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365일 중, 기억에 남는 날이 몇 번 있을까
언젠가부터 며칠 전 점심으로 무얼 먹었는지, 지난 주말에는 무얼 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누군가 그랬다.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라 자극적이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고.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순간들은 대개 그 경험이 처음이었거나 그만큼 강렬한 자극이었기 때문일 거다. 어렸을 때는 무엇이든 ‘기억력 좋다’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특별한 약속이 없는 한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내면서 나와 둘러싼 일들도 조금씩 희미해지는 것 같아 조금 슬펐다.
내 일상을 그래프로 표현하면 높낮이 없이 일자로 쭉 그어질 것만 같아 두렵기까지 했다. 매일이 기억에 남는 하루라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말이다.
- 인터뷰이: 기억력이 좋다고 자부하는 또는 기억력이 좋은 사람
- 질문: 최근에 해본 경험 중, 난생처음 경험해본 것은? 더불어 한 달에 새로 경험한 것은 몇 번 정도인가
당사자도 기억 못 하는 과거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 대학 동기 M이 단번에 떠올랐다. 지하철에서 한 번 본 얼굴도 기억한다는 M에게 최근 처음 겪은 경험에 대해 물었다.
“이탈리아 패키지여행을 ‘혼자’ 간 거. 유럽이 처음이기도 했고, 패키지여행을 혼자 가본 것도 처음이었어."
이국적인 풍경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많게는 수천 년 되었다고 하니, 그 스토리가 너무 흥미로웠다고 했다. 난생처음 세계사를 다시 공부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고. 혼자 패키지를 다니니, 혼자인 듯 혼자 아닌 상황이 재밌는 경험이었다고 했다. 그럼 최근 한 달 동안 몇 번 정도 새로운 경험을 했는지 물었다.
“3-4번 정도? 이번 달엔 유독 여행이 많았어. 유럽 그리고 강원도 여행, 독서 모임, 새로운 맛집 탐방까지!”
과연 듣기만 해도 새로움이 팡팡 터지는 한 달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이런 거까지 기억해봤다’ 싶은 경험이 있는지 물었다.
“유치원 때 일도 거의 다 생각나. 아빠가 웨딩피치 릴리 립스틱을 안 사 오고, 데이지 요술봉을 사 와서 엄청 운 것도 기억나. 초등학교 때도 기억나고. 친구랑 비밀 이야기를 모래에 파묻어놨는데 다음 날 비가 와서 바로 파러 갔던 것도 기억나. 또..”
M의 머릿속 메모리카드는 9,999GB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이러다 일대기를 전부 소환할 것 같아 인터뷰는 이만 마무리했다. 이야기를 마치고 보니 기억나질 않는다고 슬퍼만 할 게 아니라 일상에 소소하게라도 무언가 변화를 주고 싶었다. 사실 이 인터뷰도 그의 시작이었다. 30일 동안 매일 누군가를 인터뷰하는 것. 꼭 어려운 질문을 던지거나 유명한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었다. 인터뷰라는 형식을 빌릴 뿐, 지극히 일상적인 질문을 내 주변에 물어봐서 답을 얻는 것이다. 결과는 생각 이상이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가깝던 친구의 다른 모습도 발견하게 되고, 동료의 몰랐던 추억도 알게 되고, 가장 잘 안다고 믿던 엄마의 꿈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일상으로 끌어온 또 다른 새로운 시도들은 '7천보 걷기'와 '다이어리 쓰기'다. 일을 할 때 보통 한 일과 할 일 목록을 만들어, 마칠 때마다 하나씩 그어가며 하는 편이라 이 작은 시도들도 꼭 '해야 하는 일'들로 다가왔다. 그럼에도 매일 7천보를 걷기 위해 점심시간에 회사 옥상을 올라간다거나 평소 내리는 버스 정류장보다 앞서 내려 동네를 도는 일, 매일 다이어리를 쓰며 돌아보는 시간들이 꽤 보람찼다. 그리고 매일 무언가를 해냈다는 작은 성취감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그저 흐르기 마련인데, 이 시간들이 지나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참 어렵지만,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어 매일이 다르게 느껴진다. 어느 하루도 소중하지 않은 날은 없다. 매일 누군가를 인터뷰하며 꽉 채워 보냈던 11월의 나날들이 지난날보다 더 또렷이 기억에 남는 것을 보면 사소하지만 새로운 시도들이 내 시간들을 더 다채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