려내고 싶어 했던 그때 말이다. 그러니 부디 나의 글이 스타트업에 대한 괜한 환상을 심는 것은 아니었으면 한다.

 

나는 원피스 나라에 뚝 떨어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였다. 스톡옵션도, 엑싯도, IPO도 몰랐던 앨리스는 동료가 되어 달라는 루피의 말에 뭣도 모르고 손을 덥석 잡았다. 행복했냐고? 그들과 꿈을 꾸는 동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지만, 동시에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안했다.

 

이제 막 합류한 앨리스가 신기한 세상을 만나 힘이 펄펄 솟아 가는 사이, 미리 3년을 굴렀던 원피스 해적단은 눈에 띄게 지쳐 가고 있었다. 먼저 같이 고생해주지 못해 미안해. 덜 지친 내가 더 많이 할게. 우리 좀 더 해보자. 나는 간절했다. 하지만 몰입이 잦은 스타트업에서 번아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열병이다. 회사가 운영하는 서비스를 본인과 동일시하 쉽다 보니 더 그렇다. 서비스가 곧 내가 되고 내가 곧 서비스인 삶. 아차하면 서비스는 내 인생보다 중한 '금쪽같은 내 새'가 된다. 우리는 어느새 인생을 갈아 넣는다. 하지만 서비스는 내가 아니고, 내 자식은 더더욱 아니다.


꿈은 짧고 현실은 길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으로 나는 항상 초조했다. 그러다 내가 지쳐 버렸다. 나는 주말이든 연휴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일했고, 매일 저녁 11시 45분이 되면 광고비를 조절했다. 회사를 위해 하루도 놓치지 않고 한 일이다. 하지만 점점 자정이 넘어 화들짝 깨는 날이 많아졌다. 다행히 매번 누군가 나 대신 광고비를 줄여 놓았다. 그게 누군지 나는 잘 알고 있다. 그 옛날 내가 그랬듯이 지친 나를 위해 말없이 더 일해주는 팀원이 있었다. 나는 그만둘 때가 왔다각이 들었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집단에 온도차가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경험상 차가운 쪽보다 뜨거운 쪽이 더 힘들고 종국에는 모두가 차가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팀원들이 이미 식어버린 허깨비를 데우려고 안절부절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나는 회사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배에서 내렸다.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는데 어쩐지 억울함이 가시질 않았다. 희생한 것이 너무 많은데 보상받을 곳이 없었다.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데 남은 게 뭐야? 나는 왜 내가 가장 최선을 다한 순간 때문에 지금 이렇게 괴로워야 해?


나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을 사람들에게 이런 반전을 고해서 미안한 마음이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면서 고맙게도 나는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의 첫사랑 같은 이 회사를 정말 사랑한다고. 지난 간은 헛되지 않았고, 소중한 배움이 많았다고. 이상한 나라에서 온 앨리스는 원피스 해적단이 참 좋아서 언제나 닮고 싶었다. 그 어느 날 배 위에서 앨리스가 홀로 울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다시 첫날로 돌아가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후회하는 내게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 충분히 잘했어. 다시 돌아갈 필요 없어.



나는 이제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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